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시즌 개막
시범 경기 5게임 출장 총 20이닝을 던져 1실점 평균자책 0.45를 기록했다. 그런데 전적이 0승 1패다.
‘나 참! 지랄 맞은 게임이었어.’
마지막 시범 경기에서 우리 팀은 1대 0으로 져버렸다. 상대 팀 에이스가 마지막 점검을 위해 나와 5이닝을 던져 무실점으로 막았고 이날따라 파드레스 불펜도 철벽이었다. 우리 팀 타선은 그날따라 유난히 흐느적거렸다.
6이닝을 맡긴다더니 5와 2/3이닝이 지나자 교체되어 버렸다. 딱 18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왔다.
‘그 1실점이 영 찝찝하네. 거기서 홈런을 맞아 가지고··· 할 만큼 했잖아. 이래도 안 되면 할 수 없지.’
이 정도면 준수했고 커트라인은 넘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감독에게서 아직 아무 반응이 없다. 그 게임이 끝난 지 이틀 지났고 시즌 개막이 코앞인데 아직 별다른 말이 없어 답답하다.
그동안 통상적으로 해오던 선발조의 훈련을 그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존스란 놈도 아직 여기 참여하고 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판단이 안 선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입맛이 없다.
“So. 안드레가 온대···”
베그웰이 뒤늦게 식당에 나타나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뭐? 그 사람이 여기 왜··· 설마 우리 팀에서 그를 잡은 거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샤워 끝내고 락커에 들러서 메시지 확인을 했는데 안드레에게 연락이 와 있더라구. 우리와 계약할 것 같은데 여기 어떠냐고 물어보더라.”
좀 의외이긴 하다.
“너 안드레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어? 그렇게 친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서로 특별히 싫어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연락이야 주고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무튼 오지랖 하나는 넓다. 베그웰은 이적 후에도 예전에 있었던 팀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너 선발 확정된 것 같네.”
베그웰의 말에 뭔가 확 와 닿는 게 있다.
“음.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널 불펜으로 쓸 거 같으면 그 비싼 FA를 이 시점에서 왜 영입하겠어.”
갑자기 맹렬히 식욕이 솟아오른다.
“뭐 해! 밥 먹자. 아! 배고파. 식당에선 밥을 먹어야지.”
가득 차려진 뷔페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아주 향기롭다.
베그웰의 말대로 이틀 뒤 진짜로 안드레가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날 개막에 앞서 발표된 선발 로테이션에 내 이름이 들어있었다.
2029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원정 파드리스와 4연전이다. 이번 시리즈에 내 출장은 없다. 이 상황이 너무 만족스럽다.
‘첫 홈경기 선발도 아주 괜찮지. 드디어 전국권 중계에 내 얼굴이 나오겠네. 흐흣. 상대도 다저스면··· 드디어 내 시대가 열리는 건가? 크크큭.’
“응?”
얼굴에 갑자기 차가운 느낌이 확 난다. 베그웰이 내 얼굴에 댔던 생수병을 건네준다.
“뭘 그렇게 혼자서 음흉하게 웃고 있냐? 사람 오는 것도 모를 정도면···”
“흠. 음흉은 무슨··· 시즌 개막에 기분이 좋아서 그렇지.”
“아니던데··· 음모를 꾸미는 악당 같은 얼굴을 하고선···”
“내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동성은 사절이야. 각자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내 취향은 확고해. 우리 선발 공이나 보러 가볼까? 어? 너 지금 왜 여기 있어? 불펜에서 공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말을 돌리다 보니 좀 이상하다. 우리 팀은 보통 백업 포수가 선발 투수의 워밍업을 도와준다.
“아니, 오늘은 프레디가 직접 하고 싶다네. 첫 경기라 그런지 본인도 워밍업이 필요한가 봐.”
“그 아저씨는 왜 이랬다저랬다 그러는 거야. 평소에 하지도 않던 걸 하고···”
“그거야 본인 마음이지.”
