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36화 (36/200)

36화.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진 않는다

‘세상 참 재미있게 돌아가네.’

진수 형과의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오늘 있었던 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살짝 망설임이 있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야구 커뮤니티에서 내 문제로 큰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떤 너튜브 방송이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는데, 최초에는 작은 흥밋거리 정도이다가 갑자기 세대 간 대결 비슷한 구도가 잡히더니 큰 논쟁으로 번졌다고.

구체적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큰 논쟁이든 작은 이야깃거리든 그들의 흥밋거리는 내 인생이었다. 그들의 여흥에는 배려가 빠져 있었다.

‘배틀? 밈? 다 좋지.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비틀린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아.’

그들이 자신의 삶을 걸고 논쟁을 벌인다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이타적인 생물이 아닐뿐더러 현실의 제약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현실의 존재가 아닌 책 속에만 있다.

대중이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즐기는 도락의 대상이 내게는 삶이다. 그 장단에 맞춰 춤춰 줄 마음은 없다. 나는 배제나 옹호의 대상이 아닌, 그냥 나일 뿐이다.

‘비방, 저주할 테면 하라지. 옹호 그런 것도 필요 없다고,’

야구 선수 소영수에 대한 관심은 프로 선수로 활동하는 이상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내 삶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대중은 염치를 모른다. 가면 뒤로 얼굴과 함께 부끄러움을 숨겨버렸다.

생각이 거듭될수록 극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에고, 이러다 제 혈압 올라 넘어갈 것 같네. 무시하면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게는 더 급한 일이 있다. 이번 시즌에 드러난 내 약점에 대한 보완이 필요했다. 시즌의 종착역이 가까워진 지금, 나를 제외시키고 대중이 떠들어 대는 나의 삶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고 여유도 없다.

‘요즘 감이 조금 오는 것 같은데···’

포스트 시즌을 치를 일도 없고 첫 시즌의 끝이 코 앞이다.

‘겨울을 잘 보내기만 하면 다음 시즌에는 마무리를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다들 하는 이야기로 안드레는 재계약이 어렵다고 하던데 그럼···’

내 의지는 미래를 향해 있다. 과거에 매달리는 대중에게 줄 관심 따위 남아 있지 않다.

“스트라익.”

‘아! 아쉽네. 딱 몇 게임만 더 등판하면 좋겠는데···’

시즌이 끝나려면 아직 세 게임이 더 남아 있지만, 오늘이 이번 시즌의 마지막 등판이란 말을 감독에게 들었다.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선수들에게 경기 출장 기회를 주겠다나 뭐래나.

홈경기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몇 게임 전부터 패스트볼의 사용 빈도를 줄이는 새로운 투구 패턴을 실험 중이었는데 감이 올 듯 말 듯 한다.

요즘 들어 타자들의 타격 타이밍을 알 것 같은 느낌이 오고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승부를 조금씩 의도적으로 줄이고 있다.

투구 수에 부담이 없는 불펜 투수라고 알게 모르게 빠른 볼의 사용이 많아졌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굳이 그렇게 던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느리게 더 느리게 던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 게임 걸쳐 그렇게 던졌더니 삼진은 줄고 땅볼이 늘어났다. 아직 표본이 적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던져도 딱히 피홈런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던져도 결과가 비슷하다면 세게 던지는 것보다 이 편이 낫지.’

다만 삼진이 줄어든 걸 코칭 스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투수가 가장 확실하게 아웃 카운터를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이 삼진이다. 땅볼의 경우 변수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 지금처럼.

딱-

2루수가 몸을 날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마이너에서 확장 로스터로 올라와 뭔가를 보여야겠다는 의욕은 넘치는데 아직 2% 부족하다. 내 입장에서 수비는 모험보다 안정적인 부분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패턴은 내년에 우리 내야진을 보고 써야 하는 건가? 흐흣. 이제 나도 제법 컸네. 이런 실험을 해볼 여유도 생기고···’

마이너 강등에 대한 불안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감히 시도해 보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걸 걱정할 정도는 넘어섰다.

올 시즌 같이 팀 성적에 대한 부담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생각만 해오던 것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있다. 개인 지표가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는데 별다른 변동은 없었다.

아웃코스 존에 들어가는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비슷한 코스에 더 느리고 더 떨어지는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한다.

‘하나 더 빼고···’

이제 인코스 존 아래로 떨어트리면···

틱-

둔탁한 소리. 생각대로 되었다. 다시 땅볼이다.

‘2루수가 잡아 가볍게 더블··· 이 아니라 펌블(fumble, 더듬다) 해버렸네.’

그나마 후속 동작이 제대로 이루어져 타자 주자는 1루에서 잡았다.

‘하! 이거 이러면 안 되지. 테스트가 제대로 안 되잖아.’

실수에 당황하지 않고 좋은 후속 동작이 이루어진 것은 칭찬해 주고 싶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된다. 그걸로는 어렵다. 다음 시즌엔 2루수를 보강해야 할 것 같다. 저 친구로는 많이 불안하다.

‘구관이 명관이었네. 빳따질이 좀 문제라서 그렇지. 수비는 그럭저럭 괜찮았었는데···’

많이 짜증스럽지만 일은 벌어졌고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내가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면 저 신참은 더 흔들리게 된다. 이럴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차라리 웃는 게 낫다. 마음과 다른 짓을 하려니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주자 없는 투 아웃이 될 수 있었는데···’

타이거스의 2번 타자 에릭 카펜저. 그는 현재 아메리칸 리그 수위 타자 타이틀 경쟁 중이다. 지금 1위와 큰 차이가 없이 타율 2위다. 타격 의지가 불타고 있을 게 뻔하다. 그는 홈런도 20개 정도를 쳤다. 주자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나버렸다.

