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53화 (53/200)

53화. 천적 (2)

“타임.”

감독과 베그웰이 마운드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모양새 빠지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상황이 지금 내가 카스트로란 놈에게 뭔가 꿀린다는 걸 온 사방에 광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와도 되는데··· 쟤들은 왜 와?’

어슬렁어슬렁 내 외야수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괜히 감독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보게 된다.

“잭 모리스가 고집불통이라 머리가 좀 아프지?”

‘응? 그게 누구야? 카스트로 때문에 올라온 게 아니었어? 이럴 때 물어볼 수 있는 건···.’’

베그웰을 쳐다봤다. 그가 턱 끝으로 홈플레이트 쪽을 가리킨다.

‘아! 주심.’

정말 베그웰은 영혼의 동반자 같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주심이 왜? 판정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거야 그럴 수 있는 거잖아. 나도 득 볼 때가 있는데···’

사람의 감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시때때로 변한다. 통상적으로 3시간이 넘는 긴 경기 시간 동안 주심이 같은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사람과 기계는 다르다, 그런데도 기계적 판정을 기대한다는 건 바보짓이다.

원래 스포츠의 매력이라는 게 그런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는 의견도 있다.

‘내 주변에 그런 식으로 말할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

고 감독이 늘 주장하는 말이다. 누가 이기고 질지 명확하게 답이 나와 있다면 그런 걸 누가 보고 중독되겠냐고.

조금 전에 계속 그렇게 던졌던 건 존 변화를 살펴보려고 했던 거였다. 투구를 이어가려면 새롭게 형성된 존이 어디까지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MLB에서 심판의 볼 판정 정확도는 2008년 83%였다고 한다. 2015년에는 86%로 올랐고 현재도 그것과 별 차이 없다,

‘기술 발전의 영향으로 심판 노릇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 거지. 어느 날 투구 궤적 추적 프로그램이 나오고 오류에 대한 수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려서···’

애초에 스트라이크 존이란 것은 고정된 게 아니다.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베이스 상공을 말한다. 스트라이크 존은 투구를 치려는 타자의 스탠스에 따라 결정된다. - 야구 규칙 2.73』

이 이야기를 가만히 풀어서 생각하면 홈 플레이트의 크기는 정해져 있어 존의 가로 넓이의 변화는 없지만 상하의 변화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룰 대로 하자면, 키 2m인 타자와 170cm 타자의 존이 같을 수가 없다. 신장 차이가 그렇게 나면 무릎 높이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의 존은 거의 같다. 심판이 각 타자들 키에 맞춰 존을 세밀하게 변화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신만의 존을 정해 놓고 오로지 감각의 영역에서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각이란 건 기분에 따라서 변하고 주위 환경에 따라서도 변한다.

야구가 생긴 이래 스트라이크와 볼의 기준은 항상 그런 거였다. 심판은 룰을 지키는 하수인일 뿐이다. 싸우려면 룰과 싸워야 하는데 특정할 수 없는 대상과의 싸움은 일어날 수가 없다. 허공에 대고 손짓 발짓 해봐야 나만 미친놈이 될 뿐이다.

‘내가 맞추면 되지. 원래 일관성 있는 판정은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만약에 기계식 판정이 도입되어서 정말 룰 대로 타자에 따라 스트라이크 존을 변화시킨다고 하면 그 변화에 맞춰 던질 수 있는 투수가 과연 있기나 할지 의문스럽다. 이 때문에 어느 날 그런 것이 도입이 된다고 해도 적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불확실성에 기반하여 성장하고 지금까지 성행하고 있는 것이 야구다. MLB에서 기계식 판정 도입에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것이 심판 노조보다는 선수 노조다. 왜 그럴까?

“이 상황이 좀 그렇긴 한데 주심 판정은 별로 신경 안 써요.”

“내가 좀 전에 모리스 놈 얼굴에 한 방 날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감독만 아니었으면···”

주심이 빤히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람 욕을 하려니까 좀 거북하다. 그래도 우리 팀 감독이 하는 말인데 동조는 해줘야 한다.

“배가 나와 펀치를 피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직 감독님은 쌩쌩하잖아요.”

이것도 사회생활이라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상사 칭찬에 인색한 부하는 승진이 느리다.

“일단 한 대 날리지 그랬어요. 모리스 아저씨는 좀 맞아도 돼요. 나도 아까 전 타석에서···”

느닷없이 중견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휴! 레브론. 그건 오버지.’

“다음 타석에서 스윙하다 배트를 놓치는 척하면 어떨까? 좀 세게 맞히면 경기에서 빠지지 않겠어?”

1루수 필이다. 과묵한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다들 왜 이러는 모르겠다.

‘이거 농담이겠지? 너무 진지하게 말을 하니까 진짜로 하겠다는 것 같잖아.’

“킥킥. 그러다 진짜 세게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다 심판이 빠지는 게 아니라 니가 퇴장 당할 거야.”

“필 자네는 빠지면 안 돼. 4번이 빠지면 대체할 선수가 없다고···”

감독이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맞장구를 쳐준다.

“그만들 하시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왜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그래야 합니까? 혹시 역전당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시고 지금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 이 상황에 이런 말장난이라니 나도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럴 일 없겠네. 잘 던져. 나 들어간다.”

별안간 감독이 돌아서 덕아웃으로 걸어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하다. 투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농담 퍼레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끝에 어떻게 하라는 간단한 지시는 있을 줄 알았다. 이건 니 마음대로 잘하세요라는 신호만 주고 간 꼴이다.