베그웰은 이럴 때 보면 투쟁심이 부족한 듯 느껴진다.
“넌 타격에 감 잡았다는 건 말뿐이었던 거야? 시범경기 때 보니까 별로 달라진 게 없던데···”
딱 2할 4푼대 정도에 홈런 10개만 때리면 주전 포수인 프레디 그 노친네를 제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양반도 이제 나이 들어 한창때가 아니다.
“시범 경기 때 몇 타석이나 나갔다고 그러냐. 너 등판 때만 출전해서 보통 한 타석이었는데··· 공을 좀 신중하게 보느라 기록이 그랬던 거야. 내 타격 문제의 해결은 폼의 수정도 필요하지만, 선구 문제가 크다고 고가 그랬어.”
‘하아! 믿을 사람 말을 믿어라. 그 아저씨 고딩 때 이후로 타격은 해보지도 않았을 거야. 아니지. 고딩 때도 거의 안 했을 텐데··· 어휴! 이걸 뭐라고 말도 못 해주겠고.’
꼭 본인이 잘해야만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라지만, 정말 이럴 때 보면 이놈도 꽉 막힌 놈이다. 도대체 이 녀석에게 고 감독이 어떻게 말을 했길래 이런 맹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니 새로운 타격 실력은 언제쯤 나오는 건데?”
“그거야 니가 등판해서 오래 던져줘야지. 그렇게 몇 타석씩 연달아 나서다 보면 어느 순간 궤도에 들어선다고.”
이 말도 출처가 고 감독일 것 같다.
‘아! 몰라. 내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
베그웰을 이번 시즌 전담 포수로 쓰는 건 이미 허락된 일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지는 않을 거다. 길어야 한두 시즌이다. 그 사이에 베그웰이 무엇인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프레디 아저씨의 하락세가 확연해지면 구단은 어디서 그럴듯한 FA 포수를 영입해 올 것이 틀림없다. 그게 빅마켓 팀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더는 어쩔 수 없다. 그 전에 베그웰은 프레디를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1회 초 우리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났다. 상대 투수도 파드리스의 1선발이다. 만만할 리 없다.
“네가 보기에 오늘 소르카의 공은 어때?”
우리 1선발의 연습 투구를 보면서 베그웰에게 의견을 물었다.
앨런 소르카. 지난 시즌 ERA 2.81 총 192이닝을 던져 14승 6패를 한 우리 팀의 에이스다. 2027시즌이 끝나고 FA가 되었는데 7년 2억 1,000만 불로 영입했다. 연평균 3,000만 불을 받는 귀하신 몸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깜짝이야. 이놈은 놀던 데서나 놀지 왜 자꾸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지···’
로저스다. 저쪽에서 자이언츠 팜 출신들이랑 앉아 있었는데 여긴 왜 왔는지 모르겠다.
‘베그웰도 얘랑은 같은 시기 같은 팀에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그냥, 오늘 소르카 씨의 컨디션에 대한 잡담 정도야.”
가볍게 둘러댔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도 했고.
“저 아저씨야 언제나 베스트지. 그런 이야기는 다 쓸데없어. 내가 저렇게만 던질 수 있으면··· 저번 시즌 사이영 위너는 소르카 씨였어야 했는데···”
소르카는 지난 시즌 사이영 상 3위였다. 그건 그렇고 은근히 기분이 언짢다.
“야! 넌 누구는 소르카 씨고 난 그냥 So야? 내가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그렇잖아. 나한테도 Mr.라든지 하는 경칭을 붙여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핫. 그게 거북해? 소르카 씨는 나보다 야구를 잘하고 So는 아직이잖아. So가 사이영 위너쯤 되면 내가 생각해볼게.”
이거 아주 괘씸한 놈이다.
‘뭐! 내가 자기보다 야구를 못해서 So라 부르는 거라고?’
