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입지를 다지다
고 감독은 말을 하다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의 침묵이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을 떠다녔다.
『“오늘 트윈스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를 위한··· 내일 경기의 라인업은···”』
TV에서는 여전히 아나운서의 어지러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공기가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언제는 정면 승부를 하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그걸로 홈런 맞았다고 뭐라 하시면···”
침묵이 불편해서 아무렇게 말을 해봐도 고 감독은 반응 없이 그냥 내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알았어요. 오늘 명백한 제 실수 맞아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항복했다. 쓸데없이 이런 장면으로 힘 빼기 싫었다.
“뭘 실수했는데?”
“경솔하게 볼 배합을 하면서 빠르지도 않은 패스트볼을 남용하고···”
“그거 니가 했냐?”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예?”
“니가 볼 배합 사인을 직접 했냐고?”
그렇지는 않았다. 포수에게 사인을 받았고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벤치가 직접 사인을 냈을 것이다.
“그래도 제가 동의했잖아요. 그럼 제가 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게 의미가 있냐? 지금 니가 말하는 게 홈런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볼 배합이라는 과정을 해석하는 거잖아. 결과가 나빴으니 과정이 좋을 수 없다라고 억지로 결론에 대해 풀이 과정을 맞추는데 그게 정확할 수 있겠냐?”
그건 그렇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 장면에서 좀 더 느린 싱커를 던졌다 이런 건 가정 할 수 없다. 결과가 없는데 과정이 있을 수 없고 때문에 해답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 이런 부분 때문에 볼 배합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런 부분은 시간이 쌓여서 경험이 생기면 자연히 해결될 거야. 자기 볼에 확신이 생기면 그것대로 좋고 아니라도 능동적으로 피해갈 수 방법을 찾아내겠지. 그래서 지금 걱정해야 하는 문제는 과연 네게 그런 경험이 쌓일 시간이 주어질까? 이거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말이다. 지금 빅리그에 안착하지 못하면 마이너에서 킹왕짱 다 먹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 안착이라는 걸 하려고 이렇게 감독님을 찾아와서 묻는 거잖아요. 잘하고 싶어서···”
빨리 보완책을 제시하면 될 걸 이 양반이 잘 나가다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지 모르겠다. 분석 잘하더니 왜 답을 안 주는지 답답하다.
‘해답을 내세요, 그게 인스트럭터의 일이잖아. 나는 고용주이고.’
“너 메이저에 올라와서 던지면 홈런 하나도 안 맞을 줄 알았니?”
“예?”
“투수가 안타, 홈런 맞는 게 정상적인 거야. 너무 많이 맞으면 문제지만 맞는 게 당연한 거지.”
통상적으로 그렇긴 하다.
“그래서 그런 게 없는 상황을 퍼펙트니 노히트노런이니 해서 특별하게 취급하는 거잖아.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몰라. 오늘 너에게 실투가 있었는지 모르겠고 홈런이 된 타구가 왜 홈런이 되었는지도 몰라. 발사각이 어쩌고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야. 분석이란 그런 거지. 엉겁결에 타자가 몸이 반응한 대로 타격했더니 홈런이 나왔을 수도 있고 노렸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본인 외에 아무도 몰라.”
정말 어이없는 일이 자주 생긴다. 오늘 벌써 두 번째다.
‘그럼 이때까지 날 놀리려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다는 거야 뭐야. 이게 말이 돼?’
원래 사람 괴롭히는 데 취미가 있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너무 심하다.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너무해? 정확한 건 너도 모르고 나도 몰라. 그럼 누군들 알겠니? 그런데 넌 통상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홈런 하나 맞았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이러쿵저러쿵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어. 여기서 뭐가 제일 잘못된 거 같으니?”
이상한 곳으로 말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껏 해왔던 생각이 멈춰진다. 새로운 방향이 보인다.
“아··· 예. 그렇군요.”
이래서 고 감독을 싫어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에게는 길이며 빛이다. 비룡이가 항상 이야기하던 무용(無用)의 도(道)와 뭔가 닮아있다. 쓸모없어 보이는데 가끔씩 내게 깨달음을 준다.
“넌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 요즘은 그게 누구인지 좀 애매하긴 하다만 어쨌든 넌 아니야.”
되게 단순한데 심오함이 느껴지는 말이다.
“지금은 뭘 바꾸고 어쩌고 할 때가 아니야. 그냥 부딪쳐. 볼 배합에 대한 건 벤치에서 고민하게 내버려둬. 널 어떻게 활용할지도 벤치의 일이지.”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면 전 그냥 이대로 던지면 되는 건가요?”
고 감독이 눈을 흘긴다. 저건 가당찮다라는 뜻이다. 그 정도는 안다. 왜냐하면 우린 눈빛으로도 통하는 사이니까.
“네가 할 일? 쫄지 마! 이 볼이 맞아 나가면 어쩌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니 손발을 스스로 묶는 꼴이 되는 거야. 네 선택이 제한되면 상대의 선택 범위가 줄어들지. 타자의 노림수가 더 잘 통하게 돼. 이건 간단한 산수잖아.”
타자에게 저놈은 이런 순간에 빠른 볼 승부를 피하더라 이런 데이터가 생기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빠른 볼이면 어떻고 싱커면 어때. 홈런? 나오겠지. 안타? 더 많이 맞을 거고.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래도 너무 많이 맞으면···”
“그럼 짐 싸야지 기본적인 능력이 빅리그에서 안 통하는데 어떻게 여기서 선수 생활을 하겠어? 그럼 일찍 접고 미국에서 공부나 해. 한국 리그로 갈 수는 없지 않겠니. 아니 어쩌면 일본은 가능하려나?”
