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42화 (42/200)

42화. 봄이다

작년엔 마이너리거들과 훈련하며 담장 저쪽에서 메이저리거들을 보며 침만 삼켰었다.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했지만 스프링 캠프 초청 같은 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제 작년 그곳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에서 보여지는 사람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그라운드 백여 미터를 이동하는 데 일 년이 걸렸다.

스프링 캠프 시작 하루 전 도착해 그라운드를 둘러보는데 찌릿하다.

‘내년 봄엔 어떨까?’

코칭 스탭은 선수소집일 하루 전에 모인다는 정보를 베그웰로부터 들었다. 하루 전에 가도 괜찮겠냐는 문의를 미리 했다. 기대한 대로 OK.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감독에게 면담 요청을 했다.

“어서 오게. 플로리다에서는 언제 왔나?”

감독과 얼굴을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적 후 통화는 한 번 했었다. 그는 현역 때 스타까지는 아니었지만 풀타임으로 10년 이상을 메이저리그에 머물렀다. 너투브에서 그의 선수 때 영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은퇴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 배도 나오지 않고 건장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주일쯤 되었습니다.”

“오래 있었네. 그래서 그런지 몸이 탄탄해 보여 좋아.”

웨이드 라스. 50세. 2년 전 자이언츠 감독 취임. 컵스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리 알아본 감독의 이력이 주르륵 떠오른다.

‘컵스에 5년이나 있었지. 그 사이 지구 우승은 두 번 했지만. 월드 시리즈엔 진출한 적이 없고, 컵스에서 기대와 중용을 받았지만 조금씩 모자랐지. 그 팀이 그 정도로 만족할 팀이 아니거든. 그래서 지금 여기에···’

그의 문제는 윈나우 팀인 자이언츠에 와서 컵스 때보다 성적이 더 후퇴했다는 것이다. 올해가 계약 마지막 해이니만큼 그도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못하면 재계약이 어렵다.

“원하는 게 있습니다.”

감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아직 자네와 지내온 시간이 짧아서 그런지 내용 파악이 잘 안 되는군. 무리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이면 들어 주지.”

이 동네는 참고 말 돌릴 필요가 없다. 야구 잘하면 웬만한 일은 무사통과다. 실력지상주의, 아주 좋은 시스템이다.

‘나?’

이제 정말 자신 있다.

“선발로 뛰고 싶습니다. 시범경기에서 그 자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뭐라고? 허허. 인사나 하러 온 줄 알았더니 첫 만남부터 어려운 문제를 던지는구만.”

감독에게는 뜻밖의 말이었을 텐데 별로 놀라는 기미가 없다.

‘난제는 무슨··· 선발 자원이야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고··· 불펜투수도 잘하면 선발로 나가고 그러는 거지.’

감독이 아주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당연한 일인가? 무턱대고 하겠다라고 한 게 아니라 경쟁을 하겠다고 한 거니까. 실적을 못 내면 불펜시키면 되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많이 알아봤겠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네 자리는 확정이야. 알지?”

말은 저렇게 해도 자이언츠 정도의 빅마켓 팀이라면 다섯 자리 다 예정된 선수가 있다. 선수들의 긴장감과 성취동기 부여를 위해 한 자리쯤 비워 놓고 마지막에 결정하는 척할 뿐이다.

이기면 된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월등한 실적을 내버리면 진정한 의미의 확정은 없어진다. 잉여자원이 생기면 멀쩡하게 공 잘 던지던 투수도 트레이드시켜 버리는 게 이 동네다. 내가 경쟁에서 이기면 뒤처리는 구단 몫이다.

“그 말씀을 경쟁 후보에 넣어주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선수들의 건전한 경쟁은 언제나 환영해. 물론 자네 보직에 대해 다른 계획이 있었지만, 선수가 하고 싶다는데 되든 안 되든 일단 시켜줘야지.”

선발 경쟁에 이기긴 어렵겠지만 네가 굳이 하겠다니 시켜는 주겠다라는 뜻이다. 내 독해력은 그동안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입맛은 쓰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건 부탁입니다.”

“요청보다 부탁이 더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감독은 아직도 웃는 얼굴이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제 등판 시에 포수는 익숙한 베그웰로 해주십시오.”

웃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흠! 그건··· 좋아 그렇게 해주지.”

조금 고민이 되는 듯했지만 잠시 후 선선하게 승낙을 한다. 어차피 오래가지 않을 일이니 별 상관없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부터 선발 그룹에 들어가서 훈련하겠습니다.”

망설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투수 코치에게 전해 주지. 좀 북적거리겠구만. 9명이서 움직이려면···”

간단하게 승낙을 받았다. 내가 이제 이 정도 위치는 된다.

자이언츠가 즉전감 둘과 유망주 투수 하나를 묶어서 주고 데려온 나다. 외부에서 이 트레이드를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도 다 안다. 이걸 다른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이 팀에 누군가 나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아주 힘센 사람이···

‘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 거라구. 사이즈가 되니까 이런 요구가 먹히는 거야.’

“잘 해보게. 아주 잘해야 할 거야. 자네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기 어려운 팀 사정 정도는 이해하지?”

