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기고 싶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기온은 그렇게 높지 않은데 습도가 높아서 끈적끈적한 느낌이 등으로부터 번져 나온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자! 가자.’
그라운드가 너무 낯설다. 불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때면 그때는 관중들이 내뿜는 열기로 충분히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데워져 있었다. 때로는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몰두와 방관 그 사이 어디쯤 분위기가 머물러 있었다.
와! 짝··· 짝··· 짝···
왠지 무성의하게 느껴지는 함성과 띄엄띄엄 끊어질 듯 이어져 나오는 박수 소리. 많이 낯설다.
‘정말 시범 경기도 관중 꽉 채워서 하든지. 적응이 안 되네. 기분이 너무 이상해.’
선발로 공식 경기에 등판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것 같다.
‘그것도 이렇게 관중석이 꽉 들어찬 경기가 얼마 만인지··· 있긴 있었나?’
오늘의 상대 다저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자이언츠와 다저스 두 팀의 라이벌 관계는 백 년이 넘어간다. 창단 연도가 1883년과 1884년이다. 뉴욕의 맨해튼을 연고지로 한 자이언츠와 브루클린을 근거지로 한 다저스로 출발···
‘그렇지는 않지. 자이언츠가 아니었어. 원래는 고담스라고 하더라구. 배트맨에 나오는 그 고담 맞아. 뉴욕의 별명이래나 뭐래나. 다저스는 이름을 겁나게 많이 바꿨어. 한 열 번 가까이 될 거야. 창단할 때는 브루클린 애틀란틱스였다는군,’
1957년 두 구단 모두 서부로 연고지를 옮겨 서부 지역 최대 위아래 도시를 오고 가며 지역 라이벌 관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흠. 양키즈와 레드삭스에 버금가는 최고의 라이벌리 경기에 출전하면서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연습구를 몇 개 던지는데 대기 타석에 선 다저스 1번 타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 기록이 어떻게···’
쿵쾅거리는 요란한 랩과 함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 참! 나 긴장한 거야? 어제 그렇게 타자들에 대한 전력 분석팀 리포트를 봐 놓고서··· 뭐! 할 수 없지. 베그웰이 알아서 하겠지.’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포수의 사인만 보고 던졌다. 고개를 젓지도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이 던지고 던지다 보니 1회가 끝났다.
“물 좀 마셔라. 1회부터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덕아웃으로 들어와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베그웰이 물병을 하나 건네준다.
“어··· 어. 고마워.”
‘어떻게 던진 거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스코어보드를 찾았다. 얼핏 1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섬뜩하다.
‘안타를 하나 맞았나 보네. 실점을 안 해서 다행이야. 어휴! 정신 차리자. 뭘 이 정도로 쫄고 그러냐.’
***
[타자 헛스윙. 뜁니다. 1루 주자가 뛰었습니다. 아! 포수 2루로 던지지 않습니다. 1사 2루의 득점 찬스입니다. 다저스 1회부터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득점권)에 가져다 놓습니다.]
[베그웰이 잘 판단했어요. 주자가 완벽한 타이밍에 뛰었습니다. 오른손 언더스로우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이미 늦었는데 무리한 송구를 해야 할 필요가 없죠, 주자의 깔끔한 플레이가 돋보였습니다.]
[좌전 안타에 이은 도루. 캐빈 럭스. 1회부터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이는군요. 막강한 다저스 타선의 핵심 3번 에디 레오날드를 상대하게 된 So. 초반부터 위기를 맞습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풀타임 네 시즌째를 맞이한 레오날드에게 다저스가 조기에 장기 계약을 제시할까요?]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죠. 레오날드 선수가 작년 그야말로 대폭발을 하지 않았습니까? 2할 9푼 대의 타율에 35개의 홈런을 기록했죠. 게다가 내야수입니다. 중심 타선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는 다저스에게는 꼭 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선수죠.]
[말씀드리는 순간 타자 초구를 그냥 보냅니다. 노볼 원 스트라이크. 구속은 82마일이었습니다. 이번 공은 싱커였나요?]
