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승리의 뒤
열에 들떠 하루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90구를 던졌어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누워도 웃음이 나고 일어서도 웃음이 났다. 90구 8이닝 5안타 무실점.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진다.
고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에서도 전화가 오는데 가까이 있는 이 양반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말도 안 했는데 바쁜 의사 양반이 어떻게 그 경기를 챙겨봤는지··· 태경이도 그렇고···’
“어! 웬일이냐?”
“무슨 말이 그래요? 고객이 공을 던졌으면 인스트럭터가 분석도 좀 해주고 그래야 할 것 아니에요. 게임도 안 봤겠네요.”
어이없는 말에 심통이 나서 나도 나가는 말이 저절로 삐딱하게 된다.
“아! 그거? 하이라이트로 봤지. MLB 홈페이지에 가니까 나오더구나. 잘 던졌어.”
“그것뿐이에요?”
정말 이 양반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너 왜 그러냐? 무슨 문제가 있어도 그걸 지금 고칠 수는 없잖아. 투구 밸런스는 괜찮아 보이고 그거 말고는 뭐 지금 볼 거나 있나?”
그건 그런데··· 이 양반에게 첫 승을 축하한다라든지 이런 말을 기대한 내가 멍청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요새 바빠. 마일리가 어디서 언더로 던지는 애를 하나 데려와서··· 폼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몸도 안 만들어졌고 해야 할 일이 많아. 애는 팔다리가 길쭉한 것이···”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싶더니 꽂힌 일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잘 알았고 일 열심히 하세요. 마일리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응. 너도 잘해라. 밸런스 이상해지면 이야기해 줄게.”
이 양반과의 통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이런 사람이 마일리는 어떻게 꼬드긴 거야? 아! 잊어버렸네. 베그웰 일을 물어본다는 걸 그만··· 잠도 안 오고 좀 이르지만, 그냥 나가야겠어.’
숙소에서는 눈이 말똥말똥해 별생각 없이 바로 나왔는데 정작 구장에 도착하고 나니까 좀 몽롱해진다.
어제는 완봉도 가능할 것 같은 페이스였다. 당연히 9회도 던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8회를 마치자 투수 코치가 투수 교체를 알렸다. 한계 투구 수가 90개로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미리 이야기를 하든지. 알았으면 그렇게 안 던졌지. 괜히 유인구를 남발해 가지고···’
아마 어떤 이유에선가 즉흥적으로 정해진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갔다. 날 보호하겠다는데 기뻐하면 기뻐해야지 나로서는 반대할 일이 아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회복 훈련을 하다가 러닝으로 땀을 좀 흘리고 나서야 정신이 좀 돌아온다. 짧은 거리 가벼운 캐치볼. 팔을 최대한 크게 움직여 사용한 모든 근육을 이완시킨다는 느낌으로 던진다.
보통 투수들은 거기까지 하는데 내 경우는 그 뒤 좀 길게 스트레칭을 겸해서 필라테스를 한다. 언더스로우 투수에게 부상은 어깨나 팔꿈치보다 무릎과 허리에 많다. 유연성을 잃지 않아야 롱런할 수 있다.
‘한 발 내디뎠을 뿐이야.’
누가 말했듯 내 한 발자국이 인류에게 엄청난 도약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내 선발 자리의 입지를 다지는 것에는 확실한 도움이 된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베그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전에 잠시 스치듯 보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기엔 서로 여유가 없었다.
“너 어제 어떻게 친 거냐?”
베그웰은 어제 안타를 하나 더 쳐냈다. 그가 한 경기에서 2안타를 치는 걸 어제 처음 봤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우연이 두 번 겹칠 가능성은 아주 적다.
“칠 수 있다고 했잖아.”
“하고 싶다는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른 거잖아. 네 타격이 뭐가 바뀌긴 한 거야?”
계속 궁금했던 걸 바로 물었다.
