56화. 올스타전
올해 올스타전은 브루어스의 아메리칸 패밀리 필드에서 벌어진다. 지붕개폐형 구장이고, 타자친화적 구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3년간 파크팩터(구장의 성향 지표)가 0.976으로 수치상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와 본 적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로테이션이 어긋나서 등판하지는 않았었다.
‘아! 겁나 지루하네.’
다들 안면은 있는 선수들이었지만 내가 내셔널 리그 초년생에다 그리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다.
‘이런 성격이 문제 있다는 건 알지만 이제 와 어쩌겠어.’
그 결과로 누구와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멀뚱거리며 앉아 있다.
팀 선수들이 타석에 설 때마다 속으로 시원하게 쌍욕을 많이 했었는데 일시적이지만 팀 동료가 되어 같은 덕아웃을 쓰게 되니 민망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게임에 별로 긴장감도 못 느끼겠고 노곤하기만 해 구석에 앉아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예전에는 올스타전에서 승리한 리그의 우승팀에게 월드시리즈에서 1, 2, 6, 7차전을 홈경기로 치를 수 있는 혜택을 줬다. 그래서 상위권에 있는 팀들의 소속 선수들은 상당히 열심히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부터 홈경기 개최가 월드시리즈 진출 팀의 정규 시즌 승률로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제는 축제 이상의 별 의미를 못 느끼겠다.
지금까지 우리 팀 승률은 5할이 조금 넘는다. 아직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포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망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다.
‘졸다가 카메라에라도 잡히면 개망신이지. 긴장하자고. 에고, 졸려.’
“이봐. So. 정 졸리면 불펜이라도 좀 일찍 가서 몸이나 풀어. 정말 못 봐주겠네.”
컵스의 투수 톰슨이다. 하품할 땐 글로브로 얼굴 가리고 했었는데 다 보였나 보다. 그래도 이 아저씨는 대하기가 좀 낫다. 내가 투수 욕은 별로 안 했다.
“피곤해서 움직이기가 싫어요. 난 금방 몸 풀리는 스타일이니까 7회쯤 가도 돼요.”
오늘 내 등판 예정은 8회나 9회가 될 거라고 미리 말을 들었었다.
“크큿. 몸 안 좋으면 쉬지 왜 왔어? 첫 올스타 선발이라 감격에 겨워서?”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올스타전 직전 등판했던 세 경기에서 제대로 이닝을 먹지도 못하고 4. 3. 3 딱 10실점을 했다. 1을 조금 넘던 ERA가 2에 육박한다.
‘아무래도 컨디션을 너무 일찍 올렸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선발이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감격은 무슨··· 그건 첫 선발 등판 때 조금 찌르르하긴 하던데··· 요즘은 피곤해서 그런 거 느낄 정신이 없었다구요. 어디 등만 붙이면 잠이 와서···”
“히힛. 풀 타임 첫해는 다 그래. 너 시계 홍보 때문에 왔구나?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어?”
소문이 좀 나긴 난 모양이다. 다른 팀 투수까지 알 것 같으면··· 좋은 현상이다.
“그것도 있고··· 사실은 좀 궁금하기도 했죠. 올스타 나가면 연봉 협상에 도움이 된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 이래저래···”
굳이 부인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명예의 전당에 가려면 올스타 경력이 많을수록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건 너무 먼 일이라 현실감이 없다.
“그 시계 이야기인데 말이야. 나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야. 그거 하나 줘. 돈은 원하는 만큼 줄게.”
‘어? 이 아저씨가 왜 그거에 관심을 가지지?’
톰슨이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총액이 2억 달러에 가까운 대박 FA 계약을 했다. 왜 이런 투수가 미천한 풀타임 1년 차 투수 시계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이거 농담이겠지?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않나? 하긴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로저 클라멘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그렉 매덕스, 스티브 칼튼 등등 한 번쯤 했을 것 같은 투수 중에도 퍼펙트는 고사하고 노히트 노런을 못해본 투수가 허다하다.
