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애피타이저
“너무한 거 아니야? 라이브 피칭에서 그렇게 던지면 어떻게 해.”
로저스다. 내가 투구하는 걸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경계? 단순한 여흥? 아님 내가 그냥··· 헉! 그건 아니겠지. 암. 그럴 리가···’
먼저 던졌던 투수들은 거의 다 락커로 들어갔다. 이 녀석의 목적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선발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을 처지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어쩌긴 뭘··· 타자들이 진심으로 나오는데 나도 진심으로 던져야 맞는 거잖아. 나같이 느린 볼 투수는 삐끗하면 홈런이라구.”
여유 있는 피칭을 하기엔 내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쟤들 얼굴 좀 봐.”
나에게 삼진 세례를 받은 타자들 얼굴이야 안 봐도 뻔하다. 걔들도 나름 사연 있는 애들일 텐데 불쌍한 애들 보고 자긍심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괜히 불필요하게 미안한 감정이 들면 서로 곤란한 일이다.
“보긴 뭘 봐. 나 먼저 들어간다.”
베그웰이 공 받아주느라 없으니까 느물느물한 스타일의 이런 녀석이랑 말을 섞어야 한다. 왠지 고 감독이 연상 된다. 대화를 나눌수록 무엇인가 말리는 느낌이다. 서둘러 말을 잘랐다.
“So 같이 가자고.”
진드기가 하나 붙은 것 같다.
라이브 피칭 이후 경쟁자들은 물론이고 타자들에게 따돌림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데 맞은 당사자가 좋은 마음일 리 없다.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다고 해도 한 쪽이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버리면 약자를 응원하는 심리가 생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스프링 캠프의 분위기는 달랐다.
“Hi. So.”
그동안 곁눈으로 쳐다보던 선수들까지 아침 훈련에 나가면 반갑게까지는 아니어도 성의 있게 인사한다.
‘인정받은 건가?’
분위기가 오묘하다. 이곳은 실력이 곧 존중으로 이어지는 세상이었다. 그동안 본 척 만 척하던 투수 코치마저 내가 연습 투구할 때마다 들러 주의 깊게 바라보곤 했다.
라이브 피칭이 그 뒤로도 한 번 더 있었는데 내 차례가 되자 타자들이 서로 하겠다고 몰렸었다. 새로운 변화구의 유형을 보고 싶다나 어쩐다나··· 나로서는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라이브 피칭에 이어 연습 게임을 두 차례 치르고 나자 시범 경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연습 게임에 한 번 등판해 두 이닝을 던지긴 했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불펜일 때와 별다른 차이를 못 느꼈다.
시범 경기가 열리기 전날 마이너리그행을 통보받은 선수들이 나왔다. 마음이 영 찜찜하다. 지금 마이너행을 통보받으면 멀리 가지 않는다. 우리가 운동하는 펜스 너머 또 하나의 그라운드가 있다. 그곳에 150명 정도의 마이너 선수들이 모여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빨리 나가자.”
베그웰이다. 아침부터 빈 락커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상에 잠겼던 것 같다.
“작년 생각··· 음. 아니야. 그저···”
“마이너로 내려간 애들 때문에 그래? 얼마 오래 있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괴로웠어?”
베그웰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했다.
“너도 마이너 스프링 캠프에 있어 봤을 거잖아. 여기 있다 거기 가면 어떻겠어. 어쩌면 넌 그런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경계를 넘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식사부터··· 내가 겪어 본 그곳은 혼란의 아수라장이었다. A, AA, AAA 가리지 않고 섞여서 무작정 운동을 한다. 나에겐 혼란스러움 그 이상은 없었다.
어쩌면 작년 스프링 캠프에 초청되지 않아서 멘탈 관리에 도움이 되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상황에 빠졌다면 그 패배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작년에 좀 봤지. 메이저 캠프에 있다가 마이너 캠프로 넘어온 애들··· 작년엔 현실이었는데 올해는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조금 마음이 그러네.”
“쩝! 그렇다고 니가 내려갈 수는 없잖아. 그렇거니 해야지. 난 생각 좀 많이 하면 밤에 잠이 안 오더라구. 흘려. 동양에 그런 말 있잖아. 물 흐르듯이 어쩌구 하는 거···”
일 년 만에 작년의 생쥐가 고양이로 종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그 변화를 따라갈 만큼 단단하지 못한 것 같다. 직접 겪어본 바로는 마이너리거에서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건 올챙이가 개구리 되는 변화 정도로 안 된다.
“쟤들 중에 메이저로 올라올 애들이 몇이나 되겠어? 대부분 중간에 그만두겠지. 내 경우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지나고 보면 1라운더 그런 거 다 소용없더라구. 확실한 실력에 운발이 따라줘야 해.”
내가 베그웰에게도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빅리그 팀과 계약을 해야 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베그웰처럼 드래프트를 통해 뽑히는 것이다. 30개 팀이 50라운드까지 지명하면 매년 1,500명 정도가 뽑힌다. 상당한 숫자다.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중 가장 많이 뽑는다.
실제로 다 계약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형식은 그렇다.
문제는 미국에 아마추어 야구 선수가 너무 많다. 약 만오천 개 고등학교 야구팀에 등록된 선수만 45만 명이다. 대학은 1, 2, 3부 리그까지 있고 400개 학교에 만천 명 정도 등록 선수가 있다.
이중 약 12만 명이 매년 드래프트 대상자라고 한다. 거기서 일 년에 1,500명이면 1.25% 확률이다. 마이너리거가 되기 위해서도 그 정도의 산술적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여기에 국제 계약까지 생각한다면···
미국의 일반인이 마이너리그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3700대 1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통계도 있다.
