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갈증을 느끼다
“스트라익.”
항상 칼날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경기가 되풀이될수록 자신감의 상승보다는 두려움이 많아졌다.
벌써 9월인데 빅리그 정착에는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다. 내 보직은 스윙맨(Swingman)이다. 용어집 같은 곳에 찾아보면 전천후로 뛰며 불펜의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투수. 대충 이렇게 나온다. 원래 스윙맨이라는 게 두 가지 이상의 포지션을 겸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름은 그럴듯해도 내용은 마당쇠지. 이것저것 다 하는···’
현재까지 내 성적은 외견상 상당히 괜찮다. 2패 8홀드 ERA 2.45 피안타율이 0.175, K/9(9이닝당 삼진)은 16.4개나 된다. 아웃카운트의 거의 삼 분의 이를 삼진으로 잡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못해도 8회를 책임지는 프라이머리 셋업맨 아니면 마무리를 맡아야 할 성적이다.
문제는 피홈런이 많다. 나는 시시하게 단타 따위는 상대 안 한다. 삼진과 홈런. 나의 빛과 어둠이다. 내가 맞은 안타의 상당수는 홈런이다.
이제 모든 팀이 내 분석을 끝낸 것 같았다. 일단 높은 건 거의 치지 않는다. 주로 떨어지는 싱커를 노려 풀스윙으로 공략한다. 대부분은 헛스윙으로 삼진이지만, 일단 걸리면 웬만하면 넘어가더라. 느리다는 약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작년 피홈런 1위 투수가 180이닝 던지고 40개 정도 맞았다고 하는데 9이닝으로 환산하면 경기당 두 개 정도 맞은 셈이다. 나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선발과 불펜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내가 9이닝 환산 피홈런이 선발보다 많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스윙맨이다. 아주 XX 훌륭한 스윙맨.
그렇다고 팀이 나를 막 굴리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배려는 받는다. 주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나서고 어떤 경우에도 타선이 한 바퀴 돌기 전에 등판을 끝낸다. 보통은 2이닝이다.
코칭 스탭들은 계산이 나오는 훌륭한 스윙맨이라는데 자꾸 들으니까 욕 같이 들린다. 내가 그 정도에 만족하려고 메이저리그에 온 건 아니다.
이삼 개월 맞다 보니 나도 악이 받쳤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싱커를 던진다. 마무리는 홈런을 맞으면 대개 블론이지만, 스윙맨은 맞아봐야 그냥 1점이다. 그것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마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치라고··· 맞아봐야···’
타악-
‘어휴! 치란다고 진짜 치면 어떻게 해.’
훨훨 잘도 날아간다.
XX 무섭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건 무뎌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 번 피하게 되면 계속 피하게 될 것 같아 그게 더 두렵다. 그래서 오늘도 난 정면 승부를 한다.
6회 1사 2루에 나가서 7회까지 1과 2/3 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냈다. 보더 시리즈(Border Series)라고 부르는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지역 라이벌전이다. 홈 경기는 이미 1승 1패로 끝냈고 지금은 원정을 왔다.
“수고했어.”
베그웰이 생수병을 들고 반겨준다. 보통은 내가 등판하면 포수를 베그웰로 바꿔주는데 오늘은 점수 차가 크지 않아서 그랬는지 베그웰을 출장시키지 않았다.
주전 포수의 타율도 2할 4푼대라서 베그웰이 조금만 분발하면 주전을 꿰찰 수 있을 거 같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 걸 티 낼만큼 멍청하진 않다. 다른 건 모르겠고 포구 능력은 베그웰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고마워. 이젠 내셔널 리그 팀까지 똑같이 하네. 이젠 밑천 다 털렸나 봐.”
자폭 개그랍시고 했는데 별로 웃기지가 않다.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벤치가 오고 가는 선수들로 복잡해 보여도 시즌이 지속되다 보면 은연중 자기 자리가 정해지게 된다. 이젠 내 자리도 있다.
“무슨 이야기야. 저것들 순전히 운발이지. 타자가 공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치더라. 잊어버려.”
나를 위로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말이다.
‘하! 대충 쳐도 넘길 수 있다 이건가? 왜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아무래도 내가 홈런 맞고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네.’
이런 식으로 시즌 마치면 정신과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경기를 포함해서 이제 딱 45경기가 남았는데 50승 67패로 간신히 승률 4할을 넘기고 있다. 폭망한 시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간신히 아메리칸 리그 중부 지역 4위다. 꼴찌만 면했다.
“이대로 시즌을 끝낼 모양이지?”
“감독 이야기하는 거야? 지금 잘하고 있잖아. 13연패 당한 걸 빼면 5할 승률을 맞추고 있잖아. 리빌딩 팀에서 그 정도면 훌륭한 거지.”
그러고 보면 팀은 망했지만, 임시 감독으로서는 괜찮은 시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즌 끝나고 대행 딱지를 뗄 수 있을지도···
“한동안 인기폭발이라고 말들 많더니 잘 지나갔네.”
트레이드 이야기인 것 같다. 조금 된 일인데 트레이드 마감 시한이 지나서도 계속 여러 팀의 문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고 감독을 통해 들었다. 숙소가 같은 호텔이다 보니 홈 경기 때는 자주 만난다. 원정 때도 거의 매일 통화는 하는 편이고.
