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어머니 가라사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예.”
열은 엄청나게 받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억지로 5이닝을 버텼지만 4실점이나 하고 말았다. 오늘 공의 무브먼트 조절이 평소처럼 잘되지 않았다. 무뎌진 그 공으로는 상대 타자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휴! 이 정도면 벤치에서 많이 참아준 거지.’
6월이 되면서 페이스가 좀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오늘 터진 것 같다. 원정에서 한 게임 제대로 털리고 말았다. 원정 첫 경기라 장거리 이동 후 컨디션 회복이 덜 되어서 이렇게 되었다든가 이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못 던진 건 못 던진 거다.
‘그나마 게임을 이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아이싱을 하러 락커룸으로 가는데 베그웰이 따라 왔다.
“너도 교체냐?”
“응. 그렇다네.”
베그웰의 타격이 아직은 감독에게 의문 부호인 것 같다. 지금 스코어는 6:4이다. 6회라면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점수이긴 하다.
‘요즘 나름 잘 치는데 그 정도로는 안 되나?’
그의 현재 타율 0.236. 홈런은 없다. 지난 시즌에 비해 타율은 5푼 이상 올랐지만, 그 반대급부로 장타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주전 포수 프레디와 타율만 비슷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교체는 감독의 입장에서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너도 어렵고 오늘은 나도 어렵네. 잊자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원정은 오늘 등판한 나에게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음 원정 한 번만 더 등판하면 홈으로 돌아간다. 홈 3연전을 마지막으로 상반기가 끝나고 휴식이 며칠 주어진다.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두 번 정도 더 등판하면 돼. 그때까지만 참으면 좀 쉴 수··· 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다. 어쩌면 올스타전에 출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77게임이 치러졌으니 올 시즌 거의 절반이 지났다. 지금까지 로테이션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오늘 경기를 제외하고 14번 등판해서 9승 2패를 했다.
‘ERA가··· 아이고! 오늘 겨우 5이닝 던지고 4점을 줬으니까 꽤 많이 올랐겠네. 아무튼 지금 이 성적이면 당연히 나가겠지. 꼭 그런 건 아닌가?’
투수의 올스타전 선발은 일반 팬 투표로 선정되는 야수와 다르게 선수와 감독, 코치로 구성된 전문가 그룹의 투표로 이루어진다. 어느 쪽이든 실력 이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다.
실력의 탁월함은 대개는 대중적 인기로 이어지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J.D.마르티네스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시즌 동안 시즌 평균 0.306의 타율과 총 207홈런, 585타점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올스타에는 세 번만 뽑혔다.
뽑히지 못한 2017년 시즌 성적은 타율 0.303 홈런 45개 104타점 f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는 3.8이었다. 이것보다 성적이 못했던 2019년에는 뽑혔다. 물론 그때도 fWAR은 3.6이었다. 지금도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다.
“베그웰. 저기··· 내가 올스타에 뽑힐까?”
“당연히 뽑히겠지. 팬 투표라면 혹시 몰라도 투수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 니가 선발 안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얘는 무작정 내 편을 들 거 같아서 객관성이 좀 떨어지는데···’
아이싱을 도와주는 트레이너가 있지만, 이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럴 때는 독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안성맞춤으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트레이너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빌려 고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금함을 참기에는 마음이 급했다. 모르는 번호라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바로 전화를 받는다.
“저 영수예요.”
“어? 오늘 게임 있는 거 아니야? 이 번호는 뭐냐?”
“그건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무슨 일이냐면···”
갑자기 떠올랐던 이야기를 쭉 해줬다. 가급적이면 올스타전에 안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올스타전을 안 나간다고 별로 튀지는 않는다.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부상 등의 이유를 대지만 글쎄··· 과거에 베츠, 디그롬, 알투베, 코레아··· 에고, 정신 차려라. 아직 내가 그 급은 아니지.’
“그거? 되면 당연히 나가야지. 뭘 벌써부터 힘들다고 징징거리냐? 계약도 있고···”
“예? 힘들면 쉬어야 팀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는 팀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계약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시계 회사와의 계약에 그런 조항이 있어. 올스타가 되면 무조건 출전해야 해. 그 회사 입장에서는 니가 어디에고 많이 나와야 홍보가 되지 않겠니?”
생각지 못한 암초가 있었다.
“아! 그런···”
“세상에 공짜 돈은 없어. 그 회사에서는 네 올스타전 출장이 틀림없다고 보고 그에 맞춰 공개 행사를 준비하는 것 같던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그냥 나가서 대충 1이닝 던지면 되지 뭘 그러냐?”
“아! 예.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서 할게요.”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다. 이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음식이 먹음직스러워 보여 덥석 입에 넣었더니 먹으면서 지켜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격식이 있었다. 계속 먹으려면 그 격식을 따라야 한단다.
입에 들어온 걸 뱉을 수도 없고 참 갑갑하다.
“So. 무슨 일이야? Go랑 다퉜어?”
외국에 살면 이럴 땐 좋다. 주변에 알리기 싫은 통화라도 장소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한다. 이 공간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시계 회사 행사에 대해 좀 물어봤어. 너도 참석해야 하는 거잖아.”
“아! 그거? 기대 중이야.”