“물론이죠. 실패하면 두말하지 않고 불펜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조용히 나왔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좋은 조짐인 것 같다.

***

『앨런 소르카 ERA 2.81 192이닝 14승 6패 탈삼진 227 볼넷 50

애덤 산체스 ERA 3.05 202이닝 16승 12패 탈삼진 238 볼넷 60

케빈 데스클레니 ERA 3.17 167이닝 7승 2패 탈삼진 152 볼넷 42

웹 로저스 ERA 3.03 148이닝 8승 6패 탈삼진 158 볼넷 36

데니스 존스 ERA 3.83 138이닝 7승 4패 탈삼진 152 볼넷 38

에릭 프럿코 ERA 4.08 114이닝 6승 3패 탈삼진 98 볼넷 30······』

“사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뭐를요?”

해리슨은 올 시즌 선발진 예비 명단을 보느라 단장의 말을 깜빡 놓쳤다.

“So가 선발을 하겠다고 감독에게 했다지 않습니까?”

“예? 그게 무슨··· 그래서 감독은 뭐라고 했답니까?”

스프링 트레이닝 사흘째인데 시작부터 이렇게 계획이 뒤틀리면 곤란하다, 보던 서류를 책상에 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도 영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일단 기회를 주겠다고 했답니다. 감독 입장에서 선수가 굳이 하겠다는데 억지로 반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죠. 일단은 그렇게 처리했는데 차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슬쩍 물어보더군요.”

“So는 왜 갑자기 선발 바람이 불었답니까? 잘하고 있는데 굳이 왜···”

“원래 선발이었지 않습니까. 작년 A+에서 선발로 시작했었죠. AA에서 불펜으로 보직 변경했던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지난 시즌 성적에서 자신감이 상승해서···”

사장이 늘어지는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선발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갑자기 바꾸면 몸이 적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선수 출신이 아닌 사장으로서는 그 정도까지 디테일한 부분을 알기는 힘들었다. 그에게 야구 선수로서의 기억은 12살까지였다.

“준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에 인스트럭터와 플로리다에 오래 있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선발 투수를 할 수 있는 몸을 만들었겠죠.”

해리스에게 So와 베그웰이 트레이너 하나와 플로리다에서 동계훈련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을 떠올랐다.

“아! 그랬었죠. 그가 개인 인스트럭터가 있었네요. 깜빡 잊고 있었군요. 음. 그 인스트럭터에게 구단에서 비용이 지불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에게 보고서라도 받은 것이 있을 거잖습니까? 그걸 좀 보고 싶군요.”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긴 했습니다만,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었죠. 보고서 같은 건 받지 않았습니다. 최소 비용만 지출하면서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였지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해서 보고서를 받아보도록 하죠. 큰돈 드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인스트럭터가 유능하긴 합니까?”

상당한 기간 So에게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너무 느슨하게 처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사장은 이번 기회에 그것을 바로 잡고 싶었다.

“So의 대학 때 감독이었고 한국 국가 대표팀 감독 경력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능력이야 있겠지요. 한국에서 대학 입학과 관련한 범죄 혐의를 받았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 사건 후 So에게 합류했습니다.”

“인스트럭터가 그 사람이었습니까? 그런 줄은 몰랐군요. 그런 인물이라면 범죄 경력 때문에 비자 통과가 안 되는 것 아닌가요?”

So의 트레이드를 위해 구단 차원에서 그의 과거 삶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좀 알아봤는데 그 사건 자체가 상당히 문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첫 재판이 열리자마자 공소기각으로 사건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기록상으로는 깨끗했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어떤 내막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알아봐야 할 필요를 윌리스 단장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 인스트럭터와 재계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가 사업체를 차렸습니다. 전 트윈스 직원 하나와 동업으로 에이전트 회사를 차렸더군요. 고객으로 So와 베그웰을 두고···”

“이제 비자 때문에 답답할 일이 없을 거다 그거네요. 그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요? 경제적으로 So를 압박한다든가 그런 일은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성공한 선수 하나가 가족이나 지인 모두를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일은 슬럼가 출신이거나 남미 출신 선수들에게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런 것에 선수가 영향받아 성장이 멈추거나 슬럼프에 빠지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높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느낌만으론 곤란해요. 근거가 있습니까?”

단장의 사전 조사는 상당했다. 거침없이 답변한다.

“이번에 에이전트 사업을 시작하면서 총 투자 금액이 5백만 불 정도 되더군요. So가 상당한 금액을 지원한 것 같긴 하지만, 그가 낼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죠. 알아본 바로는 건물 구입을 이유로 So가 대출받은 2백만 불 이외의 나머지 금액은 그 인스트럭터가 투자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색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 있겠네요. So에게는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이 좀 아쉬운 구석이 있어야 상대하기가 쉬울 텐데···”

어쩌면 나중에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해리스 사장은 머리를 털어냈다.

“일단은 좀 지켜봅시다. 괜히 선수 기죽일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잘되지도 않을 일 같은데 잘하면 잘하는 대로 괜찮고··· 감독이 알아서 잘하겠죠.”

해리스는 가볍게 넘게 버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