‘페드로는 좀 억울한 경우이긴 했어.’
물론 반대로 몇 번씩 그걸 해낸 투수도 있다. 놀란 라이언 7회, 샌디 쿠펙스 4회, 저스틴 벌랜더, 밥 펠러, 사이 영, 래리 코포란이 세 번씩 했다. 모두 인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당신 같은 사람이 그 시계를 원한다니 좀 의외라고 생각되네요.”
“그건··· 흠, 내가 뭘 좀 모으는 데 취미가 있어서 말이야. 처음엔 트레이드 카드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이것저것 좀 많이 손대게 되어버렸지. 은퇴하면 수집품으로 개인 박물관을 열어볼까 생각하고 있어.”
‘하아! 취미 생활 스케일이 다르네. 박물관? 나도 2억 달러 계약을 하면 저렇게 될까?’
어쨌든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바람잡이가 될지 진짜 낙찰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죄송한데 지금 남는 게 없어요. 좀 남을 것 같더니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2차로 기념 시계를 다른 종류로 다시 맞추고 있는데 그건 퀄리티가 좀 낮습니다. 그거라면 하나 드릴 수 있죠. 돈은 필요 없어요.”
우리 구단에 관계된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처음엔 선수 코칭 스탭 구단 관계자들 정도 생각하고 100개 정도면 여유 있겠다 싶었는데 당장 마이너리그 감독, 선수부터 하나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고 재무나 행정 쪽에 일하는 직원 등등···
좋은 소리 들으려면 쓸 때 확 써야 한다. 어정쩡하면 쓰고도 욕먹는다. 엄마가 그랬다. 그래서 개당 100불 정도 퀄리티로 1,000개를 다른 시계 회사에 다시 주문했다.
‘그것만 얼마가 나가는 거야? 어휴! 좋게 생각하자고. 쓸 때 기분 좋게 써야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물론 일단 준다니 감사하게 받겠네. 그거 말고 그 리미티드···”
“그걸 원하시면 내일 증정 행사 뒤에 기부를 위한 경매가 있어요. 고유 번호 1번부터···”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 그렇다면···”
최소 한 개는 확정된 것 같다. 내가 이런 영업력은 좀 있는 편이다.
“톰슨 씨와 말하다 보니까 졸리던 게 없어졌네요. 이제 불펜에 가서 등판 준비를 좀 할게요.”
빠질 때 빠져야 한다. 괜히 길게 말하다가 코 걸리는 수가 있다. 변수는 항상 존재하니까. 보통 투수는 변덕이 심하다. 난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투수의 그런 성향은 확실히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여기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야.’
너무 일찍 와버렸다. 덕아웃에서는 재미가 없긴 하지만 경기라도 보면 되는데 여기서는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어슬렁거리면서 투수들 연습 투구 구경을 하다 보니까 어영부영 시간이 가긴 간다. 좀 구경하다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나도 연습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아! 베그웰이 그리워.’
도와주는 포수도 자기 팀으로 돌아가면 주전이다. 하지만 포구 시 뭔가 산뜻한 맛이 없다.
‘어휴! 아저씨 그거 그렇게 잡으면 볼 판정 받는다니까.’
한 번도 안 맞춰본 것 치고는 잘 잡아내지만 내가 겪어 본 메이저리그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스트라이크 존이란 게 평면이 아니고 입체형이다. 홈플레이트가 위로 그대로 올라간 오각기둥 형태의 가상 공간이다. 그곳 어디라도 공이 스치면 스트라이크다. 물론 주심의 눈이 그 경계를 완벽하게 구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 같은 유형의 투수에게는 포수의 프레이밍이 아주 중요하다.