베그웰이 웃는다. 머리 아픈 이런 일을 굳이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노라면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 이야기 들었는데 그거 나도 하나 주는 건가?”
트레이너 짐도 관심이 있었나 보다.
“그럼요. 그래서 일부러 계약을 한 건데요. 아직 제가 연봉이 최저 수준이잖아요. 이러지 않고서 제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다 챙기겠어요. 구단 직원들에게도 다 드릴 겁니다.”
계약을 하게 된 내막은 좀 다르지만, 립 서비스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좋아. 그날 좋은 거 받으니까 기부라도 해야겠네. 넌 좀 안 할 거야?”
베그웰이 이상한 말을 했다.
“기부?”
“그래. 보통은 그런 행사가 끝나고 나면 기부를 하는 관례가 있어. 못 들어봤어?”
그런 관례 처음 들어봤다.
“그거 우리 같은 최저 연봉자가··· 아! 넌 이제 그건 아니구나. 기부라···”
마이너에서 연봉 만 불을 받다가 메이저 최저 연봉을 다 받게 되는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베그웰의 마음은 존중하지만 내가 동참해야겠다는 마음은 선뜻 생기지 않는다. 생활비, 병원비가 없어서 엄마 시계를 판 게 아직···
‘어휴! 또 생각나 버렸네. 그 시계도 찾아야 하고 할 일이 많다구.’
“글쎄, 그런 건 안 해봐서···”
“생각 좀 해봐. 괜찮을 거야. 기부하면 현실적으로 손해만은 아니야. 일단 기부한 금액에 대한 소득 공제가 돼. 총소득의 50%까지 인정해 준다고.”
짐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다르다.
“억만장자들이 말년에 왜 그렇게 크게 기부하는지 알아? 자선 활동에 대한 신념도 물론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익이 있기 때문이지. 자신이 소유한 주식을 기부하면 20%까지는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아.”
‘오호라! 짐이 잘 아네.’
무엇인가 마음에 끌림이 있는 설명이다.
“기부자들을 레인메이커라고 부르지. 레인메이커가 기도를 통해 가뭄에 단비를 내리게 하듯이 기부를 통해 사회 소외계층을 숨 쉬게 만들어 주는 사람은 존경받아야지. 존경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짐의 말에 의하면 부자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국의 연간 기부액 중 일반인 기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70%나 된다니··· 일반 사람들도 학교, 마을 체육관, 공연장 등 지역 단위에 소액이더라도 기부하는 것이 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나눔과 기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게 교육 과정에 있다고?’
“저기 짐. 그런데 기부를 받는 단체가 사기꾼일 수도 있잖아요. 신뢰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극소수야. 170개 이상의 비영리단체가 평가 기관이 되어서 기부금 운용을 감사한다고. 대개는 재정의 투명성이 보장돼. 원한다면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어떤가?”
구미가 확 당긴다. 나에게 이미지 관리가 필요한 시기가 되기도 했다. 순간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베그웰 그거 하자.”
“뭐? 갑자기 왜 그래?”
“기부하자고, 짐 소개해 주신다는 데가 어디예요? 단체 이름 좀 알려줘요. 그리고 전화 한 통만 더 쓸게요.”
고 감독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무슨 일이야? 올스타전 그거 안 하겠다는 말이면···”
“아참!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앱니까? 그런 걸로 징징거리게···”
“그럼 무슨 일이야.”
“우리 엄마가요.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었는데···”
“뭐! 어머니? 어휴! 그래 뭐라고 하셨어?”
‘그 사람 좀 그래.’ 이 정도의 남 이야기는 맥락 없이 누구나 한다고 하셨다.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드물지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면 급격히 많아진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그때 스스로를 지키려면 가까이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음. 좋은 말씀 하셨네. 그런데 지금 왜···”
기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그 연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내가 특별하지 않았으니까.
“경매를 하죠. 수익금은 다 기부하는 걸로 하고···”
“뭘 내놓자는 거냐? 설마 시계?”
역시 고 감독이다. 감이 좋다.
“예. 다는 아니고 그 백 개 받는 시계 말이에요. 그게 말하자면 리미티드 에디션이잖아요. 고유 번호도 있고. 만약 없으면 좀 새겨 달라고 하세요.”
“잘은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치고. 그러고 나서?”
설명이 좀 필요한 일인 것 같긴 하다.
“1번, 11번, 22번 이런 식으로 99번까지 10개만 빼서 그걸 내놓자구요. 남은 90개로도 줄 사람은 다 줄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하다만,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뭐가 좋은데?”
“저한테 악감정이 있거나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이 경매에 나서지는 않을 거잖아요. 일반 모델도 이삼천 불은 하는 시계니 낙찰가도 꽤 세겠죠. 결국 야구를 좋아하고 경제력 있는 사람이 낙찰받게 되겠지요.”
“음.”
“저한테 우호적이고 힘 있는 사람들이 퍼펙트 기념 시계라는 동질감의 요소를 가지고 모이게 되는 거죠. 그걸 빌미로 모임을 만들어도 되고··· 현실적 우군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어머니 가라사대. 중요한 것은 멀리서 나를 비난하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아니다. 나를 위해 대신 싸워줄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거라.
‘엄마 말만 잘 들었으면 지금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