“그럼. 일단 어퍼 스윙이 다운 스윙으로 바뀌었지. 스윙부터가 다르잖아. 보면 몰라?”
해괴망측한 말이다. 나도 야구밥 먹은 지가 20년에 가깝다. 아무리 타격을 해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투수의 주임무가 타자를 상대하는 일이다. 타격도 알 만큼 안다는 이야기다.
“어디를 봐서 네 스윙이 다운컷이니?”
일반적으로 다운 스윙은 공의 윗면을 직선으로 때려내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스윙이다. 배트가 스윙의 준비 동작에서부터 히팅 포인트까지 대각선 방향 직선 궤적을 그린다. 그런 스윙에서는 오른쪽 어깨를 낮추면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래서 양쪽 어깨높이가 수평에 가깝다. 베그웰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그웰의 타격 폼이 예전에 비해 조금 달라진 건 맞다. 테이크 백(take back, 백스윙을 시작하는 동작)이 아주 간결해졌다. 그렇게 하면 힘을 모으기가 좀 어렵긴 하지만 베그웰이 원래 힘이 부족한 타자가 아니어서 그렇거니 했다. 아무래도 배트의 타격 전 움직임이 작아지면 정확도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보통은 패스트볼 대처를 위해 하는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쩝! 사람마다 신체 구조도 다르고 같은 상황을 다르게 느낄 수도 있는 거라서··· 그냥 개인차겠지.’
그런데 그것 이외에는 베그웰의 스윙 중 어디가 예전과 달라져서 본인이 다운 컷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베그웰의 스윙은 어퍼 스윙이다.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다운컷이 맞지.”
‘이건 웬 멍멍이 같은 소리야?’
깜빡 잊었다. 우리 테이블에 엘리엇 레브론이 같이 앉아 있었다. 베그웰과 같이 마이너에 있었다는데 누구와 다르게 삼 년 만에 마이너를 벗어나 자이언츠의 중견수를 꿰찼다. 자이언츠 팜 출신으로 FA 대박을 터트린 우리 팀의 대표적 타자이다.
‘이런 유능한 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들어볼까.’
“레브론 씨.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줄 수 있을까요? 투수인 저야 타격에 대해서 전문적이기 어렵잖아요. 투수 입장에서 타자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네요.”
“이봐. So. 베그웰과 Bro면 나하고도 Bro지. 그런데 무슨 레브론 씨야? 그냥 엘리엇이라고 해. 아니면 레브론이라고 그냥 부르든지. Mr. 이런 건 빼라고. 그 이야기 하는 건 어렵지 않아. Bro가 원한다면 해줘야지.”
이 아저씨 화끈하다. 역시 아메리칸 스타일이 좋다.
‘베그웰이 나보다 두 살 많고 그 베그웰보다 레브론이 한두 살 더 많지?’
이런 식이라면 시즌 끝날 때쯤엔 50세인 감독하고도 말 터야 할지 모르겠다.
“So. 알렉스 로드리게스, 알버트 푸홀스, 마이크 트라웃. 이 선수의 공통점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음. FA로 겁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
답이 아닐 것 같지만 이것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다.
“푸하하. 맞아. 그런 것도 있지. 그런데 그게 내가 원한 답은 아니었어. 이 선수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 스윙을 다운 스윙이라고 주장했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봤다.
“로드리게스는 점 A에서 점 B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하려면 배트가 직선으로 움직여야 한다며 자신은 그렇게 스윙한다고 했지. 푸홀스는 배트가 옆으로 돌아 나오면 공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배트 손잡이 부분을 내려찍듯이 스윙한다고···”
“트라웃은요?”
“트라웃은 다운 스윙에 대한 특별한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다운 스윙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그랬지.”
“그래요?”
특별히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닌데 대선수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막 든다.
‘에고고··· 정신 차리자.’