베그웰도 피식 웃으며 내 팔만 슬쩍 두드리고 돌아갔다. 야수들도 돈 워리 비 해피를 흥얼거리며 돌아섰다.

‘돈 worry 非 happy? 크큿. 왜 갑자기 이런 썰렁한 생각이 나는 건지···’

“플레이 볼.”

얼렁뚱땅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메이저리그의 경기당 평균 투구 수는 약 288개이다. 이 중 46.7%의 공에 타자의 배트가 나온다. 그렇다면 심판은 154번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해야 하고, 오심 확률은 평균 14%이다. 경기당 평균 21번 이상의 잘못된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하게 된다.

각 심판의 역량은 같지 않겠지만, 통계에 따르면 리그에서 스트라이크 볼 판정이 가장 정확한 심판과 가장 떨어지는 심판의 차이는 경기당 5번 정도이다.

‘이건 대부분의 경기에서 18~23번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의 오류가 일어난다는 말이지.’

그 통계가 정확하다면 전체 시즌으로 보면 무려 5만 번의 잘못된 스트라이크·볼 판정이 일어나고 그 위에서 야구란 스포츠가 존속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난 몹시도 불안정한 바탕 위에 성립된 경기를 하고 있다.

‘불확실한 거야. 네 번의 표본으로 카스트로와 나와의 상성 관계를 규정 지을 수는 없어. 이 동네는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게 돼.’

사실은 볼넷으로 거를 생각이었다. 1루에 주자가 있었지만, 카스트로 저놈과 다시 대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벤치에서 그냥 intentional walk(고의사구) 신호를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촉진 룰에 의해 굳이 공을 네 개 더 던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감독은 이 승부를 나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여기서 볼넷을 주면 가오가··· 음. 모양새가 안 나겠지?’

너무 일찍 쫄고 있었다.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껏 네 번에 세 번 안타를 맞았더라도 앞으로의 네 번이 꼭 똑같이 되는 건 아니다.

‘네 번은 표본으로 너무 적어. 그럼 당연하지. 제아무리 날고뛰어도 표본이 많으면 저 자식이 4할 이상을 칠 수 있을 리가 없어. 7할 5푼이라는 건 오류야. 난 잠깐 거기에 현혹된 거고···’

2000년대 이후 시즌 최고 타율은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토드 헬튼의 0.3724이다. 카스트로가 그들보다 뛰어난 타자는 아닐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본격적으로 승부에 들어갔다. 솔직히 많이 찝찝하다.

“스트라익.”

하이 패스트 볼로 헛스윙을 유도해 냈다.

‘그렇지. 이놈이라고 모든 공을 다 쳐내는 건 아니야.’

아웃코스 멀찌감치 공을 하나 뺐다. 비슷하게 빼면 또 이상하게 쳐낼까 봐 붙이지를 못하겠다. 이놈은 가끔 보면 어이없는 공에도 헛손질을 해 대던데 왜 내게는 안 그러는지 모르겠다.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잘 사용하지 않던 인코스로 하나 붙이고 빼고 해서 투 볼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었다. 스윙이 살벌하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등에 진땀이 다 난다. 슬쩍 고개를 돌려 1루 주자를 눈으로 견제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 주자의 빠른 스타트가 걱정스러웠다. 주자는 그런 것에 별 관심 없는 듯 리드 폭이 작다.

‘타자를 믿는다는 거야? 아! 이제 별게 다 신경이 쓰이네.’

이번 회에 세 번째 타자인데 한 열 명 상대한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다 왔다.

‘너도 이걸로 끝이다. 잘 가라.’

내 투구 구종 중 구사 비율이 가장 적은 건 업슛이다. 한 게임에 4~5개 정도 던진다.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는 구종이라 최대한 사용을 자제한다. 이 구종은 의외성을 유지해 궤적이 생소해야 가장 큰 위력을 갖는다. 오늘은 아직까지 하나도 안 썼다.

‘어?’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 가장 자신하는 공을 던졌지만, 저 빌어먹을 카스트로 놈은 몸을 움찔거리지도 않고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너무 의외라서 놓친 거야? 니가 그럼 안 되지. 억지로라도 스윙을 해야··· 아이고! 이래저래 애먹이네. 이제 뭘 던져야 하는 거지?’

방금 전 궤적을 보여줬는데 업슛을 또 던질 수는 없다. 저 눈 밝은 놈이 속을 리가 만무하다.

베그웰에게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다. 볼넷을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할 수 없다.

‘스윙이 따라와 주면 다행이고 아니면··· 1루로 꺼져버려.’

나름 심혈을 기울인 유인구였지만 카스트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웃코스로 빠져나가는 볼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에잇, 썩을··· 결국 볼넷인가?’

“스트라익.”

“뭐?”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이 나왔다. 한 타임 느리긴 했지만, 분명히 콜을 했다.

카스트로가 시뻘게진 얼굴로 헬멧을 내동댕이쳤다. 격렬한 항의가 시작되었다. 브레이브스 감독도 총알 같이 달려 나왔다.

‘퇴장? 아이고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죠. 봐 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구요. 저쪽 감독이 F자로 시작하는 말을 한 것 같아요. 같이 보내야죠.’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다.

‘오심? 보상 판정? 까라고 하세요. 원래 야구란 이런 거라니까요.’

오늘 정말 최고의 심판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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