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것이 프로다
잘 모르는 일은 물어보면 된다. 현세의 빅 브라더를 열심히 검색했다.
들어봤던 그런 일은 실재했다.
“음. 시계라···”
아무 생각 없이 검색을 이어나가다 곧 현타가···
“하아!”
어머니의 시계를 아직 찾아오지도 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줄 시계를 이렇게 열심히 찾는 모순적인 내 모습에 자괴감이 몰려온다.
‘내 시계는 팔아먹고 남의 시계를···’
그걸 처분하면서 언젠가 꼭 다시 찾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다. 급격히 기분이 다운된다.
‘어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빰빠빰- 빰. 빰빠빰- 빰.
“깜짝이야!”
운명이 울려 퍼졌다. 전화벨 소리를 내 마운드 등장곡인 운명으로 한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다시 바꿔야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발신자가 고 감독이다.
‘어이구! 어지간히 일찍도 연락하시네. 이 양반은 인터넷도 안 하고 사시나?’
내 경기를 보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자이언츠와 양키즈의 인터리그 경기는 상당히 빅카드였고 거기에 내 퍼펙트라는 임펙트도 곁들여졌었다. 어젯밤부터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섹션은 내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어제 좀 찾아보긴 했지. 인터뷰에 나오는 내 모습이 조금 궁금해서···’
한동안 인터넷을 끊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됐다. 그건 그렇고 이런 세상에서 이 양반은 왜 지금에야 연락을 하느냔 말이다.
이미 어젯밤에 알 만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근래 가장 가까이 있었다고 할 만한 유일한 사람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성질이 나서 확 안 받아버리려다 그래도 그간의 쌓인 정이 뭔지 안 받을 수가 없다.
“여보세요.”
“어! 그래. 별일 없고?”
정말 없던 정도 떨어지게 만들 말투다. 그동안 별일 많았다.
“뭐! 항상 그렇죠.”
“다른 일이 아니고 너 베그웰에게 시계 줘야 한다는 말 들어봤냐?”
이런 말 하는 걸 보니 퍼펙트 이야기를 알고 있긴 했었나 보다. 그런데 왜 말 한마디 안 하냐 말이다. 축하한다. 한마디만 하면 하는 사람은 스스로 격을 높이게 될 테고 듣는 나도 즐겁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모두가 행복할 일을 왜 안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휴! 생각할수록 더 뻗치네.’
“안 그래도 좀 찾아보고 있었어요.”
비상식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열 내봐야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된다.
“그거 안 찾아봐도 돼.”
‘응? 이게 무슨 말?’
그렇지 않아도 통장 잔고가 빡빡한데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에이전트에서 사줄 거예요?”
“사지는 않는데 시계는 줄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
‘사는 건 아닌데 준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고 감독이 그런 시계가 많아서 자기 거 하나 주겠다는 건가? 중고는 좀 그렇지 않나?’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범상치 않은 사고방식으로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는지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좀 자세하게 말 좀 해봐요. 육하원칙이라는 거 아시죠? 앞뒤 말 다 자르고 말씀을 하시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럴까? 내 수준보다는 듣는 사람에게 맞춰야겠지. 너 왜 퍼펙트게임 하면 포수에게 R사 시계를 주는지 아냐? 많고 많은 시계 브랜드 중에 왜 하필이면 그걸까?”
같은 말이라도 좀 더 부드러운 표현도 있다. 늘 이런 식이다.
“예? 그거야··· 최고 수훈 선수에게는 최고의 시계를···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 브랜드가 고급 시계의 대표적인 브랜드잖아요. 그런 전통이 내려와서···”
얼렁뚱땅 말을 갖다 붙였지만, 사실은 모른다. 시계인지 뭔지를 줘야 한다는 것도 긴가민가해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까.
“네가 한 퍼펙트게임이 24번째인 거 알지?”
“그거야···”
어제 들었다.
“퍼펙트게임 1호 기록은 1880년 리 리치먼드라는 투수가 세웠어. 그로부터 계산해서 네가 24번이 된 거야. 그런데 R사가 만들어진 건 1905년이고 그 브랜드를 사용한 건 1908년부터야. 뭐가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이상해요. 중간에 누가 그 회사 시계를 사주면서 그게 관례가 되었나 보죠.”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내가 좀 알아보니까 누구부터 그런 관행이 생겼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퍼펙트게임이 제일 오랫동안 없었던 건 1922년부터 56년까지 34년간이었고, 1968년부터 81년까지 13년간도 안 나왔지. 이쯤 되면 그런 전통이 있었더라도 단절되기 마련이거든.”
그럴듯하긴 한데 그렇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니 그런 정성으로 다음 게임 상대 타자 분석이라도 한 번 더 하는 게 내 장래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 회사 제품이 제일 고급품인 것도 아니잖아. 전에 들으니까 너도 무슨 콘스탄틴인가 하는 시계가 있었다면서. 그럼 잘 알겠네. 그 회사보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여럿 있다는 거···”
“하아! 그건 그렇죠.”
‘내가 그 시계 꼭 다시 찾고야 만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정말 왜 아픈 곳을 계속 찔러 대는지 모르겠다. 이젠 짜증이 난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지. 이건 마케팅이다. 밸런타인데이가 만들어진 것과 같은 일인 거야. 외력이 개입되어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거지. 그것으로 R사가 최고급의 이미지를 만든 거야.”
“그래서요. 적당히 하시죠. 괜히 튀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하고 살죠. 그런 복잡한 생각 하면 머리 아프지 않아요? 전 가끔 다수의 누군가에게 비난받던 때가 떠오르면 지금도 머리가 지근지근해요. 제발 이제 튀지 말고 살자고요.”
