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49화 (49/200)

49화. 감 잡았어

“스트라익.”

네 경기 등판해서 30이닝을 던졌다. 3승 1패 ERA 1.20

‘8이닝 두 번, 7이닝 두 번이라··· 짝이 맞아서 좋긴 한데···’

어쩌면 4승을 할 수도 있었는데 패한 경기에서 홈런 두 개를 맞고 3실점을 해버렸다. 바로 전 경기였다. 7이닝을 던져서 3실점이면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추세라는 게 있다.

처음 두 경기에서 무실점을 하다 세 번째에서 경기 홈런 하나 맞고 1실점. 직전 경기에서는 홈런 두 개에 3실점을 했다. 이건 타자들이 내 피칭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번 경기에서 그 흐름을 끊어 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왔다.

‘앞의 두 게임은 밑밥 좀 뿌려 놓았던 거야. 오늘은 그걸 거두어야 할 때고.’

양키즈 원정 3연전 중 2차전.

타자들은 이제 내 공략의 해법이라도 찾은 양 풀스윙으로 컨택보다는 한 방을 노린다.

‘이건 불펜을 할 때도 겪어 봤다고. 이젠 그때와는 다르지. 선택 범위가 더 늘어났고 그리고···’

집요하게 아웃 코스를 노린다. 싱커와 슬라이더를 이용해 존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타자의 밸런스를 무너트리려 노력한다.

타악-

소리는 좋지만 이건 파울이다. 팔이 길어서 그런지 존에서 꽤 많이 흘러나가는 공도 배트에 맞추긴 한다.

‘위닝 샷(결정구)은 무엇으로 하지? 뭘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그래. 베그웰이···’

고 감독은 말했다. 베그웰의 실제 스윙이 다운 스윙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운 스윙을 하라고 말한 이유는 실전에서 그런 식의 스윙을 가져가라는 것이 아니라 과한 어퍼 스윙으로 오히려 타격 생산성이 떨어지는 베그웰의 스윙에 밸런스를 주기 위한 교정 차원이었다.

베그웰에게 말해준 것은 잘 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투수들에게 까다로운 타자가 되는 요령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다운 스윙을 염두에 두고 스윙을 하는 것과 진짜 다운 스윙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거라고?’

진짜 멍멍이 풀 뜯어 먹는 소리 같은 말이긴 하다.

고 감독이 베그웰에게 주문했던 건 타석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투수의 투구 수를 늘려라.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정타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공을 커트해 내라. 포수에게 높은 타율과 많은 홈런은 필요 없다. 집요하게 투수를 괴롭히는 타자가 되어라였다고 한다.

아직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베그웰은 잘해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타석당 5개 정도의 공을 투수로 하여금 자신에게 던지게 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수준이냐면 작년에 타석당 투수로 하여금 가장 많은 투구를 하게 한 타자가 4.71개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가끔 안타도 때려내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세이버메트릭스가 도입되면서 홈런의 가치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타자들의 스윙이 홈런을 만들어 내기 좋은 극단적인 어퍼 스윙으로 변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타자의 판단 기준은 컨택 능력보다 힘과 선구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정쩡한 스윙으로 땅볼을 굴리는 것보다는 확실한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는 것이 낫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 되었다.

삼진은 땅볼, 플라이 아웃과 같이 취급된다. 2000년대 이후 선수를 평가하는 새로운 지표인 WAR(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에서 타자의 삼진은 마이너스 요소가 아니다. 지금은 2루타 이상 장타의 가치가 상종가를 달리는 시기다.

당연히 코치들도 그에 맞춰 선수들을 지도한다. 코치에게는 선수의 평가가 곧 자신의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어퍼 스윙은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즉, 스윙만으로는 위치에너지를 활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배트 헤드를 돌려 힘을 모은다. 당연히 투구된 공에 대한 빠른 판단을 요구된다. 빠른 패스트볼에도 좋은 변화구에도 대처가 어려운 스윙 기술이다. 단, 하나 타격 시 타구의 궤적을 위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베그웰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꼭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는 투수에게 별것 아닌데 묘하게 거슬리는 타자가 되어 가고 있다.

‘몸에 맞는 옷이 따로 있었던 거지. 다행이네. 이제라도 그걸 찾아서···’

그날의 배팅에 대한 토론은 내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배트가 타격의 준비 자세 A 지점에서 공과 만나는 타격점 B까지 직선으로 갈 수는 없다. 스윙이 다운이든 레벨이든 어퍼든 그 어떤 무엇이고 간에 타격점에 도달하는 방법은 직선이 아닌 사이클로이드 곡선의 형태를 그릴 수밖에 없다.

‘공부 좀 했어.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원을 직선 위에서 굴렸을 때, 원 위의 한 정점이 그리는 자취를 말해. 다르게는 굴렁쇠 선이라고도 하지.’

어려운 용어다. 운동선수로 수포자였던 난 더 어려웠다.

‘배팅 밸런스란 그 곡선이 그려지는 과정일 거란 생각이 들더라구. 물론 모든 타자가 그려내는 곡선이 다르겠지만, 어느 타자나 최선의 곡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어?’

타자의 배트가 그리는 곡선을 나의 공으로 어긋나게 만들면···

틱-

이렇게 내야 땅볼이 된다.

위닝 샷이라고 특별한 공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구종의 다양화가 문제해결의 열쇠가 아니었다. 나의 가장 큰 무기는 커맨드였다. 대포로 참새를 잡을 수는 없다. 손에 엄청난 걸 쥐고도 그걸 사용할 줄 모르고 있었다.