[So 투수의 저 싱커는 굉장히 특이한 구질이에요. 그립을 일반적인 포심 패스트 볼처럼 잡고 던지는데 구속과 각을 다양하게 조절하죠. 커맨드도 굉장히 좋고 그런 점 때문에 단순한 느린 공이 아닌 타자들에게 공략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공이 되죠.]
[시범 경기에서 거의 언터처블의 피칭을 보여줬던 So. 초반 위기를 잘 넘겨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 타자 헛스윙. 아! 3루. 2루 주자 다시 뜁니다. 포수 송구··· 아! 아웃입니다. 포수 베그웰 빠른 송구로 도루를 시도한 주자를 3루에서 잡아냈습니다.]
[수준급의 송구였어요. 투수의 어려움을 포수가 풀어냈네요.]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 들어 영입된 두 선수가 합작해 주자를 잡아냅니다.]
[So는 몰라도 베그웰은 그렇게 잘라 말하긴 좀 곤란한 선수죠.]
[왜 그렇죠?]
[그는 원래 자이언츠가 201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선택한 선수였어요. 상당한 기대주였습니다. 계약금을 4백만 불이나 받았을 만큼.]
[그렇습니까? 그런 선수가 왜 트윈스에 있었던 거죠? 아!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듣겠습니다. 노볼 투 스트라이크. So의 삼구. 헛스윙 삼진입니다. 삼구삼진 깔끔합니다. 마치 솟아오르는 듯 보이는 궤적의 볼로 레오날드를 돌려세웁니다. 1회 초 다저스의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납니다. So 잘 막아냈습니다. Go 자이언츠. 광고 듣고 다시 오겠습니다.]
“So가 잘 던지기는 하는데 아슬아슬해서··· 시범 경기 때도 그랬지만 저 느린 볼로 타자를 윽박지르듯 피칭을 해버리네요.”
샌프란시스코 지역 방송 라디오 중계를 맡은 그래엄이 헤드폰을 벗고 어깨를 천천히 돌리며 해설자 데이빗에게 말을 건넸다. 중계 부스 안은 시원했지만 1회부터 마이크를 지나치게 꽉 쥐었는지 어깨가 뻐근했다.
“보기보다 안정적이란 걸 시범 경기 때 쭉 봤잖아. 작년 기록을 봐도 그렇고 난타당할 유형이 아니야. 홈런 아니면 점수 내기 어려운 투수야.”
“그 이야기는 뭐예요? 베그웰이 원래 우리 선수였어요? 난 왜 몰랐지?”
“그거야 10년 전 드래프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자네도 그때는 일하기 전이었을 거잖아.”
10년 전이면 그래엄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이 일 하고부터는 자이언츠 전 선수 리스트 뽑아 놓고 정기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기억이 없는지 모르겠네요. 마이너 선수들도 승격권의 선수는 대개 다 훑어 봤고···”
“베그웰은 자이언츠에서 콜업되었던 적이 없고 아니, 승격 가능 근처에 가지도 못했지. 자이언츠에서는 커리어의 전부를 싱글A에서 보냈어. 거기 한 오 년 이상 있었을 거야. 예전부터 수비는 그런대로 잘했는데 브레이킹 볼에 대해서 약점이 너무 뚜렷했어.”
“그렇군요.”
“참다 참다 트레이드시켰는데 트윈스에서 운이 풀려 어떻게 메이저에 콜업이 되었지. 타격 약점은 지금도 여전해. 아마 So의 전담 포수로 쓰려고 같이 데려온 것 같은데··· 저런 유형의 투수에게 기존 포수가 바로 적응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프레디 그놈이 문제야.”
데이빗의 포수를 보는 기준은 버터스 포지가 스탠다드였다. 누굴 데려와야 거기에 맞출 수 있을까 하고 그래엄은 내심 중얼거렸다.
