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분석하다.
경기는 져버렸다.
숙소로 쓰고 있는 호텔로 돌아와 늦은 밤이었지만 고 감독을 찾아갔다. 트윈스 구단은 인스트럭터 급여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짜게 굴더니 콜업이 되자 나와 같은 호텔에 구단 부담으로 고 감독의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고 감독은 저녁 스포츠 방송을 틀어 놓고 TV 앞에 앉아 있었다.
“기척 좀 내고 다녀. 깜짝 놀랐잖아. 만약 내가··· 음. 무슨 일이냐?”
고 감독이 새삼스럽게 정색을 한다. 별생각 없이 늘 하던 대로 알고 있는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갔는데 난데없이 짜증을 부린다. 무슨 일이냐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지?’
『“트윈스는 오늘도 패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연패의 숫자를 13으로 늘렸습니다. 거의 이길 뻔했었습니다만 14회까지 끌려가 결국 지고 말았죠. 토미. 언제가 되어야 연패가 멈출까요?
“오늘의 패배는 좋게 말하면 트윈스가 선택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초한 것이죠.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TV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이 오늘 경기에 대한 요약과 전문가의 총평인 것 같다.
“직접 보러 오시지 왜 이런 방송을 보고 있어요?”
“겸사겸사지. 리그가 전반적으로 돌아가는 흐름을 알 수 있고 영어 듣기 공부도 되거든. 저기 토미 버켓을 현역 때 좋아하기도 했었고··· 저 양반 트윈스 중계에 해설도 하지.”
누군지 모른다. 야구 이야기로 방송 일을 하는 걸로 보아 과거 유명 선수였겠지만 내가 아는 은퇴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저 뚱뚱한 아저씨가 현역 때 잘했었나 봐요.”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세 시즌 정도는 특급 선수였지. 메이저에서 십 년 이상 버텨낸 선수라면 존중해야지. 저 양반은 큰 임팩트를 줬던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 나머지 기간도 무난한 성적은 만들어냈었어. 시즌 10승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투수였어. 백몇십 승 정도는 했을 거다.”
지금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가지만 그랬다니 그런가 보다 했다.
“중계를 보셨나 봐요? 외출도 좀 하고 그러시지. 맨날 방에 처박혀서 뭘 하시는 거예요?”
테이블 주변으로 책 몇 권이 흩어져 있었다. 팀 훈련에 참가하고 경기 일정에 동행하느라 가끔 밤에만 잠깐씩 만났는데 다음 주에 원정 나가면 한동안은 못 보게 된다. 혼자 어떻게 지낼까 걱정이 들었는데 이 정도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보단 멀쩡하네.”
“예?”
이 아저씨가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이렇게 시동을 거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방에 처박혀서 베개를 눈물로 적시고 그럴 줄 알았거든. 이렇게 나타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예전에 대학 연맹 결승전에서···”
이런 구석기 시대 이야기는 사절이다. 승부처에서 한 방 맞고 덕아웃에서 눈물을 좀 훔친 적이 있기는 했었지만 다 옛날 일이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다 그랬던 경험이 있는 것처럼.
“거 시합을 하다 보면 지기도 하고 홈런을 맞을 때도 있고 그런 거지 그걸 어떻게 일일이 신경 써요?”
지나간 일은 잊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응? 신경 안 써? 진짜?”
“그럼요. 제가 애도 아니고···”
“그럼 왜 왔냐?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건··· 음. 시리즈 끝나고 원정 가면 한동안 못 보게 될 거잖아요. 그래서 인사를 하러 온 거죠. 제가 인사성은 바르잖아요.”
이 아저씨 대충 지나가면 되지 별걸 다 물어본다.
“잠깐 있어 봐. 니 이야기 나온다.”
TV의 볼륨이 커졌다.
『“···트윈스로서는 많은 악재 가운데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죠. 이번에 콜업한 So라는 한국인 투수가 놀랍더군요. 계투로 AA에서 17게임 22이닝을 던졌는데 안타를 하나도 안 맞았죠. 그야말로 리그를 압살해 버렸는데 과연 그 구위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는데 오늘 10회부터 13회까지 마지막 4이닝을 책임졌던 투수 이야기인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마이너 리그에 너무 짧게 머물러 알려질 시간이 없었죠. 그래도 라딧 같은 팬 커뮤니티가 있는 곳에서 조금씩 이름이 퍼지고 있긴 했었습니다. 아마 감독은 그 성적에 대해 의문이 좀 있었나 봐요. 루키에게 상당히 큰 배팅을 했죠. 한 게임을 맡겨 버렸으니 말입니다.”
“실험이 성공적이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결국 홈런을 맞고 경기는 졌는데···”』
“장난하나? 내가 그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떻게 잘하냐구. 홈런 맞은 건··· 어휴!”
TV에서 아나운서인지 뭐인지가 하도 열불 터지는 말을 해대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혼자서 뭐 하냐? 떠들지 말고 좀 있어 봐. 잘 안 들리잖아.”
“예.”
나도 많이 크긴 컸다 싶다. 이런 미쿡 방송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다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결과적으로 지긴 했습니다만 연장에서 화이트삭스로 하여금 투수 넷을 더 쓰게 만들었죠. 루키 투수 하나를 소모해서. 그건 내일 경기에서··· 게다가 AA에서 기록이 그렇다 보니 So를 어떻게 써야 할지 참고할 만한 자료도 없었는데 오늘 최소한의 방향성 정도는 잡았으리라고 봅니다.”