‘타자 히트맵을 겁나게 봤다고··· 타자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코스 근처에 일반적이지 않은 변화가 있는 공을 던지면 대개는 이렇게 되더라구. 난 그런 공을 던지기에 최적화된 일반적이지 않은 언더스로우니까. 컨트롤 마스터인 내가 타격 밸런스 무너트리는 것쯤 별거 아니야.’

타자의 가장 강한 곳 근처에 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이용하는 제구가 가능한 피처(pitcher)다. 쓰로워(thrower)가 아니다.

본인에게 가장 최적화된 스윙을 비트는 짓을 대개의 타자는 하지 않는다. 타자는 그 밸런스를 만들기 위해 일 년 내내 땀을 흘린다. 스프링 트레이닝을 통해 최종적인 시즌용 밸런스를 맞췄는데 고작 한 타석 때문에 그것을 흩뜨리는 건 바보짓이다.

감의 영역이란 그런 미묘한 것 때문에 쉽게 깨지기도 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타자는 드물다. 맞든 안 맞든 기존의 스윙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타자의 마음과 내 공이 만나면 당연히 나와야 할 결과가 나온다.

5회까지 삼진은 2개밖에 없었지만 무수한 땅볼을 만들어 냈다.

‘안타, 홈런 맞을 수 있지. 그런 거 안 맞는 투수가 어디 있어. 그런데 쉽지는 않을 거야. 히힛.’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더니 이런 영감의 영역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딩 때부터 늘 치이기만 해서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100마일은 못 던지지만, 이제 그것이 부럽지 않다.

‘나도 감 잡았다고.’

오늘 경기에서 아직까지 안타를 하나도 안 맞았다.

***

“허헛. 이것 참!”

감독은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타선은 5회까지 6점을 뽑아냈고 투수는 아직 단타조차 하나도 맞지 않고 있다. 경기가 완전히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투수의 상태를 보면 오늘 경기가 뒤집힐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되는 날이군.”

“되는 날 맞겠죠.”

투수 코치도 따라 웃었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내가 보기엔 오늘 특별하게 공이 긁히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빗맞는 타구가 많은 거야?”

“글쎄요. 변화의 폭이 심해졌다면 삼진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상대 타선의 컨디션이 하강 곡선에 들어간 것일까요? 오늘 볼 배합이 좀 다르긴 해요.”

오늘은 벤치에서 볼 배합에 대해 특별히 지시한 적이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위기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는데 그냥 투포수에게 맡겨 두는 것이 정답이다.

“그게 나도 좀 이상하던 참이야.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공으로 정면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데 그걸 타자들이 정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잖아.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건 운의 영역이 아닌데··· 저게 베그웰이 주도한 볼 배합일까?”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건··· 이 게임 끝나고 제가 한번 물어보지요.”

감독은 이게 리우드 투수 코치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자기 울타리 안의 새끼 양들을 너무 챙기려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아집도 적고 균형 잡힌 사고방식을 가진 좋은 코치였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갑자기 어지러워지면 불펜 운용을 어떻게 할지 생각이나 해두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와 감독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

7회가 끝났다. 스스로 게임을 끝내려면 아웃 카운트 6개를 더 잡으면 된다.

스코어는 8대 0. 여덟 점 차이다. 이제 우리 타자들은 타격에 별로 의욕이 없어 보였다.

“야! 빌. 대충 치고 죽어. 공격이 너무 길어지면 투구 리듬이 망가진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

현재까지 투구 수는 82개.

“오늘은 90개 넘겨도 안 내릴 거죠?”

리우드 투수 코치가 순간 멈칫하더니 가볍게 웃는다.

“풋. 당연하지. 음··· 잘 던지라구. 음. 지금 농담한 거지?”

“하핫. 편안하게 계세요. 끝내고 오겠습니다.”

8회도 삼진 하나와 땅볼 두 개로 막아냈다. 땅볼을 친 타자는 미친 듯이 1루로 달리고 관중들의 탄식에 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9회 말,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관중도 선수도 야구장의 모두가 일어서 있다. 볼 하나에 함성과 탄식이 교차한다.

투 스트라이크로 첫 타자를 몰아세웠다.

‘업슛? 유인구가 아니고?’

베그웰이 오늘 거의 던지지 않았던 업슛을 요구한다. 이제까지 던져오던 패턴과는 다르지만 상관없다. 주저 없이 던졌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오늘따라 심판의 콜도 부드럽게 들린다.

“YES. So. YE······S."

우리 덕아웃이 소란스럽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투수들마저 나와 있다.

‘짜릿하네. 이 맛에 야구하는 건가?’

양키즈의 대타 출전이다. 생소한 얼굴이다. 데이터가 없다. 베그웰이 타임을 부르더니 마운드로 올라왔다.

“왜 왔냐?”

“그냥, 처음 보는 타자가 나와서 니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어.”

“쟤가 나를 상대하는 첫 타석이면 더 잘된 거잖아. 원래 첫 만남은 투수가 유리한 거라고. 밀어붙이면 못 쳐. 저쪽 벤치에서 뭔가 잘못 생각한 거야.”

“OK. 알았어.”

티를 안 내려 애쓰는 것 같지만, 베그웰은 이 상황에 쫄고 있는 것 같다.

‘나? 나야 즐겁지. 칠 테면 쳐 봐.’

“스트라익.”

좌타자의 아웃 코스로 싱커를 존에서 뺐다. 타자의 배트는 따라 나왔고.

‘X신 이런 상황에서 좋은 공이 가겠냐?’

난 확실히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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