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40화 (40/200)

40화. 뿌린 대로 거두리라

“헉헉··· 아악!”

“으윽···”

플로리다의 태양은 12월이지만 뜨거웠다.

일평균 20도 내외의 온도, 적당한 습도. 통상적으로는 쾌적하다고 할 환경이지만 아침 식사 전 10km를 뛰고 나면 사정이 다르다.

운동선수에게 10km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걸 구간별로 속도를 달리해서 뛰면 아침부터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 소위 말하는 인터벌 러닝이다.

작년엔 혼자 뛰었는데 올해는 베그웰이 같이 뛰니까 좀 낫다. 베그웰이 같이 왔다. 새 마음으로 올해는 좀 빨리 몸을 만든다나 어쩐다나···

“자! 마무리···”

최대로 올렸던 속도를 천천히 보통 걸음 속도까지 늦춘다. 한 발로 서 나머지 발을 뒤로 당기는 허벅지 스트레칭··· 호흡도 안정을 찾아간다.

흥건한 땀을 씻어내고 아침을 먹는다. 저염분 고칼로리 식사.

드레싱을 최소화한 샐러드와 간하지 않고 그릴에서 레어로 익힌 두툼하고 넓적한 스테이크 2개.

‘육질에 지방이 적당히 분포되어야 감칠맛이 나는 건데··· 이건 뭐 퍽퍽한 게···’

입맛은 없지만 억지로 씹어 삼킨다. 음료는 물이다.

“빌어먹을 성수기 플로리다면 뭐 하냐. 이때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거 같아서 왔더니··· So 해변에는 언제 가볼 수 있는 거야?”

‘하아! 베그웰. 밥 먹을 땐 조용히 밥만 먹자. 안 그래도 먹기 싫어 죽을 것 같은데···’

물론 이런 생각을 말로 옮기진 않았다. 난 어릴 때 밥상머리 예절 교육을 엄마에게 잘 받았다. 입에 무엇인가 넣고 말하지 않는다.

“으음. 글쎄, 좀 지나서 휴식일 하루 가지자고.”

급하게 음식을 삼키고 말을 받아줬다. 물주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번 동계 훈련비용 중 베그웰이 낸 지분이 상당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 요즘 통장 잔고가 거의 말랐다. 그래서 비용 절감도 할 겸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선뜻 따라나섰다.

트레이드도 같은 팀으로 되고 이 친구와 나는 전생에서 아주 깊은 연을 가졌던 사이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함께하는 것은 당연하다.

“몸에 좋은 거야. 꼭꼭 씹으면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구.”

포크를 쥔 베그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좀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서 고 감독은 따로 식사를 한다. 간이 적당한 베이컨과···

‘하아! 좀 안 보이는 데 가서 먹으면 안 되나?’

물론 이건 생각만 했다. 뭐라고 하면 고 감독에게 우리 때는부터 시작해서 의지박약과 같은 정신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줄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한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 저긴 음료도 오렌지 주스네.’

작년에는 처음이고 고 감독도 없었다. 진짜 많이 헤맸었다. 그때 있는 거라고는 악과 깡밖에 없었다. 전지훈련 장소로 플로리다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었다. 스프링 캠프 장소도 이곳이고 해서 그전까지 따로 그 근처에서 체력 훈련을 해볼 생각이었다. 계약금으로 받은 20만 불이 큰 힘이 되었다.

‘차 하나 빌려서 여기저기 막 헤매고 다녔었지.’

플로리다는 미국에서 이름난 휴양지다. 12월에서 3월이 이 지역 관광의 최고 성수기였다. 비가 적고 기온이··· 아무튼 일 년 중 가장 좋을 때란다.

‘그런 걸 미국 온 지 한 달도 안 된 놈이 어떻게 알았겠어.’

쉽게 생각했는데 적당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해변을 피해 내륙 쪽으로 점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만났다. 운명의 장소를···

레이크스톤 CC 18홀짜리 퍼블릭 골프장이다. 미국의 담수호 중 몇 번째로 크다는 오키초비호 인근에 있다. 사실 체력 훈련은 아무 데서나 해도 될 것 같지만 은근히 조건이 까다롭다. 아무튼 그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아주 좋은 곳이다.

