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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38화 (38/200)

38화. 여유를 가지자 (2)

마일리의 돌출 발언이 뜻밖의 일이긴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 감독과 뜻을 함께한다면 나름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좀 많이 비싼 물건이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못 살 것도 없다. 내 기량 향상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면 그 정도 투자는 그리 비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아!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 말하는 것 들어보면 무르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꼭 사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지금 그만한 돈도 없잖아요.”

“구입 대금은 삼 년간 분할해서 내는 걸로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구매는 선수 활동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품목이라 받을 수 있는 세제 혜택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미스 마일리가 또 끼어들었다.

‘아! 마일리. 왜 이러는 거야? 고 감독이··· 하긴 감독님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아! 세금? 삼 년에 세금 감면이라···’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본전을 뽑을 수 있게 열심히 잘 써먹으면 된다. 120만 불이 비싸긴 하지만 이제 내 연봉도 앞으로 이 년간 최소 70만 불이고 그 이 년이 지나면 이 정도 기계쯤은 몇 개라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오를 것이다.

일단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까 좀 편안해졌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실 생각이에요?”

진지함을 담아 고 감독에게 물었다. 고 감독이 이제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벌써 마음을 들킨 모양이다. 이 양반 이럴 땐 귀신같이 눈치가 빠르다.

“지금 당장 할 일은 구종 개발을 해야지.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었잖아. 우타자에게 밖으로 흐르는 변화구가 있으면 좋다고. 지금 네 구종을 생각해보면 변화하는 방향이 상하우(上下右)야. 여기에 왼쪽으로 가는 것만 하나 더 있으면 그야말로··· 그리고 시즌 중 투구폼이 흐트러졌을 때 교정용으로 쓸 수도 있고···”

정말 그야말로 이상적 답변이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다면 나는 이미 한국 프로 야구 삼 년 차였을 것이다.

‘하아! 또··· 긍정적 생각이 필요해. 이건 무를 수 없는 물건이야.’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지 간에 갈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산 물건을 어디에 설치하실 생각이었어요? 미네소타에 집을 사야 하나요?”

이왕 외상으로 물건도 구입했는데 이 기회에 집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들은 풍월이 좀 있었다. 트윈스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이 꽤 많다. 그들의 미네소타 정착기는 시즌 내내 이루어지는 주된 대화 메뉴 중 하나였다.

‘그래 세인트 폴 교외에 그림 같은 집을 사서··· 대출도 좀 넉넉하게 내고··· 서비스 타임 지나면 한 번에 다 갚으면 되지. 그래 인생 뭐 있어? 지르는 김에 화끈하게···’

“그건 아직 미정입니다. 변수가 좀 있어서··· 조금 기다려 봐야 해요.”

‘헉!'

마일리의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너무나 확연하다.

“저 트레이드되나요?”

“그런 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단 직원의 이런 표현은 ‘너 트레이드 확정이야.’ 이런 말처럼 들린다.

“전에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트레이드시키려고 하는 겁니까? 아직 1년도 안 있었는데··· 그리고 저 이번 시즌 잘했잖아요.”

득실을 계산하기에는 일단 기분이 많이 더럽다.

“저도 확실한 건 몰라요. 다만 어쩌다 최근에 대외비라고 되어 있는 파일에서 So의 이름을 봤어요. 거기 맞바꾸려는 선수의 이름도 있더군요. 그런 정도까지 일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비공식적인 겁니다. 알죠?”

이런 말을 미리 해주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알려지면 본인 커리어에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거··· 이거··· 뭐지?’

인간의 순수한 호의를 무턱대고 믿기에는 내가 겪은 일이 많다.

“대체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죠? 목적이 뭡니까?”

우직하게 패스트볼 승부를 택했다.

마일리가 내 눈을 피한다. 돌아간 그녀의 시선이 고 감독에게 머물렀다. 고 감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련의 일이 마치 만화경의 풍경처럼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의 사고 체계 밖의 일인 것 같다.

“곧 트윈스를 그만둘 생각입니다. 창업을 준비 중이에요.”

비로소 알 것 같다. 이 순진한 아가씨를 고 감독이 부추긴 것이 틀림없다. 원래 고 감독이 그런 짓을 잘한다.

‘감독님. 이건 민폐잖아요.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는 일인데 막 그렇게 하면··· 어?’

아무래도 아까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 같다. 눈에 헛것이 막 보인다.

‘잘못 본 거야.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기분에 따라서 막 변하고 뭐 그런 거잖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마치 고 감독과 마일리의 눈빛이···

“So!"

“악! 깜짝이야.”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베그웰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죽이네. 좀 전에 모션 뜬 거 삼차원으로 구현하는 걸 보고 오는 길인데···”

베그웰의 호들갑에 자연스럽게 마일리와의 대화가 끊어졌다.

‘노크 좀 해라. 당연히 죽여주겠지.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어? 그래? 필요하면 계속 써도 돼. 나 이거 샀어.”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 이 미련곰탱이하고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마이너에서 갓 올라온 날 이모저모로 잘 챙겨준 고마운 친구다. 어차피 트레이드되면 잘 만나기 어렵다. 이왕이면 말이라도 잘해주고 싶다.

“와! 진짜야? 이거 보면서 타격 폼 교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 들던데··· 고마워,”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꿈속에서의 일처럼 느껴진다.

