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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스트링 트레이닝
“스트라익.”
투수조 소집 며칠 후 타자들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라이브 피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력 5선발 후보는 만에 하나라는 여지조차 주지 않기 위해 나름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도 고인물들은 느긋했다.
‘아! 위화감 쩌네.’
선발 경쟁 중인 나머지 투수들은 바늘 구멍을 뚫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각오다. 나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하려고 한다. 이 날들을 위해 일찍 몸을 만들려고 겨울 동안 그 난리를 쳤다.
‘몸쪽이라··· 아직은 느려.’
그라운드에서는 첫 번째 조의 라이브 피칭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선발이 보장된 투수들이다.
다섯 타자가 두 번씩 타석에 선다. 모두 열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셈이다. 선수마다 정해진 투구 수가 있다. 난 40구다. 그 투구 수에 도달하면 상대한 타자 수에 상관없이 투구를 멈춰야 한다.
난 당연히 열 명을 상대해 확실한 삼진으로 다 보내버릴 계획이다. 타자당 유인구 하나만 쓴다 생각하고 정면 승부를 하면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다.
선발에서 밀려나지 않을 선수들에게 스프링 트레이닝은 페이스 조절을 위한 기간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라이브 피칭에 참여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 참여하는 선수도 아주 부드럽게 던진다. 무리하지 않았다.
그들의 순서가 끝나고 나자 캐처의 포구음이 달라졌다. 이 순위 선수들은 뒷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무엇인가 보여주지 못하면 당장 경쟁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나도 마찬가지지. 그나마 우리는 나은 편인가?’
선발 투수를 원한다고는 하지만 그 후보군의 선수들 대부분은 25인 로스터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이다. 선발 경쟁에 밀리더라도 대개 불펜에 자기 자리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독한 맘 먹었다지만 쟤들만 하겠어?’
우리 다음 조는 대부분 초청 선수들이다. 40인 로스터 포함이 유력한 마이너 유망주, 드래프트 상위 순번 선수 등이다. 그들은 가리는 게 없다. 메이저 행이 간절할 뿐이다. 그들의 눈은 빛나는 걸 넘어 이글거리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한숨이 난다.
‘휴우! 저들 중에서 콜업을 받을 수 있는 건 몇 명이나···’
지금 생각해보면 작년에 내가 이 아수라장을 어떻게 뚫고 올라왔나 싶다.
“웬 한숨이야? 첫 라이브 피칭이 부담스러워?”
‘어린 넘이 싸가지 없이 형한테··· 음. Would you···? 나 May I···? 몰라?'
아메리칸 스타일이 원래 이렇긴 하지만,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놈에게 이런 식의 반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별로다.
나도 베그웰에게 반말을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그웰은 두 살, 정확히 말하면 1년 조금 넘게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친구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지만 다섯 살은 너무하다.
‘구질구질한가?’
그래도 첫 만남부터 친근하게 다가온 선수여서 그러려니 하고 넘겨왔지만, 매번 짜증은 좀 난다.
‘사람이 착해서 봐주는 거지.’
웹 로저스가 라이브 피칭을 마치고 불펜으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이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자이언츠 팜 출신으로 재작년 콜업 후 작년에 선발진에 안착했다. 자이언츠에서 애지중지하는 영건이다.
“어! 그런 건 아니고 쟤들 보니까 작년 일이 생각나서···”
턱 끝으로 티 나지 않게 슬쩍 초청 선수들을 가리켰다.
“So도 작년에 저랬어? 당신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마이너에 거의 안 있었잖아.”
“내가 계약할 때 20살이었다면 어쩌면 좀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작년에 난 27살이었어. 20살에 마이너 1년 머무는 것과 27살의 1년은 다르다고. 그리고 난 저기 있지도 못했어. 다른 곳에 있었지.”
펜스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로저스도 곧 알아차리고 슬며시 웃는다.
“그건 그렇겠네. 많이 초조했겠어.”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 투수들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날카로운 면이 많은데 이 녀석은 대부분의 일에 허허실실로 대하는 별종이다.
“이런 말을 나누기에 너나 나나 아직 어울리는 연차가 아니지 않나? 조심해. 너도 삐끗하면 아웃될 수 있어.”
슬쩍 위협해 봤지만, 로저스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글쎄,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보다 그럴 가능성이 높은 건 저들이 아닐까?”
로저스의 눈이 그늘 아래 느긋하게 앉아 활짝 웃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애덤과 캐빈이라··· 그건 그렇기도 하겠네.”
자이언츠 최고참 투수들이다. 항상 웃으며 즐겁게 살고 있는 이들이다. 나도 1억 달러쯤 벌고 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캐빈의 계약이 올해까지야?”
“맞아. 2년 계약에 옵션 1년이 있었는데 저번 시즌 정도 성적이라면 프론트에서 연장하지 않겠지. 애덤은 그 다음 해 까지고.”
그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없어도 자신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다는 말투다.
“그런 식이라면 차라리 저쪽을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소르카 씨는 아직 한창때잖아. 그는 아직 31살밖에 안 되었다고 벌써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건 팀에게 재앙이지. 7년짜리 계약 겨우 2년째에···”
앞만 보고 전진하는 무지성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현실 인식은 나름 정확하다.
“나 몸 좀 풀어야 해. 곧 내 순서야.”
“히힛. 잘 해봐.”
‘저 동네도 나름대로 서열 의식이 있나 보네. 저기 서면 뭐가 좀 달라 보이려나?’
빨리 저 자리에 서고 싶었다.
“스트라익.”
밖에서 관찰하기로는 투수 못지않게 타자들도 아직 몸이 안 올라와 스윙이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서로 합을 맞춰보는 식으로 설렁설렁 던지는 것 같았다. 그랬는데 내 차례에서 타자들이 모두 교체되었다. 초청 선수들로.
