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30화 (30/200)

30화. 얻은 것과 잃은 것

10회를 삼진 두 개와 땅볼 하나로 막아냈다. 태연한 척하면서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야수들이 글러브로 등을 툭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티가 나나?’

지금 등이 축축하다. 격려의 의미라고 생각되지만 엄청나게 땀이 배어 나온 걸 뒤에서 달려온 야수들이 눈치채지 않았을지 괜히 신경이 쓰인다.

‘루키 치고는 나이도 많은데 긴장해 떨고 있으면 너무 부끄럽잖아.’

눈을 내리깔고 그냥 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금 전까지 던졌던 공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공을 챘던 실밥의 느낌까지 너무 생생하다.

‘전반적으로 공이 괜찮았어. 계속 이대로···’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고 어떤 말도 건네 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주목받고 있는 느낌이다. 몸이 식으면 땀이 멈출 것 같았지만 얼굴이 점점 더 화끈거린다.

딱-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끝났··· 끝나···지 않네.’

소리는 장타인데 중견수에게 잡혔다. 홈런일 줄 알았다. 정말 외야 오지게 넓다. 한 점만 내면 끝나는데 타자 놈들 진짜 너무한다. 이따위 타격으로 어떻게 이 경기에서 8점이나 냈는지 모르겠다.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계속 쳐다보고 있다간 입에서 욕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서 그래. 타자를 믿어야 해. 오늘도 잘 쳤었잖아. 곧 해낼 거야.’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휴! 좀 낫네. 아직 유월인데 이렇게 더워서야··· 여기 겨울엔 겁나 춥다던데. 이래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바람을 만끽하고 싶어 고개를 다시 들었는데 이상한 게 보인다.

‘이게 뭐지? 이건 수건? 헉!’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으니까 앉아서 땀 좀 식혀.”

주장인 크리스가 큰 수건을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야! 다들 뭐 하냐? 이대로 한 회만 더 지나면 우리 루키 땀에 잠겨 익사할지도 몰라. 한 점만 내자.”

“나도 엄청나게··· 간절히 치고 싶다고··· 그나저나 익사 직전치고는 얼굴이 생생하네.”

“크크큭. 배출은 땀으로만 하라구. 다른 걸로 하면 알지?”

“혹시 다른 곳으로 배출되면 모르는 척하고 슬슬 말리면 돼. 내가 루키 때 해봤는데 아무도 모르더라고··· 다 땀 좀 많이 흘린 줄 알아.”

정말 더러운 말을 들었다.

“너 요즘도 그러는 거 아냐? 어쩐지 공수교대할 때 냄새가 심상치 않더라니···”

이 사람도 만만치 않게 더러울 것 같다.

감독과 코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게 착시처럼 지나갔다. 그들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분명히 봤다.

‘웃어? 날 보고 웃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 마요. 아저씨들이 이러니까 정신이 더 없다고.’

땀 조금 흘렸다고 겁나게 놀린다. 정말 짜증 나서 다음 회에 홈런이라도 맞아버리고 싶다.

눈앞에 불쑥 패트병이 하나 나타났다.

“물 좀 마셔. 익사 직전 생쥐 같은 몰골이야. 어지럽지 않아? 경기 끝나기 전에 니가 탈수증으로 먼저 실려 나가면 곤란해. 우린 이제 투수가 없어. 니가 없어지면 내가 나가 던져야 할 판이라고.”

이제는 베그웰마저 동참해서 놀린다. 일단 물은 마셔주는데 이 빚은 언젠가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병신 같은 것들아! 한 방 쳐. 빨리 쳐서 끝내버리라고.’

상대 타자들에게 분노와 짜증을 담아 외쳐 봐도··· 파울밖에 안 나온다. 11회도 다시 타자들을 압살해 버렸다. 도대체 왜 못 치는지 모르겠다.

‘내가 좀 던지긴 하지. 메이저도 다들 별거 아니네.’

***

“감독님. 너무 많이 던지게 하는 것 아닙니까? 3이닝 정도를 한계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다음 투수를 준비해야···”

투수 코치는 아까 감독의 말에 동의한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오늘 마지막 투수는 그야. 어쩔 수 없지 않나? 페넌트레이스는 길어 아직 6월이야. 여기서 로테이션을 엉망으로 만들면 오늘 진다고 해도 그게 1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자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렇긴 합니다만 연패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하아!”

감독도 속이 타긴 마찬가지였다. So가 생각보다 너무 잘 던지고 있었다. 애초 그의 계산은 So가 최소한의 점수로 2이닝 정도만 막아준다면 오늘 활발한 타격을 보여주었던 상위타선이 돌아오는 10회와 11회에 승부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렇게 해서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이틀간 상대 화이트삭스의 투수진 소모는 극히 적었다. 객관적 지표상으로도 상대 불펜은 강했다. 양과 질 모두 뒤지는 상황에서 균형감을 가진 판단이었다. 그런데 루키는 역투 중이고 타선이 터질 듯 안 터지고 있다. 정타가 안 나오는 건 아닌데 결정적 타구가 다 야수 정면이다.

감독도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결심이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꿋꿋이 참아냈다.

“오늘은 이대로 가지. So는 얼마 전까지 선발 등판도 했었으니 이 정도로 스태미너가 달리지는 않을 거잖아.”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대 팀의 공격이 끝났다. So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OK.”

“좋아.”

12회 초도 막아내었다. So가 덕아웃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지만, 공은 현란하게 움직이며 홈플레이트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갈 데까지 가 보자.”

신음과 같은 말이 감독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화이트삭스의 투수가 바뀌었다. 지난 이틀간 상대 투수진을 소모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감독은 억지로 숨을 들어 삼켰다.