원래 숙박 시설이 없는 곳이지만 부지 안에 방갈로 같은 곳이 있었다. 과거 시설 관리를 위한 직원 숙소였다는데 지금은 관리를 위탁 업체에 맡겨 빈 곳이었다.

부지 넓고 안전하지, 클럽하우스에서 식사 문제도 해결된다. 근력 운동할 수 있는 피트니스 시설도 있고 심지어 수영장도 있다. 내가 골프를 안 친다는 게 좀 그렇지만 해변에서 멀어 한눈팔 일도 없다. 운이 좋았다.

‘스프링 캠프 가기 전 체력 훈련을 위한 장소를 구한다는 설명에 매니저 아저씨가 흔쾌하게 승낙을 해주더라구. 역시 미국 중년은 야구 이야기에 끔뻑 죽더라니까.’

비용은 좀 많이 들었지만, 자본주의의 승리자였던 우리 엄마가 예전에 하신 말씀을 난 기억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기다. 맨날 뿌스레기만 묵고 살았던 놈은 우째 쫌 풀리도 또 맨날 그렇게 산다. 닌 뿌스레기 쳐다도 보지 마라. 그런 건 챙긴다고 챙겨지는 게 아잉기라. 그런 거 묵는 아들이 모이게 내비두삐라. 비우면 된다. 그라믄 일이 저절로 이라진다.’

클래스는 영원하고 그릇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고 한다.

‘내 사이즈가 좀··· 음. 그 사이즈 말고···’

난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는다. 많이 거두려고 많이 쓰고 있다.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아주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딱 하나만 빼면.

골프장 곳곳 노란색 바탕에 악어 머리가 그려져 있는 악어 조심 표지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연 친화적 환경이라고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아직까지 실물을 보지는 못했다. 가급적이면 앞으로도 안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해저드 근처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고 감독이 가장 질색을 했다. 우리가 러닝을 하면 따라오기는 하는데 전동카트에서 내릴 생각을 안 한다. 악어는 점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가 제일 안전하단다.

‘진짜 그런가? 본 일이 없어서···’

이곳 직원들 이야기로는 여기 사는 엘리게이터라는 악어 종류는 온순한 편이라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공격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곧 뒤따라 붙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산책하던 여자를 공격해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 일이 있었고 플로리다주에서 지난 50년간 악어에 물려 사망한 사람이 25명이란다. 플로리다 전체에 약 130만 마리가량이 산다고 뜻 모를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량 고객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골프장에게 큰 손해인데 농담한 거라고 생각한다.

‘시골이라서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찝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설마 내가··· 허허헛.’

내가 살아오면서 설마 하는 일을 좀 겪긴 했지만, 골프장 입장에서 내 존재는 대외적 이미지 관리에 좋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쏠쏠한 수입이 된다. 손님 열 명 라운딩 수입보다 나 하나가 나을 수도 있다. 그런 나를 위험에 방치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작년에는 마이너 선수였지만 올해는 메이저리거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운동 중 라운딩하는 손님들과 가끔 마주치면 그쪽에서 먼저 손을 흔들어주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나는 나름 유명인사다.

올해는 차를 빌릴 필요도 없이 전화로 예약했다. 골프장에서 공항으로 픽업을 하러 와줘서 이동도 아주 편하게 했다. 매니저 아저씨 및 골프장 직원들의 친절한 환대 속에 운동 잘하고 있다. 아마 한국 같으면 플래카드라도 붙일 기세였다.

이런 게 소소한 게 좋았다. 사실 올해 이곳에 오기는 좀 애매했다. 트윈스 때는 플로리다에 캠프를 차린 팀들이 모인 자몽리그(Grapefruit League)에 속해 있었지만, 자이언츠는 애리조나의 선인장리그(Cactus League)다.

