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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37화 (37/200)

37화. 여유를 가지자 (1)

“어딜 가라는 거예요?”

“비행기 표 보냈잖아. 보면 몰라. 그냥 오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긴 따지냐. 시즌도 끝났잖아. 뭐 다른 일 있어?”

한동안 연락이 안 되던 고 감독에게 문자와 함께 비행기 티켓이 왔다. 황당해져 음성 통화를 연결했더니 이제는 받는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도통 대답을 하지 않는다. 오면 알 거라는 말뿐이다. 통화를 끝내고 티켓에 나오는 목적지를 검색해 봤다.

‘노먼 Y. 미네타 산호세 국제공항이라··· 산호세? 실리콘 밸리 있는 거기 맞나? 그건 그렇고 거길 왜 갔지?’

샌프란시스코 부근이다. 거기라면 흘러간 유행가에서만 들어봤지 실제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빡빡하게 살았네.’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때도 운동하기 바빠서 여행이라고는 전지훈련만 가봤다.

이제 시즌이 막 끝났다. 그동안 몸 관리 때문에 못 먹었던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포스트 시즌 경기나 보면서 좀 쉴 생각이었다. 그래 봐야 한 달 남짓이다. 한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휴가가 필요했다. 고 감독이 하필이면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베그웰 집에서 야구 중계나 보며 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수천 킬로 떨어진 곳에 하루 이틀 있으라고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

‘에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즉흥적으로 일 벌이는 건 어째 달라지지가 않아. 할 수 없지. 휴가라고 생각하고 거기 가서 좀 쉬다 오는 걸로. 벌써부터 훈련을 시키려는 건 아닐 거야.’

투덜거리면서 베그웰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 설명을 했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어차피 조금 쉬다가 집에 다녀오려고 했어. 거기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막 시즌 끝났으니 좀 쉬기는 해야 할 거잖아. 그 동네에서 같이 놀러 다니자.‘

뜻밖에 베그웰이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 풀렸다.

이제 MLB 최저 연봉은 받는다. 메이저리그의 최저 연봉은 1967년 6천 불에서 1985년 그 열 배가 늘어난 6만 불이 되고. 2022년 70만 불로 상승했다.

난 올봄까지만 해도 통장 잔고를 걱정했었다. 그때에서 불과 몇 개월 지났을 뿐인데, 그런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캘리포니아에서 휴가 즐길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작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지금쯤 연봉 3천만 원 받으면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과연 내 인생의 사이클은 변화무쌍하다.

비행기는 2천 마일을 날아서 샌프란시스코 인근 산호세에 무사히 도착했다. 원정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공항에는 고 감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 왔냐.”

꽤 오랜만인데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인사를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 그렇거니 했다.

“아! 예. 베그웰도 같이 왔어요.”

고 감독과 베그웰은 훈련장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거 뭐야? 스타일이···’

우습지도 않게 라이방이라고 부르는 선글라스는 여전했지만, 차림새가 심상치 않았다. 바랜 듯 알록달록한 색상, 넉넉한 실루엣, 아무렇게 겹쳐 입은 것 같지만 묘하게 세련되어 보이는 레이어드.

문화 충격을 받았다. 고 감독은 운동선수 출신답게 추리닝을 평상복처럼 입고 다니던 한국의 보통 아저씨였다. 바로 얼마 전 미네소타에서 호텔 생활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 본 지가 한 삼 주 정도 되었는데···’

아무리 히피 문화의 본산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머물러 있었다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긴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일단 나가자고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린다.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황당했지만 일단 그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갔다. 베그웰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다.

‘헉! 이게 무슨 일···’

짙은 청색의 대형 밴을 몰고 나타난 건 미스 마일리였다.

“저기 어디로 가는 건가요? 마일리는 왜 여기 있는 거죠? 구단에서 저 모르게 무슨 일을 시킨 건가요?”

마일리가 운전하고 고 감독이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다.

뒤편 넓은 좌석은 편안했지만, 마음이 묘하게 불편하다. 베그웰도 이제야 뭔가 어색한지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일단 구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고 우리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두잉모션 시스템이라는 곳으로 가는 거야. 왜 컨디션 안 좋아?”

고 감독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모션? 혹시 거기가 모션 캡쳐 연구하는 곳인가요?”

“오! 좀 들어본 모양이구나.”

모션 캡쳐 기술은 스포츠계 전반에 상당히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육안이나 일반 영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동작들을 세밀하게 캡쳐해서 주로 자세 교정을 통한 기술 향상과 부상 방지 등의 목적에 쓰이고 있다.

“요즘 그 정도야 상식이죠.”

늘어지는 호텔 생활이 지루해져서 도망치듯 놀러 간 줄 알았는데 나름 성의 있게 시즌 후 이런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니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라이방 아저씨가 생각하기엔 너무 최신 기술인데 분명히 마일리가··· 그런데 구단 직원이 왜 이런 일까지 하지? 구단이 시킨··· 아! 아니라고 했었지. 그럼 개인적인 관심? 음··· 운동하기도 바쁜데 그런 건 좀···’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내가 정신적 여유가 없다.

