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50화 (50/200)

50화. 새로운 출발

내가 베그웰을 잘못 판단했다. 그는 침착했다. 첫 타자에게 우직하게 정면 승부하는 척 강공의 이미지를 심어 놓고 슬쩍 유인구 승부로 전환해 버렸다.

‘아무튼 곰 같은 여우라니까.’

오늘 여기까지의 결과가 만들어진 이유도 내가 잘 던진 것이 가장 크겠지만 다른 부분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공만 던질 수 있게 만들어준 베그웰의 탁월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건 수비적인 스킬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내게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핀치 히터는 기세 좋게 나와서 기세만 올리다 끝나버렸다. 헛스윙 세 번 하더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땅바닥으로 향한 네 번째 스윙으로 자기 배트를 쪼개 버렸다. 한 번에 저렇게 잘 쪼개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스킬인데 놀랍다.

‘쯧, 힘이 아깝다. 이 눔아.’

양키 스타디움이 아주 소란스러워졌다. 불만을 토로하며 화내는 관중부터 기대를 담은 눈빛을 한 사람들의 속삭임까지 각양각색의 소음이 귓전을 어지럽힌다.

다시 대타다.

‘감독이 문제인 거야 아니면 타격 코치가 돌머리인 건가?’

자꾸 좌타자를 내는데 내 기록이나 한번 찾아봤는지 의심스럽다. 일반적인 언더스로우 투수가 좌타자에게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맞지만, 난 불펜 투수였을 때도 좌우가 반대로 나타났었다. 난 언제나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긴 이제는 우타자 바깥쪽을 공략할 구종이 늘어나서 작년 통계는 무의미해졌지만···’

얼핏 눈에 들어온 우리 덕아웃 대부분의 선수들은 철제 난간을 뜯어 버릴 듯 움켜쥐고 뚫어져라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다. 관중들 역시 다시 숨을 죽였다. 나에겐 마지막이 되어야만 하는 타자다.

‘응? 인코스 슬라이더? 하! 오늘 역으로 가는 것 좋아하네.’

존의 바깥으로 빠지는 볼을 요구한다. 자칫 잘못 던지면 타자 몸에 맞을 수도 있다. 물론 나에게는 해당 사항 없다. 난 컨트롤 마스터니까.

‘뭐! 맞으면 맞는 거지, 노히트나 퍼펙트나 그게 그거야.’

짝-

‘헉!’

맞았다. 손잡이 쪽에 맞았는지 배트가 쪼개져 정면으로 날아온다. 아찔하다. 투구 후 오른쪽으로 몸이 쏠린 그대로 한 바퀴 굴러 피했다. 다행히 파편에 맞진 않았다.

‘에고, 놀래라. 아! 공은···’

억지로 몸을 돌려 1루를 찾았다.

1루수가 달려 나와 급하게 공을 잡고 바로 태그. 타자는 달리는 와중에 몸을 돌려 피한다. 한순간 겹쳐졌던 1루수와 타자 주자의 모습이 나눠졌다. 넘어진 채 바라본 1루 쪽의 광경이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타자 주자는 그대로 달려 1루를 통과했다.

‘뭐야? 태그가 안 된 건가? 이제는···’

1루심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아웃!”

드디어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맥이 탁 풀린다. 그대로 누워 버렸다. 이제 좀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다.

낮 경기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어둑어둑해졌다. 어느 사이엔가 그라운드 조명탑에 불이 들어와 있다. 하늘에는 시나트라 옹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양키 스타디움의 끝은 항상 그렇다.

Start spreading the news

(시작하지, 그 소식 뿌리면서···)

I'm leaving today

(오늘 난 떠나.)

I want to be a part of it New York, New York

(난 되고 싶거든, 뉴욕, 뉴욕의 그 일부가)

후렴 부분을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뉴욕, 뉴욕··· 어푸!”

어느 순간 굵은 물줄기가 얼굴을 덮었다. 내 감성이 이해 받기엔 야구판은 너무 삭막한 동네다.

“아! 알았다고··· 아! 쫌! 훗! 쿨럭.”

말하지 말아야겠다. 입에 물 들어온다.

이러다가 퍼펙트하고 마운드 옆에서 익사한 최초의 투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일어서다 누구의 품으로 당겨졌다. 머리엔 계속 물줄기가 쏟아지고 누군지 모를 외간 남정네들의 품을 정신없이 거쳤다. 등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지금도 계속 느껴지지만, 너무 많이 자극을 받아서 그런지 곧 무뎌졌다.

“아! 놔!”

한국어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겁나게 길었던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겨우 풀려났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하다.

‘다음번에는 선수들 오기 전에 튀어야겠네. 언제 이런 걸 겪어 봤어야 알지. 좋아해 주니 나도 좋기는 한데··· 이건 좀···’

투덜거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저쪽에서 웃고 있는 코칭 스탭들이 보였다.

‘맞다.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멋있게 걸어가서 포옹 같은 걸 하던데···’

내가 감독과 끌어안고 감격을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나도 무엇인가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방울을 흩날리며 그쪽으로 처벅처벅 걸어갔다.

감독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쩝! 이 상황이 포옹하기엔 적당하지는 않지.’

유니폼은 찢어져 군데군데 맨살이 보이고 물에 젖은 생쥐 꼴이다. 별로 모양새 나는 모습이 아니다.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Good job.”

“Thank you.”

‘역시 감독이야. 상황이 이런데도 대사 한마디로 팍 살리네.’

감독은 무게를 잡았지만, 코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 몰골에 구애받지 않고 뜨거운 포옹을··· 이 아저씨들 겁나게 부담스럽다.