“마침 베그웰 씨도 오셨네요. 말 나온 김에 지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두 분께 요청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 뭐든 하세요. 마일리 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편하게 말씀 주세요.”

정말 사람 좋은 베그웰이다.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 여자 알고 봤더니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었어.’

“지금은 휴가를 냈지만, 곧 트윈스를 그만둘 계획입니다.”

“아이고! 아쉽네요. 트윈스 스카우트 팀, 아니 구단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마일리 씨가 그만둔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유치하게 하냐. 립서비스가 너무 과하잖아.’

정말 베그웰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곧 에이전시를 창업할 예정입니다. 제 고객으로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승낙 여부를 떠나 지금 이 말에 대해서 당분간 비밀을 지켜 주시겠죠?”

‘어? 배그웰이 에이전트가 없었나?’

“비밀이야 당연히 지켜 드릴 거고 그 제안에 대해선 신중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이후 스케줄이 확정되시면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주세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계약이고 뭐고 당장 해줄 것 같더니, 베그웰은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확실히 이런 건 짬밥이 중요한 것 같아. 곧 서비스 타임 끝난다 이거네. 그래 서둘 것 없지.’

“저도 역시···”

“승낙이지.”

어떤 예고도 없이 고 감독이 끼어들었다.

“이건 월권입니다. 감독님은 인스트럭터지 제 보호자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이런 일은 제가 스스로 결정해야···”

“그거 나하고 동업이야. 나는 우린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정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네 자유 의지를 존중할 수밖에 없지. 내가 너 하나만 보고 이 먼 이국 땅을···”

정말 미치겠다. 정말 신파는 싫다.

“하핫. 그런 일은 미리 말씀을 주셨어야죠. 감독님 일이면 당연히 해야죠.”

이러다가 계약서도 안 보여주고 도장 찍으라고 할 판이다. 난 너무도 인간적인··· 관두자. 더러운 경우에 걸린 셈 쳐야겠다.

“배고프지 않아요?”

‘헐!’

이 여자 정말 무섭다. 이 와중에 식욕이 있다니···

“제 고향에 오셨으니 멋진 곳을 안내할게요. 따라만 오세요. 제가 이 동네에서는···”

‘베그웰 이놈의 눈치는···’

이런 곰탱이에게 낄낄빠빠를 이야기 해봐야 내 입만 아플 것 같다.

저녁 식사는 무지 맛있었다. 점심을 대충 간단한 샌드위치로 해결했었고, 실리콘 밸리에서 빠져나가는데 차는 겁나게 밀렸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배가 등가죽에 붙어있었다. 뭘 먹었는지 자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무튼 해산물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쉬려는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호텔에 숙소를 잡고 교외에 훈련장을 하나 빌려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오전에는 투구 시뮬레이션 영상을 참고하면서 새 구종을 시험해보고 오후엔 포스트 시즌 야구를 봤다. 가끔 두잉모션에 들러 새로운 동작을 캡쳐해 다시 시험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었다. 시스템 설치 때까지 이렇게 해주기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최초 목적은 새 구종 장착을 위한 훈련이었지만 그것이 몸에 익어가는 속도보다 감에 의지해 던지던 기존 구종들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는 게 더 빨랐다.

지도 없이 더듬어 미로를 헤쳐 가다가 지도가 생겼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지니까 새로운 구종의 완성도가 쉽게 오르지 않아도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하는 훈련으로 감이 찾아오길 기다렸다면 이제는 능동적으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감을 찾아간다. 쉬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시작한 훈련이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나 때문에 베그웰마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훈련에 동참했다.

“베그웰 미안해. 나 때문에 덩달아 쉬지도 못하고···”

베그웰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고 감독이 볼을 잡아주는 것과 수비로는 메이저리그 정상급인 포수가 공을 받아주는 것을 비교할 수는 없다.

“천만에··· 미스터 고의 도움을 받으면서 느낌이 달라지고 있어. 내년엔 나도···”

고 감독이 도움이 된다니 그건 좋은 일이지만, 고 감독이 타자 베그웰에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모를 일이다.

‘고 감독이 타격을 코치해? 그게 가능하나?’

베그웰의 타격 훈련을 보면 타격 폼 수정이 조금 이루어진 건 알겠는데 거기에 고 감독이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2028시즌 월드 시리즈는 메츠와 레인저스가 맞붙었다.

“디그롬이 있었을 때만 못한 것 같아.”

절대적 에이스는 단기전을 지배한다.

“선수 하나의 힘으로 우승하진 못해. 그때와 뎁스가 틀려. 구단주가 발 벗고 나서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는데 지금쯤 우승할 때가 되긴 했지. 메츠가 이길 거야.”

베그웰은 메츠의 승리를 점친다.

“그런 식이라면 레인저스도 만만치 않잖아. 오히려 투수진은 레인저스가 나아 보이는데···”

내셔널 리그 팀홈런, 팀타율 1위의 팀 메츠와 아메리칸 리그 선발 투수 기준 팀 방어율 1위인 투수력의 팀 레인저스다. 물론 메츠의 투수력도 나쁘진 않지만, 레인저스에 비하면 많이 떨어져 보였다.

며칠간 엎치락뒤치락하는 승부를 보면서 나도 저곳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베그웰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집중했다.

“거봐. 메츠가 이겼지. 히힛 내놔.”

100불을 잃은 다음 날 나와 베그웰이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는 구단의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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