“지금 말씀하신 사람들 스윙을 생각해보면 아래로 찍어 치는 모습과는 차이가 있잖아요. 오히려 저는 그 사람들 스윙이 올려치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제가 뭘 잘못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 나도 똑같이 보여.”
“그런데 왜?”
“생각해봐. 스윙이란 게 둥근 배트로 원을 그리는 운동이야. 사람의 신체 구조상 직선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고. 그런데 네가 말하는 대로 찍어 치고 올려 치고를 어떻게 하겠어?”
“으응?”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듣고 보니 지금 레브론의 말에 모순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운 스윙은 방망이와 공이 만나는 임팩트 이전의 뒷스윙 이미지를 강조하는 거야. 뒷느낌이 짧으면 다운 스윙이지.”
한창 스윙 이야기에 열을 올리느라 다른 선수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걸 못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 느낌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느낌이 느낌이지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가 옆 테이블로 옮겨갔다.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어느 순간 대화를 나누던 우리가 새로 벌어진 열띤 토론을 멍하니 듣고만 있게 되었다. 정말 모두 야구 이야기엔 진심이다. 아마 어제의 승리로 선수들 분위기가 업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이제 겨우 다섯 경기 치렀지만, 3승 2패로 괜찮은 출발을 했다.
“레브론 씨. 아니, 레브론 아까 하던 말의 결론이 뭐예요?”
“아! 그거? 다운이니 어퍼 스윙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타격하다가 중심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쓰잖아. 대개 공에 대한 예측이 잘못되어서 완전히 타이밍이 빗나갔을 때 억지로 공을 따라가다가 그런 일이 생기지.”
“그렇죠.”
보통 그런 경우는 축이 되는 뒷다리가 먼저 굽어진다.
“그럴 경우엔 자연스럽게 어퍼 스윙이 될 수밖에 없잖아. 뒤에 놓인 다리가 먼저 굽어지면 자세가 낮아지게 되니까 스윙이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지. 난 보통 그럴 땐 굳이 축을 세우려고 하지 않고 그냥 팔만으로 공을 민다는 기분으로 컨택을 해. 그럴 때 올려치고 내려치고 구분이 되겠어?”
그럴듯하다. 스윙의 형식적인 구분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Go가 그랬어.”
그동안 듣고만 있던 베그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퍼 스윙이든 다운 스윙이든 방망이와 공이 맞는 면적이 넓어야 힘을 받고, 맞는 순간이 길어야 한다. 공의 반발력은 맞는 시간과 맞는 면적에 비례한다. 이건 기본적인 물리 법칙이라고.”
“그래서?”
솔직히 그게 맞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올려 치고 있었거든. 타율이 떨어지는 걸 홈런 숫자로 만회해 보려고. 그런데 Go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야. 변화구를 잘 못 치는 건 보통 타자들이 다 그렇다고. 내가 변화구 컨택이 되는 것만 투수들에게 인식을 시키면 패스트볼 승부를 해 올 거라고.”
고 감독다운 잔머리다.
‘그럼 어제는 인플레이 된 공이 운이 좋아서 안타가 된 건가? 그럴 리가. 그런 운이 두 번씩이나 작용해?’
“그래서 선구안이 중요하다고. 포수 할 때처럼 공을 최대한 지켜보라고 했어. 대개 타격 목표가 커브니까 정타가 안 되어도 괜찮으니 맞춘다고만 생각하라고··· 그럼 맞출 수는 있대. 특급 투수에게는 안 통해도 그런 투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테이크 백 동작을 최대한 줄여서 공을 건드린다. 꼭 안타가 되지 않더라도 투수는 그런 일이 반복되면 찝찝해지기 마련이다. 그 말이 맞긴 하다. 아주 간단한 일인데 그동안 왜 그렇게 안 했는지 모르겠다.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베그웰은 실적을 만들어 냈다. 이 동네에서는 그거면 된다.
‘나머지는 고 감독에게 물어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