“설마 트레이드시켰겠어? 첫해 이 정도 성적이면 가능성은 보인 거잖아. 내년에 더 잘할 수도 있고··· 연봉 부담도 없잖아. 묵혀두면 더 비싸질지도 모르는데···”
트레이드 기간은 정해져 있지만, 웨이버 공시 등 편법을 동원하면 1년 내내 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8월 31일 이후 트레이드된 선수는 포스트 시즌에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계속 문의가 이어졌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내심 상당히 흐뭇해했었다. 이건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포스트 시즌에서 써 볼만한 카드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내 가치가 시장에서 그렇게 평가받는다는데 기분 나쁠 리가 있겠어?’
말을 전해준 고 감독도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었고 내 생각에도 리빌딩 팀에서 나를 트레이드시킬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고 감독이 마일리에게도 물어봤다고 하는데 그 건이 이번 시즌에 프런트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었단다.
“곧 FA가 되는 선수도 있는데 나를 트레이드시켜?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었지. 프런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림없는 일이야.”
나는 트윈스가 좋았다. 내가 바닥일 때 나를 유일하게 인정해 메이저리그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준 팀이다.
“그래도 모르지. 포스트 시즌이 아니라 좀 더 길게 생각하는 구단에선 트레이드를 계속 추진하려고 할 수도 있어. 워낙 즉흥적으로 결정되기도 하는 거라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 게 좋아. 갑자기 일 당하면 사람이 맛이 간다고.”
말하는 게 꼭 그래 봤던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베그웰은 홈보이 아니었어?”
“나? 내가 어디로 봐서 중부 지역 촌사람처럼 보이냐.”
아닌가 보다. 하긴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해본 적이 없었다.
“드래프트 순위가 어떻게 돼?”
물어 놓고 아차 했다. 베그웰이 움찔한다. 좀 친해졌다고 해도 어쩌면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높으면 높아서 낮으면 낮아서 말하기가 굉장히 곤란할 것 같다. 지금 처지와 연결시키면 자존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핫. 이 지역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어디 출신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척 말을 돌렸다. 입이 방정이다. 말조심해야지. 이건 누구에게는 역린일 수도 있다.
“말투 들어보면 몰라?”
지금 말투가 퉁명스러운 건 알겠다.
“외국인이 억양으로 출신 지역을 아는 건 무리지. 나 그 정도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잖아.”
이럴 땐 미국인이 아닌 게 편리하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아니, 내 경험으로 유추해보면 죄의 유무는 그것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던데···’
“자이언츠에게 지명받았어. 1라운드 6순위였지.”
‘헉! 1라운드였어? 어쩐지 우물우물하는 게 높을 거 같더라니···’
“그랬었군. 그럼 언제 트윈스로 온 거야?”
1라운더로 선택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게 신중하게 뽑은 선수를 트레이드시키는 건 더 쉽지 않다. 그건 프런트가 실수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일어나는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다니 베그웰도 어지간히 사연이 많을 것 같다.
“혹시 역대 1라운드로 뽑힌 선수 중에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한 게 몇 명인지 알고 있어?”
모른다.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적은 숫자일 거 같은데 그런 통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들어본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역대 1라운더 중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가 단 한 명뿐이라는 거다. 켄 그리피 주니어가 유일한 사례다.
“글쎄··· 몇 명인데?”
“세 명. 흐흣 한때 내가 네 번째가 되는 게 아닐까 고민 많이 했었지.”
적어도 너무 적다. 1년에 30명씩인데 역대 세 명밖에 안 된다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확실히 이 동네 스카우터들이 눈이 좋아.’
“난 이름도 알아. 1966년 메츠에 지명된 고졸 포수 스티브 칠튼,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에 지명된 레지 잭슨, 2013년 애스트로스에 지명된 마크 어펠이야.”
무심한 듯 말했지만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이런 건 웬만한 전문가들도 잘 모르지. 내가 왜 알 거 같아?”
그의 말 속에 답이 있는 것 같아 짐작이 가긴 하는데 그걸 먼저 말하는 실수를 할 수는 없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칠튼과 계속 비교 대상이 되었거든. 출신지도 캘리포니아로 같고 고졸에 포지션도 같고··· 아무튼 그랬어.”
그 비교가 좋은 쪽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1라운드 지명받고 400만 불을 받았어. 세상이 다 내 것 같더군. 내 롤모델이 포지였는데 자이언츠라니··· 영원히 그곳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공하고 싶었지.”
‘좀 잘하지.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 하면 뭐 하냐. 그랬으면 그때 잘했었어야지. 하긴 나도 그때 잘했었다면··· 음.’
“루키 리그는 가볍게 통과했지. 문제는 로우 싱글과 하이 싱글에서 발생했어. 거기서 5년을 보냈어. 그쯤 되니까 자이언츠에서 포기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AA로 올려 주더라구. 손을 놓아서 그런 건 줄도 모르고 난 희망에 들떠서··· 그러다 별안간 2:2 트레이드로 트윈스에 왔어. 트레이드를 위한 승급이었던 거지. 뭐 그런 이야기야.”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 느끼는 그 착잡함이 무엇인지 나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래도 트레이드되어서 잘 풀린 거잖아. 메이저리거도 되었고.”
“다 운이야. 그때 트윈스 포수 자원이 엉망이었지. 알다시피 난 반쪽짜리잖아. 넌 AA에서 바로 올라와서 잘 모르겠지만 AAA에 2라운드 출신 홈보이 포수가 하나 있어. 아마 곧 올라올 거야. 그럼 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애매하긴 하다. 이렇다 할 커리어를 못 쌓았는데 그는 이번 시즌에 서비스 타임이 끝난다.
‘애매한 게 아니라 폭망의 시작일지도···’
“주목받을 때 잘해. 내 꼴 나지 말고··· 이런 말 안 해도 넌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 동네도 참 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