‘서비스 타임이라도 끝나야···’

“나도 말로만 듣고 직접 본 일은 없었는데 재미있겠네. 미스터 고. 나도 한번 해봐도 될까요?”

베그웰이 모션 캡쳐란 말에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자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럼 가능하지. 자네도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구만.”

“제가 대학을 갔으면 아마 그런 분야를 공부했을 겁니다. 그런 기술의 가치는···”

누구나 희망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난 베그웰이 펜 잡고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의 손에 어울리는 건 펜처럼 작고 앙증맞은 물건이 아니다. 혹시 중세에 태어났다면 바스타드 같은 양손 검, 지금은 배트가 딱 어울린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고 감독과 베그웰이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대화하는 사이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큰 규모인데 전혀 회사처럼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스포츠에 특화된 캡쳐 장비를 개발하는 곳이라고 한다. 미리 연락을 해 놓았는지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실내에 마운드와 타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기다림 없이 넓은 통로처럼 만들어진 카메라가 엄청나게 많은 공간에서 초록색 유니폼을 걸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상상했던 대로 몸에 센서를 부착하고, 이것저것 하라는 대로 정지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움직였다. 심지어 야구공을 던지기도 했다. 거기에도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다 끝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그웰이 나섰다.

‘어쩌겠어. 하고 싶다는데 해야지. 오전에 도착하게끔 티켓을 끊은 것이 다 이유가 있었구나. 역시 마일리 씨가 일을 잘해.’

고 감독이 이런 빈틈없는 준비를 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인스트럭터로서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잘해줘서 매우 감사함을 느낀다. 돈 쓰는 보람이 있다. 외상이라 더 좋다.

‘그나저나 여긴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미네소타에서는 동양인을 보기 어려웠다. 흑인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히스패닉도 거의 없다. 미네소타는 백인계 인구가 거의 90%에 육박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류는 북유럽계라고 한다.

‘미스 마일리가 그 대표적인 음. 흠.’

내가 영화는 좀 봤다. 머리 비우고 볼 수 있는 액션물을 선호했지만 어떨 때는 결말이 너무 뻔히 보여 재미가 적었다. 그럴 땐 고전 영화를 봤다.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이런 고전이라 부를 수 있는 영화가 최애 영화다. 나는 아주 정서적인 남자다.

‘특히 잉그리드 버그만이··· 음. 뭐 그렇다구,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기 좋더라 그거지.’

산호세에 와서 들러본 곳은 이곳뿐이지만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 중 셋에 하나는 동양인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베그웰이 모션 캡쳐를 하는 동안 어떤 회의실 같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거기서 이 회사의 개발을 담당한다는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메이저리거의 방문은 잘 없는 모양이었다. 나 같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선수를 이렇게 반겨주는 걸 보면.

‘부담스러운데··· 뭘 인사까지··· 신생 회사인가? 메이저리거가 실제로 이용해주면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되는 건가? 그럼 해줘야지. 다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인데···’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별문제 없이 면담을 끝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묘하다.

‘앞으로도 잘 이용 바란다고? 이거 뭐지? 내가 해석을 잘못한 건가?’

이런 미묘한 표현은 아직 잘 이해를 못하겠다.

“저기 감독님. 모션 캡쳐를 활용하는 것에는 찬성하는데요. 너무 머네요. 잘 알아보고 회사를 선택하셨겠지만, 미네소타에서 계속 오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비시즌에 훈련하기에도 이곳 날씨가 애매하잖아요. 우리도 플로리다로 가야죠. 아무래도 선수 많은 곳이 시설도···”

고 감독이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이럴 때마다···

“아! 또 뭐예요? 화 안 낼 테니까 빨리 이야기해줘요.”

“%$%^^%$···”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점점 더 불안해진다.

“좀 차근차근 천천히 말해주세요.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다고···”

“장비를 샀어.”

‘어!’

단순히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비싸 보였는데··· 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샀다는 거지? 도대체 뭘 산 거야?’

“그냥 시원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저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필요한 장비라면 비싸더라도 사야겠죠. 이제 메이저로 올라와서 돈에 상당히 여유가 생겼잖아요.”

살살 달래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말은 길었지만, 내용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시스템 전체를 구매했다고 한다.

‘음. 그럴 수 있지. 좀 비싸더라도 쓸모가 있겠지. 그럼 이제 메이저리거인데··· 장비빨도 좀 받아야지.’

그리고 고 감독이 이렇게 겸연쩍어하는데 모양새 좋게 넘어가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얼마 주셨어요?”

“백이십···”

“······”

갑자기 멍해졌다.

“백이십만 불. 이거 싼 거야. 투구 분석에 특화된 맞춤형 시스템으로 운용 인원도 많이 필요하지 않고···”

“하아! 그냥 무르죠. 엄밀히 말하면 제가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아니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안 난다.

“그건 안 돼요. 인스트럭터 계약에 선수 훈련 장비의 구매는 미스터 고에게 일임한다는 조항이 있었죠. 그래서 구매 계약에 대한 효력은···”

이제까지 별말 없던 마일리에게 일격을 맞았다. 이 여자도 한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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