‘거를 수는 없어. 바로 상위 타선으로 이어지는데 거기다 대고 주자를 쌓는다는 건···’

일단 견제구를 하나 던져 생각할 시간을 좀 벌었다.

그는 극단적 Pull-hitting(당겨치기)를 하는 선수다. 히팅 포인트를 앞쪽에 두고 이루어지는 스윙을 그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면 백스윙에 이은 임팩트 후 팔로스로우까지 배트를 완전히 돌리기가 용이하다. 즉 풀스윙이 자연스럽게 된다.

‘이 말은 타구가 힘을 받는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수위 타자를 다툴만한 정확성에 홈런이 20개? 이건 좀 적지 않나?’

절대다수의 홈런은 당겨치기에서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거야 대부분 그렇게 치니까 그렇지.’

만약 리그의 모든 타자가 밀어치기만 한다면 모든 홈런이 밀어치기에서 나온다라고 결론짓는 것이 맞는 것일까?

당겨치기와 어퍼 스윙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대세다. 앞에 선 타자만 하더라도 그는 올 전체 타구의 42%를 당겨쳤다. 밀어친 타구는 15%밖에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파워 히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눈에 봐도 작아 보이는 체형이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단적 당겨치기로 보강했다.

수비 시프트가 일반화된 지금 타격 방법이 한쪽으로 편중된 수비를 피해 타구를 보낸다는 생각보다 타구에 힘을 실어 시프트를 넘기거나 뚫을 수 있는 더 빠른 타구를 만들어내겠다는 쪽으로 진화해 버렸다.

이제는 타성적으로 사인대로만 던지지는 않는다. 타자 분석 리포트를 보고 나름대로 분석도 한다. 마운드 위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다.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

물론 사인 거부는 안 한다. 아직 벤치의 의견에 맞서는 그런 짓까지 할 때가 아니다. 사인 대로 던지기 싫으면 고개 젓지 않고 비슷한 코스로 좀 빠지게 던지면 된다. 그럼 베그웰이 알아서 잘 잡아준다. 맞서지 않고 조금 비키면 된다.

배트가 끌려 나왔다. 타자도 내 투구 통계를 본 것 같다. 내 하이 패스트볼은 약 70% 확률로 존을 통과했었다. 이 경기 전까지는···

‘이제 마무리를···’

이 타자는 맞춰 잡기를 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타자다. 전력투구가 필요하다.

‘업슛을···’

‘악!’

타자가 스윙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높은 타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구안이 좋고 컨택 능력이 좋아야 한다. 어떨 땐 이런 타자가 더 편했다. 높은 하이 패스트볼에 이은 같은 코스 조금 더 낮은 궤도처럼 보이는 업슛에 스윙하지 않는 타자는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이 패턴을 가져가면 열이면 열 모두 스윙을 한다. 유능한 타자일수록 루킹 삼진(Looking Strike Out)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럴 능력이 안 되는 타자에게는 이 패턴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읽혔나?’

우연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정교한 타자다. 이런 타자에게 그런 우연함이 일어날 확률은 백에 하나도 안 된다.

‘쿠세가 있었나? 2루 주자가 사인을 훔친 건가?’

별생각이 다 든다. 다시 2루 견제.

이 필승 패턴이 안 먹히면 던질 게 없다. 이런 우타자를 상대로 가장 좋은 건 아웃코스를 스쳐 빠져나가는 변화구로 유인하는 게 딱인데 지금 나에게 없는 능력이다.

‘시즌 끝나면 어떻게 해서든 슬라이더를 추가해야겠어.’

지금 당장이 문제다. 등허리가 축축해진다. 1볼 2스트라이크. 볼 카운트에 여유는 있다.

느리게 더 느리게.

각이 큰 싱커를 두 개를 연속으로 던졌다. 존에서 떨어트려 유인해 보려고 했지만, 타자의 배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볼 카운트만 몰렸다. 풀 카운트 승부는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다.

원정 관중석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 점 뒤진 7회. 지금이 승부처임을 관중들도 느끼나 보다. 코메리카 파크의 외야는 광활하다. 하지만 좌측 펜스가 낮다. 우타자의 홈런 비율이 높은 곳이다. 파크 팩터는 중립에 가깝다. 홈런보다는 2루타, 3루타가 잘 나오는 구장이다.

‘그거나 그거나··· 맞으면 안 돼.’

인코스. 존에 딱 달라붙는 패스트볼을 던졌다. 주심에 따라서는 볼로 선언될 수 있는 공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승부를 위해 공 두 개를 목적구 삼아 버렸다.

딱-

꿈쩍거리지 않던 배트가 드디어 나온다. 날카로운 타구음이 뒤따랐다.

“윽!”

순간적으로 자제하지 못한 비명이 튀어 나온다.

잡혔다. 잡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유격수가 수비 위치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의 글로브로 공이 들어갔다.

‘흐흐흣. 그래 이게 야구지. 불확실의 세계.’

기분이 끝내준다. 날아갈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타자에게 적시 2루타를 맞고 1실점 했다.

‘아! 지랄··· 설레발은··· 어휴!’

야구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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