작년 초 마이너리그에서 기계식 판정을 받으며 경기를 진행해보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고 하는 판정과의 차이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포구는 경기 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공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행위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프레이밍 능력을 가진 포수는 그것만으로 한 시즌 15~25점 정도의 팀 실점을 막아준다고 한다. 이것을 WAR(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로 환산하면 무려 2~3 정도가 된다.
베그웰은 그것만으로 연봉 150만 불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WAR이 2~3 정도 되면, 어느 팀에서고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이 능력만으로 본 작년 리그 최고 포수는 50점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건 WAR 5가 넘어간다. 팬그래프 기준 WAR 5~6은 슈퍼스타급이다.
‘내가 그 포수와 맞춰보진 않았지만 베그웰이 그보다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구.’
그런데 문제는 그 포수도 그렇고 베그웰도 이 자리에 없다. 그만큼 프레이밍 능력이란 것이 애매한 능력이다.
리그 대부분의 투수는 존의 경계선 근처를 오가는 피칭을 할 만큼의 제구력을 갖추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파이어볼러는 대부분 그렇다. 그런 투수에게 포수는 프레이밍을 할 기회 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프레이밍은 잘하면 좋지만, 포수의 주능력이 될 수가 없다.
‘나 같은 선수가 잘 없다고.’
아무튼 오늘 난 안될 것 같다. 지금은 같은 팀이지만 여기 있는 선수 모두가 다음 주면 적이 된다. 적에게 내 무기를 다 보여주는 건 바보짓이다. 그래서 오늘 던질 구종은 싱커와 투심 단 두 구종으로 정했었다.
‘하! 내 레퍼토리가 봉쇄당해 버렸어.’
그렇다고 지금 포수가 나쁜 포수는 아니다. 닉 마이어스는 안정감을 추구하는 성향의 포수일 뿐이다.
내가 아래로 떨어지는 낙차 큰 싱커를 던진다면 베그웰은 존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것처럼 보이도록 미트의 끝쪽을 이용해 잡아내지만 이런 유형은 포일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미트를 바닥에 내리꽂듯 하여 확실히 잡는다.
그렇게 잡아도 대부분의 투수에게는 상관없다. 하지만 난 그 대부분이 아니다. 이건 정밀한 제구를 바탕으로 구속과 무브먼트에 변화를 일으켜 존의 경계면을 오가면서 상대를 농락해야 하는 투수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다.
‘윽!’
포수가 알아차린 것 같다. 미묘한 눈빛이다. 너무 티를 냈나 보다. 모르는 척 안색을 고치고 계속 연습구를 던졌다.
‘정말 돌겠네.’
8회에 등판했다. 스코어는 5:2로 우리가 지고 있다, 차라리 이게 부담 없다. 나와 함께 포수도 교체되었다. 이래서 같이 연습을 시킨 것 같다.
“후훗. 잘 안될 것 같지만 잘 해보지.”
오랜 기간 동안 닦아왔던 포구 기술이 바꾸고 싶다고 단시간에 바꿔지는 게 아니다. 그가 답답하게 느끼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닉.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서로 할 수 있는 걸 하면 충분하죠.”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이런 상황에서 어쩌겠는가?
“우우! 지금 뭐 하냐.”
볼넷을 연속으로 두 개 줬더니 관중석에서 난리가 났다. 여기는 내셔널 리그 구장이다. 꿋꿋하게 다시 크게 떨어지는 싱커를 던졌다.
타자는 실실 웃으며 공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악! 심판 좀 바꿔 봐. 공 열 개에 판정을 다섯 개 틀리면 어쩌자는 거야!”
관중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 세 타자만 상대하고 마음 편하게 난 교체되었다. 투구 추적 시스템이 심판을 잡았다. 요즘은 구장 내 전광판에 웬만한 건 다 나오고 열성 관중은 휴대폰으로 중계도 같이 보는 시대다.
과학 문명과 시대의 승리다.
‘좀 미안하긴 한데 어쩌겠어요. 나도 살아야지. 이제 욕먹기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