“그건 그래. So가 잘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 선발로서 실적은 없지. 지금 소르카 씨와 비교하는 건 공평하지 않은 것 같군.”
베그웰의 말은 편드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멕이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지금 그 말이 내가 로저스보다는 잘할 가능성이 있지만 소르카보다는 무조건 못할 거라는 뜻이야?”
“합리적 의견이네. 지금 So의 비교 대상이 나는 아니지. So 나이를 생각해보라고. 작년 사이영 위너가 So랑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내가 몇 년 더 지나면 사이영 상을 받을지도 모르지.”
로저스의 얄밉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아! 나이 들면 서럽다고 하더니··· 이런 거였어?’
“야! 로저스. 내가 사이영 상을 못 받을 것 같아? 나도 좀 늦었지만, 올해 풀타임이야. 작년에 신인상은 좀 아쉽게 되었어도 사이영 상 수상이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라고.”
이제 덮어놓고 기죽고 그러지는 않는다. 난 달라졌다. 새로운 나로 태어난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좋아. 사이영 상 위너는 기자들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3위까지는 인정해 주지. 그 안에 들어. 그럼 내가 Mr. So라고 정중하게 부를께. 어때?”
뭔가 다음 말이 궁금해진다. 함정이라는 것이 뻔히 보인다.
“그럼, 반대의 경우 난 뭘 해야 하는 거야?”
“글쎄, 뭐가 좋을까? 이런 건 어때? 3위 안에 못 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좋은 한국 식당에서 밥을 사면 돼. 팀원 모두에게. 그리고 내가 사이영 상 3위 안에 들면 나에게 Mr. 붙여서 불러야 해. 흐흣. 너무 무리한 이야기인가?”
“당연히 코치도 포함이겠지? 난 한국 갈비가 맛있더라구.”
‘헐! 누구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리우드 투수코치가 웃고 있다.
“콜이지. 정중한 표현 미리 연습 많이 해 둬라. 정작 해야 할 때 못하면 곤란하잖아.”
물러설 곳이 없어졌는데 기까지 죽을 순 없다. 그리고 진짜 못하란 법도 없지 않나.
‘기본 15승에 방어율은 한 2점대 중후반 180이닝 이상은 던져줘야 하고··· 조금 어려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해낼 수 있어. 팀 전원이 밥 먹으려면 일 인당··· 이런 계산을 왜 하지? 어차피 이길 텐데···’
“히힛. 행운을 빌어. 잘 해보라고.”
로저스가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크큿. 아무래도 니가 당한 것 같은데···”
베그웰이 야릇하게 웃는다.
“너도 날 못 믿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아니 네 능력이야 믿지. 그런 게 아니고 니가 뭘 약속했는지 잘 생각해 봐.”
“뭐?”
베그웰의 말에 의하면 2013년 키스 로(Keith Law)라는 사람이 ESPN에 기고한 글에서 25세 이하 유망주 25인을 선정했었는데 그 예측의 정확도가 10위 안쪽에는 망한 선수가 없고 불의의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선수 두 명을 제외하고는 최소 올스타 1, 2회 정도는 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리스트를 2021년에 다시 만들었어. 이번에 야구 전문 패널 다섯 명이 선정했지. 그 리스트의 특징은 25명 중에 투수가 두 명밖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흣. 누굴까?”
베그웰의 눈이 우리 선발 투수를 향하고 있었다.
“소르카?”
“맞아.”
갑자기 느낌이 쎄하다.
“2028년 그러니까 작년 연말에 그 리스트가 다시 나왔어. 거기 투수 유망주로 누가 들어갔을 것 같아?”
“설마··· 로저스?”
“알고 있었어? 히힛. 찍은 거지? 로저스는 아마 잘 안 망할 거야. 그 리스트의 신뢰성을 생각한다면 사이영 3위 정도는 언젠가 해내지 않을까?”
아! 몰랑. 어느 동네나 야구판에서는 야구 잘하는 놈이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