내가 좀 손해 봐도 괜찮다. 머리 아파질 일은 벌이기 싫다.
“야! 영수야! 너나 나나 언제 튀게 살았다고 그러는 거야? 그 일? 그게 너하고 나만 그러는 일이었니? 웬만한 대학에서 다 일어나는 일이었어. 내가 만든 일도 아니고 네가 만든 일도 아니잖아. 그냥 그 시스템에 순응했을 뿐이었다고. 내가 만일 그 시스템을 거부했다면 그 알량한 감독 자리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순응을 해도 삐끗하면 그 꼴 난다고. 넌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고 난 감옥 갈 뻔했지. 내가 잘한 건 없지만 그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다구.”
고 감독도 맺힌 게 좀 많았던 것 같다. 욱하는 바람에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좋아요. 지난 일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그건 그렇다고 하구요. 이제 뭘 어쩌자는 거예요?”
“음. 나도 갑자기 감정이 좀 격해져서··· 음. 그래서 내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관례를 우리가 따를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
“안 따르면 대안이 있어요?”
“R사의 라이벌인 O사가 있지. 회사의 역사, 전통. 기술력, 스토리 다 뒤질 것이 없는데 매출이 모자라는 그런 회사야. 너도 좀 들어봤지?”
들어봤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제 게임이 끝나고 나서 마일리가 그 회사에 연락을 취했고 오늘 오전에 마케팅 담당자를 만났지. 그 브랜드가 퍼펙트게임과 이름도 훨씬 더 잘 어울리잖아. 끝, 완성, 완벽이란 의미니까.”
‘히힛. 역시 마일리 씨가 일 잘하네. 협찬을 받아왔구나. 그래. 그런 관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새로운 관례를 내가 만들면 되지. 17년 만이라는데 아무려면 어떻겠어. 베그웰은 무던하니까 그 회사 제품도 좋아할 거야.’
1만 불이 땅 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R사 제품이면 최소 그 정도는 줘야 한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떨까.
“원래 R사의 광고 전략은 스포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1927년 영국 해협을 횡단한 여자 수영 선수부터 1953년 최초 에베레스트 등반가까지 마케팅에 이용했지. 근래에는 최고 골프 선수, 테니스 선수, 요트, 승마, 모터스포츠 가리지 않았어. 아마 퍼펙트게임도 그 영향권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지도 않을 R 브랜드는 이제 관심 밖이다. 받을 O사의 제품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뭘 받기로 했는데요.”
“일단 하이엔드 급 두 개하고 대중적인 제품으로 100개.”
“뭐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시계가 왜 100개씩이나 필요한지 이해가 안 된다.
‘O사 제품 중에 하이엔드가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리 저렴하다 해도 그 회사 제품이면 이삼천 불은 하지 않나? 그게 100개면··· 음.’
달란다고 그걸 그냥 준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단순한 협찬이 아닌 건가? 그럼 혹시···’
“일이 잘 풀렸어. 원래 그 회사의 스포츠 마케팅은 개별 선수가 아니라 올림픽 같은 대회를 후원하는 전략이었다는데 이번 여름에 신제품 출시 계획이 있었다는구나. 그걸 이번 퍼펙트와 엮어서···”
마일리는 생각보다 엄청난 여자였다. 퍼펙트게임이 일어난 지 이제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걸 엮어서 이런 스폰서십 계약을 만들어 내다니 대단하다.
“그 준다는 100개가 다른 선수들 나눠주라는 건가요?”
“그렇지. 선수들과 구단 직원들까지 다 나눠주면 될 거야. 조금 남으면 가지고 있다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또 나눠주고··· 그러라고 넉넉하게 주는 거야.”
그게 어떻게 광고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좋은 일이다.
‘흐흐흣. 역시 내가 인복은 있어서···’
조금 염려스러운 건 호사다마(好事多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서 튀면 구설에 오르기 딱 좋다. 한 번 더러운 꼴을 당했는데 그런 걸 또 당하고 싶지는 않다. 실체가 없는 대중과는 싸움 자체가 안 된다. 나만 바보가 될 뿐이다.
“선례도 없는 일을 벌이면 너무 주목받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별걱정을 다 하네. 선례가 있어. 그런 건 염려 안 해도 돼. 로이 할러데이가 퍼펙트 했을 때 포수뿐만 아니라 팀 전원에게 기념 시계를 선물했었대. 혹시 누가 뭐라 하면 그 연장 선상이라고 하면 되지. 사실 퍼펙트라는 게 너와 포수만 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니.”
역시 고 감독님은 영원한 나의 길잡이시다. 어쩌면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만 하시는지 모르겠다.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선지자··· 음. 영원한 스승? 이건 너무 오글거리나?’
완벽한 대사를 생각해 냈지만 차마 그걸 전화상으로 하기가 망설여진다.
“상반기 끝나고 올스타전 할 때쯤 행사를 가지기로 했어. 신제품 출시 행사하면서 2부 격으로 한다더라.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우리가 그 정도 협조는 해줘야 하지 않겠니?”
“그럼요. 당연히 해줘야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받게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는 좀 적어. 아직 네 인지도가 낮아서···”
고 감독은 0이 아주 많은 숫자 하나를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내 연봉보다 훨씬 많다니 이럴 수가···’
누구처럼 억억 하는 숫자는 아니었지만, MLB에서 아직 풋내기 선수인 내가 그런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액수였다.
“하핫.”
똑똑.
베그웰이 돌아온 것 같다.
“So. 몸은 좀 괜찮아?”
“흐흣. 베그웰 퍼펙트하고 나서 왜 특별한 브랜드 시계를 주는 줄 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