어떻게 마이너리거가 되어도 문제다. 메이저리그 로스터는 25명이 정원이다. 총 30개 팀 750명의 선수가 매년 개막 시 등록된다. 그런데 부상과 같은 이유로 못 뛰는 선수가 생기면 하부 리그에서 콜업하기 때문에 매 시즌 약 1,000~1,200명 정도의 선수가 빅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다고 한다. 마이너에서 콜업되어 거기 포함될 확률이 얼마나 될지···
어떤 통계로는 드래프트 된 선수 중 25인 로스터에 하루라도 이름을 올리는 선수는 약 5% 정도라고 한다. 그중 30세 정도까지 빅리그에서 뛸 수 있는 선수는 1% 미만이라고.
우스갯소리 중 미국 총인구 대비로 계산하면 마이너 선수가 될 확률은 3만3천 대 1, 메이저 선수가 될 확률은 29만 대 1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겁나게 어렵다.
마이너 생활을 할 때 원정 버스에서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나 어쩌면 대단한 사람일지도···’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리그 경기를 뛴 선수는 약 만오천 명 정도라고 한다. 그중 딱 한 경기만 출전했던 선수도 약 10%인 천사백 명이 넘는다. 나는 거의 한 시즌을 뛰었다. 그리고 올해 풀타임을 뛸 예정이다.
“베그웰. 잘하자.”
말해 놓고 나니까 많이 오글거린다. 오늘 밤 이불킥 할 것 같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언제는 못했어? 오늘도 잘 던질 거야. 나만 믿어.”
그가 그리 믿음직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안정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말이다.
오늘 시범 경기가 시작된다. 뜻밖에도 첫 경기 첫 투수로 내가 나간다. 3이닝을 맡길 예정이라고 들었다. 첫 등판치고는 조금 많다. 개막전이라고는 하지만 시범 경기다. 거기에 무슨 의미를 두고 싶진 않다.
‘한 타순을 맡긴다?’
이게 밀어주겠다는 의미인지 빨리 떨어트리겠다는 건지 판단하기 애매하지만 그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
***
“스트라익.”
초구에 대한 스트라이크 콜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볼.”
기분이 업 되고 감도 좋지만 신중하게···
오늘의 상대는 레인저스다. 내셔널 리그 팀이었으면 했지만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어쩔 수 없다. 시범 경기를 치르는 애리조나의 캑터스 리그나 플로리다의 자몽 리그는 양 리그 팀들이 막 섞여 있다. 이들을 상대로 팀당 2경기 총 28경기를 치르게 된다.
레인저스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작년 월드 시리즈에 올라간 강팀이다.
“응?”
3구를 던지려는데 뭔가 갑자기 찜찜한 느낌이 확 온다. 머릿속을 헤집는 간질간질한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 경기 전 타자 분석도 열심히 했고··· 빠트린 것 없이 다 했는데 뭔지 모르겠다.
‘무슨 잡생각을··· 별거 아닐 거야. 경기에나 신경 써야지 사인을 잘 보고··· 아! 이런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
원한에 맺힌 3구를 힘껏 던졌다. 베그웰의 사인을 보다가 생각이 나버렸다.
“스트라익.”
‘작년 월드 시리즈 니들이 좀만 잘했으면 100불 따먹을 수 있었는데··· 어휴! X신들 그걸 못 이겨 가지고···’
베그웰에게 돈 잃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야구를 보는 안목이 왠지 한 수 아래라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저것들이 날 째려보는 저 눈빛과 정신력으로 경기를 치렀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4구 아웃 코스 낮은 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끌려 나오면 좋고 아님 말고 식으로 던진 거였는데 쉽게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X신. 2% 부족한 니들이 어떻게 우승을 해. 빨리 다음 타자 나와.’
1번 로이 맥리런, 지난 시즌 출루율이 4할에 근접했다고 하더니 별거 없다.
작년까지 텍사스와는 같은 리그였었다. 물론 지구가 달랐지만, 같은 리그는 다른 지구의 10팀과 66경기를 한다. 팀당 6~7차전을 가진다. 19경기씩 해야 하는 같은 지구 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년에 두 번 등판했었다.
‘기록을 보니까 그렇더라구. 물론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
난 잘 잊어버리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경기 때 모든 기억이 생생하다면 그건 저주다. 가끔 홈런 맞는 꿈 꾸다 깨는 것 빼곤 잘 잊는다. 다행히 레인저스에는 그런 기억이 없다.
첫 이닝을 삼진 둘과 유격수 땅볼 하나로 끝낼 수 있었다. 빅마켓 팀답게 내야수들의 수비 수준이 아주 충실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연습 경기 때도 그렇고 지금도··· 경기를 치러갈수록 흡족함이 더해간다.
‘멋진 팀에서 멋진 모습으로 선발을 쟁취해내야겠지. 히힛 역시 빅마켓 팀이 짱이야. 그동안 스몰마켓 팀에서 어떻게 공을 던졌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개고생했네.’
1회를 가뿐히 마치고 덕아웃에서 포수에게 속삭였다.
“베그웰. 2회부터 굴리자.”
내 제안에 화들짝 놀란다.
“뭐? 벌써? 타자들에게 슬라이더 이미지를 좀 더 심어주는 게 낫지 않겠어?”
베그웰은 조금 걱정스러운 것 같다.
“그렇게 던지면 불펜으로 던질 때와 차이가 없잖아. 선발이면 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리고 이 내야진이면 해볼 만할 거 같은데···”
“알았어. 그럼 사인은···”
시범 경기라서 그런 건지 벤치에서 사인을 내는 경우는 없었다. 니 맘대로 하라니 내 맘대로 할 거다.
타자들에게는 이미 슬라이더의 이미지가 새겨진 것 같았다. 스윙의 부자연스러움이 내게도 느껴진다.
‘타자 컨디션이 올라오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