***

‘진짜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인가?’

내 뒤로 투수가 없다는 말이 단순하게 격려 차원에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투구 중에는 정신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덕아웃으로 들어오면 서너 배는 느려지는 것 같다. 별생각이 다 든다. 이제는 타자들도 놀리지 않는다. 그들도 이제는 내 긴장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데뷔전에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저것들이 투수를 몇 번이나 바꾸는 거야? 내가 한 번 이겨보겠다는데 루키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화이트삭스는 이 경기를 꼭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다.

‘하긴 나라도 그렇게 하겠지. 상대 팀은 남은 투수가 없다는 게 뻔히 보이고 자신들은 여유가 있고 상대가 무리하면 혹시 지더라도 내일 한 경기 더 해야 하는데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경기 내내 침묵하던 하위 타선이 힘을 냈다. 1사 후 연속 출루다. 9번 타자가 타석에 나섰다. 든든한 도우미 역할을 해주던 베그웰이다. 빅리그 3년 차 타율은···

‘휴우! 빠따질만 잘했으면 백업이 아니었겠지.’

그는 멘도사 라인에 턱걸이가 안 되는 타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준수한 수비 능력에 또 다른 의미로 놀라운 타격을 한다. 브레이킹 볼에 대한 대응이 안 되는 약점이 너무 뚜렷한 타자였다. 아마 포지션이 포수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마이너에 있었을 것이다. 메이저 최정상급 수비 능력에 AA 평균급 타격 실력 보유자다.

좋게 말하면 그런 타격 능력을 감안해도 쓸 만한 탁월한 수비형 포수라 말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이런 식으로 계속 백업만 하다가 경력이 끝날 거다.

현대 야구의 세이버메트릭스에서는 멘도사 라인이 대체 선수가 될 수 있는 기준이다. 갑자기 주전 선수가 부상 등의 이유로 빠져야 할 때 급하게 당겨 써야 하는 선수를 판단하는 기준이 멘도사 라인이다.

‘진짜 포지션이 포수만 아니었다면···’

대타를 쓰기도 어렵다. 성공하면 게임이 끝나버리지만 실패해도 게임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남은 포수가 백업의 백업인데 나와 손 한 번 맞춰본 일이 없다.

‘그래도 이할 가까이는 치잖아. 열 번에 두 번인데 그 두 번이 지금일지 어떻게 알겠어.’

사실은 반올림했다. 통산 타율이 1할 8푼이라고 들었었다. 하지만 전혀 기대를 안 할 수는 없다. 그런 의외성이 스포츠의 매력이다. 전력의 차이가 뚜렷하다 해서 늘 강팀이 이기는 것으로 결말이 정해져 있으면 그건 스포츠가 아니다. 통계와 무관한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가끔은 돌연히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이 그때야. 한 방 날리라고 여기가 선수 경력의 전환점이··· 아!’

내가 실수했다. 바랄 걸 바랐어야지. 기록은 대부분의 경우 거짓말하지 않는다. 회심의 한 방 치고는 많이 빈약했다. 내야를 넘기지 못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이럴 거면 삼진이라도··· 1번 모리스의 득점권 타율이··· 2번은···’

6-4-3으로 이어지는 고전적인 병살로 순식간에 공수교대가 되어 버렸다. 거기서 하나 날려주면 내일부터 정중히 선배 대접을 하려고 했더니 한계를 노출해 버렸다.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급하게 들어오는 베그월과 눈이 마주쳤는데 표정이 없다. 그의 무던한 성격이라면 이런 장면이라도 멋쩍은 미소 정도는 지을 줄 알았는데 그도 많이 답답한가 보다.

‘어휴! 본인이 제일 아쉽겠지.’

이번 이닝이 좀 찝찝하다. 삼자범퇴로 세 번을 막아냈으니 타선이 한 바퀴 돌았다. 고 감독의 길게 던지면 안 된다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 조심하는 수밖에···’

관중들은 내가 다시 올라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지더니 함성으로 변했다.

‘그래 이거지. 이게 메이저야. 오늘 꼭 이기고 만다.’

걱정했던 것보다 13회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타자들의 스윙은 대부분 아직 공과의 거리가 상당했다. 헛스윙이 나올 때마다 관중의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유명해질 것 같다.

‘씨X, 진짜 별거 아니잖아. 하위 타선이라서 그런가? 괜히 쫄아 가지고 내 공을 못 던지면 나만 손해지.’

위기 뒤에 기회라고 했다. 앞뒤가 뒤바뀌긴 했지만, 상대의 기회는 나의 위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름 신중하게 던진다고 공을 몇 개 뺀 게 후회스럽다. 4이닝을 던지는 게 오랜만이다 보니 조금 부담스럽긴 한 것 같다.

해가 져서 조금 선선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몸에선 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에 성취 욕구가 배가 된다. 밀어붙여 순식간에 투아웃을 잡았다. 연속된 삼진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자! 덤벼. 내가 곧···’

타악-

라이트 불빛 속을 뚫고 새까맣게 떠서 날아가는 하얀 공은 아름다웠다. 유려한 포물선이 좌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갔다.

“헉!”

‘하아! 설레발은 필패인데···’

자신감이 너무 과했다.

‘흐흣. 바라던 대로 되어 버렸네. 치라고 던졌더니 아주 잘 치는구만.’

어이없이 맞아버렸는데 어이가 없어 그런지 웃음이 나온다.

‘유명한 영화 대사가 있었잖아. 어이가 없네. 어이가 맷돌에 끼우는 나무 자루라지.’

묵묵하게 남은 한 타자를 잡아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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