투싼(Tucson)으로 갈까 하다가 여기서 훈련을 하고 결과가 좋았다는 점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징크스라면 징크스가 되겠지만 익숙한 곳이 좋다.

“아흐···”

“어어어···”

식후엔 조금 쉬었다가 고 감독의 지도로 피트니스 룸에서 매트 한 장 깔아놓고 필라테스를 한다. 언더스로우 투수에게 유연성은 아주 중요하다.

“더 숙여. 힘 빼고··· 고개 들지 마.”

“아아악!”

베그웰은 처음에 고전했지만 좀 지나자 곧잘 해냈다. 그 역시 풀타임 메이저리거답게 기본적인 운동능력이 최상위급이다. 쇠질을 많이 해서 그런지 유연성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근육 사이즈가 너무 커도 야구선수에게는 문제다.

‘저 인간도 고집은··· 안 해도 된다니까.’

베그웰은 투덜거리면서도 훈련 스케줄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고 감독도 중년의 나이와 체형을 생각하면 굉장히 유연한 편이다. 물론 그는 지도만 한다. 직접 하는 걸 싫어한다.

“내가 국가 대표 할 때는···”

‘어휴! 저런 사람을 마일리는 왜···’

“야! 소영수. 호흡. 호흡 똑바로 안 맞출래.”

이럴 땐 독사 같다.

이게 끝나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뛴다. 아침보다 짧은 거리지만 인터벌의 간격이 더 촘촘해진다. 이렇게 진을 다 빼놓고 점심 식사. 오후엔 기구를 이용한 근력 운동. 조금 쉬었다가 저녁 식사 전 또 가볍게 뛴다.

저녁 먹고 밤에는 모션 캡쳐 영상을 보면서 셰도우 피칭과 같은 밸런스 운동··· 힘은 들지만, 무엇이든 혼자 했던 작년보다는 아주 좋다.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잠자리에 들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다 보면 잠들어 다시 아침을 맞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여기서는 일찍 자게 된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야간 경비원 몇 이외에는 사방 수십 킬로 내에 사람이 없다. 이곳은 절해고도가 되고 우리는 그곳에 갇힌 조난자가 된다.

이동수단도 없고 가볼 만한 곳도 없다. 아주 겁나게 좋다. 정말 위치 하나는 끝내준다. 가끔 현타가 오긴 하지만 좀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진다.

“자자.”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잠들었다. 이제는 슬슬 견딜만하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티를 내면 안 된다. 고 감독은 그걸 알게 되면 운동 강도를 더 올릴 사람이다.

“아···예. 뭐라고요?”

피곤한 척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니다. 먼저 자라. 나는 잠시···”

고 감독이 우물쭈물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거 영상통화 하러 간 거다.”

옆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던 베그웰이 자세를 옆으로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겠지. 얼마나 애틋한···”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너 안 잤냐? 왜 자는 척을 하고···”

“그거야 너하고 같은 이유겠지. 나도 운동 오래 했어. 척하면 척이야.”

이놈은 곰 같은 여우다. 원래 포수란 게 머리 나쁘면 못하는 포지션이긴 하다.

“너 에이전트 계약할 거냐?”

난데없이 당연한 일을 묻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 할 수가 있나. 어느 순간 고 감독과 나는 서로의 이익을 주고받는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해야지. 그런데 베그웰은 에이전트가 있는 게 아니었어?”

드래프트 1라운더로 계약금을 400만 불이나 받았던 신인이 에이전트가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있었지. 계약 해지한 지 좀 되었어. 네가 하면 나도 하지 뭐, 이번엔 마일리 씨에게 맡겨 보자구. 그렇지 않아도 연봉 협상 때문에 연락이 왔었어. 내일 봐. 잔다.”

자기 할 말만 하더니 대답을 들어보지도 않고 베그웰이 다시 돌아누웠다.

고 감독은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다. 오래 묵은 노총각이니 이해는 된다.

‘좋을 때다. 다 늙어서 회춘하시겠네. 그런데 진짜 맞긴 맞는 거야? 혹시 갔다 왔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