***
3안타를 맞았지만 모두 단타였다. 5회까지 삼진은 여섯 개. 순조롭다. 우리 타자들이 오늘은 그런대로 쳐내고 있다. 2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기기에는 충분한 점수다.
5회 말 현재 2사 2루. 베그웰의 두 번째 타석이다. 첫 타석은 열심히 커브와 슬라이더를 지켜보다가 5구 만에 루킹 삼진(strikeout looking). 이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다 안타깝다.
‘투수 놈이 지독해. 패스트볼 하나를 안 던져주네. 하긴 나도 상대 타자가 브레이킹 볼에 대한 타율이 그 모양이면 그렇게 던질 거지만···’
베그웰의 브레이킹 볼에 대한 빅리그 통산 타율은 1할이 안 된다.
‘7푼 5리인가 그렇지.’
그것은 운 아니면 안타를 칠 수 없다는 뜻이다. 통산 타율이 1할 8푼 정도 되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패스트볼은 꽤 잘 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럼 뭐 하냐고. 님을 봐야 별을 따지. 투수들이 패스트볼은 완전히 빠지는 볼 아니면 안 던지는데···’
지금도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볼카운트가 몰렸다. 다음 던질 공은 나도 알겠다. 커브다. 존에 걸치든지 더 떨어뜨리든지 둘 중 하나다. 항상 그 레퍼토리에 당해왔다. 나도 답답한데 본인은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에고, 차마 못 보겠네. 나갈 준비나···’
타악-
숙여졌던 고개가 저절로 휙 돌아갔다.
‘뭐야? 쳤어? 소리가···’
2루 주자가 미친 듯이 달려 3루 베이스를 돌아 이윽고 홈플레이트까지 밟았다. 베그웰은 1루에 멈췄다.
‘미친··· 베그웰이 타점을 올렸어? 하핫. 살다가 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 다저스 투수 놈이 완전 미쳤어. 그 상황에서 패스트볼을 던져?’
“야! 나이스 배팅. 푸하하. 베그웰이 커브를 쳤어.”
‘이게 무슨 말이야? ’
오늘 중견수로 출전한 엘리엇 레브론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농구 했으면 겁나게 잘했을 이름이지만 야구도 아주 잘한다. 베그웰과 한동안 싱글A 생활을 같이 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처지는 많이 달라져 있지만.
‘커브를 쳐? 배트에 우연히 맞은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소리가 너무···’
‘아! 일단···’
벌떡 일어나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와서 맞았든 의도적으로 쳐 냈든 이 동네는 과정을 평가하는 곳이 아니다. 무조건 결과만 본다. 어쨌든 지금 베그웰이 해냈다. 우연일지라도 축하할 일이다.
베그웰이 1루에서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한다.
‘저놈이 안 하던 짓을··· 에구, 안타만 칠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어떻겠니. 니 맘대로 하세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생각지도 않던 9번 타자의 분발에 자극받았는지 다음 타자에게서 홈런이 터졌다.
‘히힛. 다섯 점. 다저스 5선발 별거 없네.’
첫 승이 보인다.
일어서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홈런 타자와 주자를 마중 나갔다. 선수들의 알아듣지 못할 고함과 몸짓으로 덕아웃이 터져 나갈 듯 떠들썩해졌다.
“야! 잘했어.”
하이파이브를 하고 충동적으로 베그웰을 껴안았다.
“내가 칠 수 있다고 했잖아!”
베그웰도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좀 오버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그래도 괜찮을 때다. 괜한 입바른 소리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점수 차가 생기면서 마운드에서 아주 많이 편안해졌다. 난 선발 투수가 승리를 견인하는 위치라고 생각한다. 투수가 9이닝 동안 1점만 줘도 팀이 질 수 있고 10점을 줘도 팀이 이길 수 있는 게 야구다.
욕심을 버렸다.
‘무실점 그런 것 필요 없다고. 이기면 돼.’
마음이 급해진 다저스 타자들의 심리를 이용해 유인구 승부를 늘여갔다. 이건 이기고 있는 팀의 투수가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오늘은 무조건 이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