“그 선수에 대해서는 경기 후 전문가와 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왔었죠. 토미가 보시기에 So의 기량이 빅리그 정착이 가능할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20년 사이에 세이버메트릭스가 야구계에서 영향력을 점점 확대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선수의 모든 능력이 그런 수치화가 가능한 건 아니지요. 그중 하나가 멘탈입니다. So는 불만족스러운 주심의 볼 판정을 웃어넘기고 홈런을 맞은 후 후속 타자를 깔끔히 처리하고 이닝을 마무리했지요. 기량에 앞서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수는 대개 롱런 하더군요.”
“그렇다면 트윈스로서는 오늘 경기에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군요. 내일 시리즈 최종전···”』
“역시 레전드라서 보는 눈이 다르네. 눈은 아직 클래스가 있어.”
‘응? 이 사람 고 감독 맞아?’
괜히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고 감독이 누구 의견에 이렇게 단번에 동의하는 걸 보긴 무척 오래간만이었다. 미국에 오더니 사람이 변한 것 같다.
저 토미라는 양반이 날 칭찬한 것 같긴 한데 ‘기량은 그저 그랬다.’ 이런 뜻으로도 들을 수 있는 말이라 마음 놓고 기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
“저게 좋은 말인가요? 이해가 안 되는 건 4이닝 동안 13타자를 상대해서 삼진을 8개 잡고 나머지는 다 내야 땅볼이었는데 딱 하나 실투가 나와서 홈런 맞았다고 기량에 의문 부호를 다는 이유가 뭘까요?”
“진짜 실투였니?”
사실은 그걸 판단하기 어려워서 고 감독을 찾아온 것이다.
“음. 좀 애매해요. 공은 제가 원한 곳에 원하는 구질로 들어갔어요. 그것으로만 생각하면 실투가 아니고 상대가 잘 친 거죠. 제가 실투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볼 배합에 있어요. 오늘 패스트볼을 너무 남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야! 소영수 이제 좀 머리가 깨려는가 보네. 정말 이럴 때 보람을 느낀다니까. 그래, 큰 무대에 오니까 야구 보는 눈이 막 달라지지?”
“무슨 말씀을···”
이건 진짜 억울하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예전엔 몸이 못 따라줘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 생각만으로 끝나 버려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가운데만 보고 던지는 투수가 볼 배합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냐고.’
하지만 과거는 다 지나갔다. 이제 처지가 달라졌다.
‘이젠 TV에서 언급될 정도로 위상이··· 근데 저거 전국 방송인가? 음. 지역 방송이네. 아직 좀 모자라네.’
“홈런 맞은 공이 정타로 맞은 것 같니?”
너무 당연한 걸 물어서 이게 뭔가 싶다.
“예? 배럴(Barrel, 타격 면의 두께)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 가장 효과적인 타격이 이뤄지는 지점)에 맞았으니까 홈런이 되었겠죠.”
“메이저리그에서 대부분의 홈런이 나오는 발사 각도는 20~35°야. 물론 더 큰 발사 각도에서 홈런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건 타자의 극단적 어퍼스윙과 어우러져야 하지. 그런데 오늘 홈런의 발사 각도는 37°였지.”
이런 걸 다 검토한 걸 보니 이 양반이 방에서 엄청나게 심심했던 것 같다.
“그랬어요? 타자 힘이 좋았나 보네요. 살짝 비껴 맞았어도 넘어간 걸 보면··· 그런데 그런 걸 어디에서 알아낸 거예요?”
통계 사이트와 고 감독은 접점이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다.
“그런 것을 정리해 놓은 통계 사이트가 있더라구.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오늘 홈런 친 타자가 문제야.”
홈런을 맞은 내가 문제지 결승타를 친 타자에게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지금쯤 축하 파티 중일지도 모른다.
“제프 그린. 32세. 184cm에 92kg. 작년에 0.272의 타율에 홈런은 15개. 올해도 비슷한 페이스지. 메이저리거치고는 별로 크지 않은 체구에 거포형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타자야. 홈런보다는 2루타가 많은 정교함을 추구하는 중장거리 타자를 지향하지. 물론 성적은 아쉬움이 좀 있다만 스윙도 레벨스윙에 가까운 타격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고.”
“뭘 그렇게까지 조사하셨어요. 또 만나면 안 맞을 자신 있어요. 오늘 팀 사정 때문에 너무 오래 던져서 그렇지. 계투 역할은 잘 해낸 거잖아요. 다음에는···”
고 감독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작년 이 친구 홈런의 평균 발사각은 21°였어. 라인 드라이브성 홈런이 주로 나오는 타자라는 거야. 이런 사실들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건 오늘 타구는 상당히 빗맞은 타구였다는 거지.”
‘이럴 수가··· 고 감독이···’
이 사람은 야구에서 있어서는 올드 스쿨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통계보다는 감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은··· 미쿡 물이 무섭긴 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별거 아니야. 니가 자신 있게 던졌던 공이 리그 평균 수준의 파워를 가진 타자에게는 상당히 빗맞아도 홈런이 되는 만만한 공이라는 거지. 10번 삼진을 잡으면 뭐 하냐. 한 방 걸리면 지는데··· 볼 배합을 따지기에 앞서 오늘 너의 마인드는 선발 투수의 것이었어, 그게 제일 문제였지.”
‘이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가슴이 답답하다.
“한 방 맞으면 게임이 끝나버리는 마무리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런 마인드로 던져? 불펜으로 전향했으면 최종적으로는 마무리를 맡아야 하는데 강강강으로 밀어붙이면 어쩌자는 거야. 네 약점으로 상대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팩트로 두들겨 패니까 저항이 안 된다.
“과감도 상황에 맞춰 해야지. 오늘 그 타자와의 승부는 만용이었어. 하지만···”
‘하지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