‘야구판도 개혁이 되어야 해. 양성평등··· 에고!’

현역 은퇴한 지 꽤 된 사람들인데도 아직 힘이 넘친다. 껴안는데 숨이 막힌다.

짧지만 아주 길게 느껴졌던 순간이 지나고 드디어 양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로 진출했다.

“퍼펙트 게임. 축하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말로만 듣던 그라운드 인터뷰다. 역시 선발이 좋다. 불펜에선 아무리 잘해봐야 이런 기회를 얻기는 힘들다. E자로 시작되는 유명 스포츠 채널 로고가 박혀 있는 마이크가 내 가슴을 장식한다. 아저씨들 말고 이런 분위기가 필요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나와 딱 어울리는 찰랑이는 머리결하며 눈높이마저 비슷하네.’

“오늘 퍼펙트가 얼마 만의 기록인지 혹시 아시나요?”

“······”

MLB에서 스물 몇 번인가 있었다는 건 안다.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나왔던 기록인데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렸을 때 몇 번 본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한 사오 년쯤 되었나? 그건··· 음. 노히트 노런인가?’

몇 게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긴가민가하다.

“2012년 8월 매리너스의 에르난데스 선수가 레이스를 상대로 기록한 이후 처음입니다. 그해 역사상 최초로 같은 해에 세 번이나 퍼펙트게임이 나왔었죠. 그 뒤로는 없었습니다. 지금이 2029년. 2020년대도 다 끝나가는 지금 17년 만에 퍼펙트를 기록하신 겁니다.”

‘헉! 그렇게나 오래되었어?’

전혀 몰랐다. 간간이 나왔던 노히트 노런의 기억과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예. 그렇군요. 대단한 거였네요.”

무미건조하고 바보 같은 말이란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해야 상황에 적당한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악!”

‘또··· 맞아. 이런 것도 있었지.’

머리에 얼음 조각이 부딪치고 파란색 액체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다. 왜 이런 생각은 항상 일이 일어나고서야 나는지···

인터뷰어에게도 상당한 양이 튀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웃으며 프로 방송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자주 봐오던 일이라 그런 건가?’

보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당황함과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인터뷰를 하면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웃고 날 찬양한다.

‘이런데 어떻게 뽕이 안 차오를 수가 있겠냐구.’

차가운 음료수 샤워 정도는 다 웃고 넘길 수 있었다.

I want to wake up in a city That never sleeps

(난 깨어나고 싶어.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And find I’m a number one Top of the list

(그리고 발견하는 거야, 내가 넘버원인 걸)

King of the hill A number one

(첫 번째. 가장 성공한 사람)

These little town blues Are melting away

(작은 고향마을의 우울함은 눈 녹듯 사라질 거야)

I'm gonna make a brand new start of it

(난 완전히 새 출발 할 참이야)

In old New York

(오래된 뉴욕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1980년. New York New York.

양키 스타디움에서 난 다시 태어났다.

***

‘에구구, 아프면 안 되는데···’

4월 말의 뉴욕은 낮에는 괜찮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아직 쌀쌀했다. 어제저녁 젖은 옷을 입은 채 그라운드를 뛰어다니고 마지막에는 얼음 섞인 음료수까지 뒤집어썼다. 그래도 어제는 추운 줄 몰랐다. 잠도 잘 잤다. 일어나니 이 꼴이다.

아침부터 열도 오르고 전신이 욱신거린다. 컨디션이 엉망이다.

‘어제 흥분이 과했나 보네.’

바로 선수 관리를 맡은 구단 직원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뒤 투수 코치가 팀닥터와 함께 내 방으로 달려왔다.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네요. 단순한 몸살 같습니다. 약 먹고 좀 쉬면 나아질 겁니다. 저녁에 다시 한번 보지요. 그때까지 호전되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겠죠.”

희망을 주는 닥터의 말이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원래는 잘 안 아파요. 로테이션을 거를 정도는 아니에요. 닥터께서도 심각한 건 아니라고 하시니 덕아웃에 앉아 있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딴 놈이 내 순서에 끼는 건 눈 뜨고 못 본다.

내 말에 리우드 코치가 어이없는 듯 한숨을 내쉰다.

“걱정 말고 푹 쉬어. 자네 자리는 이제 안 날아가. 누구라도 제정신이라면 평균자책 1점대에 퍼펙트게임을 한 투수를 빼지는 않아. 오늘은 이 방에만 있게. 식사도 룸서비스를 이용해. 저녁에 다시 오지.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리우드 코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갔다. 팀닥터에게 알약 몇 개를 받았다.

‘음. 이 정도면 워크에씩에 대한 어필은 되었겠지? 이런 거? 군대에서 누구나 다 하는 거잖아. 안 해봤어?’

아침을 시켜 먹고 약도 먹고··· 한숨 푹 잘 잤다.

다시 눈을 떴는데 사방이 깜깜하다. 땀을 좀 흘린 듯 침대 시트가 축축했지만, 몸은 아주 가벼워졌다.

‘저녁에 온다더니··· 아직 경기가 안 끝났나?’

연락을 할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 베그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전화가 왔다.

“지금 가는 중이야. 곧 도착해. 몸은 좀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졌어. 오늘 게임은 이겼어?”

“아니, 도착하면 네 방에 들를게. 얼굴 보고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그래 알았어. 좀 이따 봐. 아! 코치에게 나 괜찮아졌다고 말 좀 전해 줘.”

진 게임 이야기를 길게 하기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곧···

‘어? 이거 베그웰에게 뭘 줘야 하는 거 아닌가? R로 시작하는···’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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