틱-
첫 타자부터 진짜 시합처럼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신중하게 초구를 지켜보더니 2구부터 사정없이 배트가 돌아간다. 눈빛이 몹시 사납다.
‘나 참! 눈에 힘준다고 공이 맞겠냐? 메이저에서 평균자책 2점대를 아무나 찍는 줄 알아?’
지금 나오는 타자들은 아마 AAA 선수들일 것이다. 25인 로스터에 자리가 비면 바로 올라올 대체 선수들. 그들은 지금 몸도 충분히 만들어져 있고 목표 의식도 있다. 그리고 메이저 경험을 가끔은 가졌을 것이다. 어디선가 나와 마주쳤던 적이 있을 수도 있다.
‘3구···’
배트가 헛돌았다.
“스트라익.”
밖에서 내 투구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에게서 작은 놀람이 전해져 온다.
베그웰이 아닌 타자 상대로는 처음 슬라이더를 던졌다.
나도 실전 테스트가 필요했다. 베그웰은 변화구에 대한 대처를 테스트하기에 영 미덥지 못한 타자였다. 베그웰이 지난겨울 동안 타격에서 큰 진보를 이루어내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다.
스윙이 좀 바뀌긴 했다. 그렇지만 정작 배팅 연습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시작했다. 플로리다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체력 훈련은 열심히 했지만, 힘이 좋아졌다고 공을 잘 맞출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애초에 힘이 모자란 타자가 아니었다.
고 감독이 걔도 리셋이 필요하다 어쩌고 하긴 했었지만, 과연 고 감독의 역량이 메이저리그 타자에게 타격 지도를 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본인이 자신 있다니 두고 보지 뭐. 근데 백업 포수한테 무슨 연봉을 150만 불이나 ··· 마일리가 일을 잘하는 건가? 나는 겨우 10만 불 올려 주고.’
솔직히 그거라도 올려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서비스 타임 선수는 이렇게 서럽다.
‘선발로 자리만 잡으면 그 정도로는 안 될 겁니다.’
그러려면 일단 이놈들부터 해치워야 한다. 두 번째 타자를 향해 힘차게 공을 던졌다.
“스트라익.”
***
“생각보다 공 끝이 너무 좋네요.”
리우드 투수 코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So는 이적 첫 시즌이라 많이 생소했고 워낙 봐줘야 할 투수들이 많아 그동안 거의 방관했었다. 알아서 잘해나갈 수 있는 선수인 것 같기도 했지만, 자신이 언더스로우의 피칭 메커니즘을 잘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저만하니까 그 출혈을 하고도 데려온 거겠지. 그리고 트리플A 타자들이 처음 보는 투수의 저런 변화구를 공략하기는 어렵지 않겠어?”
너무 당연한 결과라서 감독은 조금 비관적이었다.
“그건 그렇죠. 스스로 흔들리지만 않으면 연타가 힘든 유형의 투수 같군요. 이번 시즌 저 슬라이더를 장착하면서 자신감이 상승한 것 같은데 좀 지켜봐야겠어요.”
투수 코치의 입장에서 불펜의 힘이 되어 줄 확실한 투수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았다.
“잘 던지는 거야 알고 있었지. 스카우팅 리포터에 던지는 이닝이 길어질수록 BABIP(인플레이 타구가 안타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라고 나오더군.”
“그거야 어느 투수나 다 그렇죠. 그리고 저 친구는 그것보다 피홈런이 문제가 되었던 것 아닙니까?”
리우드도 그 리포트를 본 기억이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게 그 변동이 심하니까 하는 말이겠지. 그래서 프런트 측에서 짧은 이닝만을 써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구. 내가 무슨 말 하려는 지 이해했지?”
“체이스의 기대가 컸었는데 많이 거북해하겠군요. 알고만 있겠습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 특히 야구에서는··· 체이스가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이 되는 거지. 프런트에서 마무리 보강을 생각했다는 건 지난 시즌 그의 임펙트가 약했다는 말도 되니까. 저런···”
타석에 선 타자들은 제대로 된 타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배트를 내다 또 한 명의 타자가 삼진을 당했다. 벌써 네 타자째다.
“슬라이더 각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저렇게 공략이 어려운가? 커트가 안 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네요. 싱커를 주 구종으로 삼아서 이지선다를, 아니 삼지선다라고 해야 할까요? 저 싱커를 더 떨어트려서 볼을 던질 수도 있는 것 같으니까요. 비슷한 코스에 백도어성의 싱커가 들어가면 스트라이크. 슬라이더라면 볼이죠. 일단 커맨드가 탁월하네요.”
“유인구를 많이 던지지 않은 것 같은데···”
감독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 뚫어져라 피칭을 보고 있는 뒤 타자들이 들어왔다.
“타자를 상대하지 않고 타선을 상대한다 이건가? 머리가 좋은 것 같네. 이건 포수의 능력일까?”
그에게 베그웰은 생소한 존재였다. 트윈스에서 가끔 나오던 백업. 그 정도 생각밖에 없었다.
“생소한 스피드와 궤적으로 타이밍을 흔들어 놓고 인코스 하이에 90마일 정도의 투심을 던지면 웬만한 타자는 치기 어렵겠죠. 저 슬라이더 보기보다 피치 터널이 긴 것 같습니다. 싱커와 콤비네이션이 기가 막히네요. 어쩌면···”
“좀 더 보지. 한 바퀴 돌았으니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한 번씩 삼진을 당한 타자들이 필사적인 눈빛으로 달려들었지만 제멋대로 휘어지는 느린 공을 아무도 제대로 맞춰내지 못했다.
“역시 이게 AAAA의 한계인가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