마지막 말은 안 들은 걸로 하련다. 난 꼭 메이저 리그에서 성공할 거니까.
『“아! 속보가 들어왔네요. 트윈스가 마우어 감독을 해임했습니다. 새로운 리더쉽을···”』
느닷없이 귀에 들어온 TV에서 보도하는 내용에 넋이 나갈 것 같다.
“위태위태하더니 결국 그렇게 됐네. 넌 신경 안 써도 돼. 우리에겐 갑자기지만 프론트에서는 다 미리 계획이 있었을 거다. 대개 이런 경우는···”
고 감독이 뭐라고 하는 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드라마틱한 날이다.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가지고, 호투를 하고 관중들의 환호를 받다가 끝내기 홈런을 맞고 져버렸다. 메이저리그 첫 출발을 패배의 기록으로 시작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진 게임의 결과로 감독이 해임되었다.
‘롤러코스터는 이제 그만 탔으면 좋겠어. 이런 건 이만 끝내자구. 평범하고 무난하게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언제나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변화라니··· 정말 이젠 팔자소관이려니 해야 할 것 같다. 어디에 기원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수석이었던 투수 코치가 임시 감독 대행이 되었다. 팀 사정이 어지러워졌다고 경기 일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이트삭스와의 4차전은 치러지고 있다.
“이렇게 갑자기 감독을 바꿔도 되는 거야? 계약 기간이 많이 남지 않았나?”
내가 이런 일을 물어볼 만한 사람은 아직은 베그웰뿐이다. 그는 풀타임으로 세 시즌 정도를 이 팀에서 보냈으니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는 든든한 도우미였다.
“계약은 올해까지였어. 나도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바뀔 줄이야 몰랐지. 프런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도 이번 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변화가 나에게 꼭 나쁜 것 같지는 않다. 투수 코치, 아니 새로운 감독은 이 와중에 날 불러 지금부터 3일간 쉬라고 말해줬다. 전임 감독 때는 없던 일이었다. 갑자기 뭔가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 상당히 기분이 괜찮았다.
“계획된 일이 아니었을 거야. 프런트에서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새로운 감독을 준비해 놓았겠지. 이렇게 임시 처방으로 감독 대행을 세우진 않아. 요한슨 단장은 기분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야.”
주장인 크리스 아저씨다. 뒤쪽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바로 뒤에 와 있었다. 아저씨라고 불러 미안하긴 한데 여기가 아무리 아메리카지만 나하고 10살도 넘게 차이 나는데 브라더는 아니지 않겠어? 엉클이면 몰라도···
“프런트에서 안 했으면 그럼 누가 감독을 바꿔요? 스스로 그만둔 건 아닐 거잖아요.”
베그웰도 궁금했었나 보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을 먼저 물어봐 준다. 나도 묻고는 싶었지만 루키가 이럴 때 너무 나서는 건 꼴사나워 보일 거 같아 참고 있다.
“구단주가 한마디 했겠지.”
‘이건 한국 스타일인 거 같은데··· 연패에 열 받은 모기업 회장님께서 감독 잘라라. 이런 스토리는 MLB에서 힘들지 않나?’
“그게 말이 돼요? 경영과 소유는 분리되어야···”
“베그웰. 넌 여기 삼 년이나 있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트윈스를 모르냐? 다저스에서나 통할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이지?’
크리스의 말에 의하면 이천 년대 들어 투자 그룹의 MLB 구단 소유가 많아지긴 했지만, 트윈스는 시류에 상관없이 1984년부터 포라드라는 금융업을 주업으로 하던 가문 소유라고 한다. 현 구단주 깁 포라드는 상속으로 구단을 이어받았고 이사회 인원이 4명인데 세 명이 구단주와 그의 형제들이란다.
“여긴 그들의 왕국이야. 그들 마음대로 하는 거지. 요한슨 단장도 그의 조카야. 나름 능력이 있지만, 친척이라는 게 단장 자리를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지. 트윈스는 가족경영을 추구한다고. 트윈스는 누구도 구단주의 말에 반대할 수 없어.”
‘혈연과 인맥으로 지배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아주 한국적인 구단이네.’
역시 20년 가까이 빅리그에서 머무른 사람은 다른 것 같다. 말의 깊이가 다르다. 그에 비하면 베그웰은 애송이다.
화이트삭스와의 4차전은 초반부터 터져 나갔다. 이렇게 한가하게 잡담을 나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타자 넘들 어제 좀 치지. 이게 뭐야.’
사실 어제도 괜찮았다. 정규 이닝에 8점이나 냈다. 그 정도면 가볍게 게임을 이겨냈어야 하는 득점이었다. 어제 패배의 원인이 타자는 아니었다. 오늘은 3회인데도 어제의 득점을 초과하고 있다.
‘등판일까지는 한참 남았고 느긋하게 경기나 보면 되겠네. 어휴! 하루만 참지. 어떻게 시즌 중에 감독을 자르냐.’
“애송이들 잘 쉬고 있어 내가 끝내고 올게.”
크리스에게 타순이 돌아왔다.
“너 이제 마이너로 내려갈 일은 없겠네.”
주장이 예비 타석으로 나간 뒤 베그웰이 살짝 속삭였다.
“무슨?”
좋은 말이긴 한데 너무 뜬금없다.
“주장이 이런 말을 해주는 건 그의 눈에 네가 시즌을 같이 보낼 것 같은 확신이 생겨서 그런 거야. 그럼 코칭 스탭의 생각도 비슷하겠지.”
“오! 그런··· 흐흣. 베그웰 너는 어때?‘
“난 어제 경기 이전에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