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건 설렘이다.
이틀간 불펜에서 대기했지만, 등판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 팀은 원정에서 10연패를 당하고 돌아와 홈에서 화이트삭스에게 다시 2연패를 했다.
12연패를 하고 있는 팀이 분위기 좋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닌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안드레아 폴리 일명 안드레. 팀의 마무리를 맡고 있다. 지난 3년간 22, 32, 27세이브를 기록한 확고한 불펜진의 기둥이다. 올해도 현재까지 7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베그웰의 말에 의하면 이번 연패가 그가 두 번 연속 블론을 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직 5회인데 불펜 주변에서 어슬렁거린다. 불펜 난간에 발을 걸치고 발끝을 까닥이면서 그라운드에서 나오는 음악에 리듬을 맞추고 있다. 조금 튀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음악이 상대 등장용이었고 그에게 우리가 홈런을 맞았다는 것 정도다.
“그냥 덕아웃에 앉아 있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와서 저 꼴을 하고 있는 거야.”
베그웰이 속삭였다.
첫날부터 친해졌다. 정말 친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내 공을 받아준 포수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더니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보다 겨우 두 살 더 많더군. 객지에서 두 살이야 뭐! 아래 위 한 10년까지는··· 같은 이십 대끼리···’
아메리칸 스타일로 친구 먹었다. 나는 아주 유연하고 개방적인 성격이다. 그도 내가 싫지는 않았는지 팀 적응의 도우미 역할을 자청해서 해주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상당히 고생할 뻔했다. 첫날 감독과 투수코치 면담을 잠깐 했었는데 다들 건성으로 말을 하는 느낌이 확 났다. 곧 등판 기회를 주겠다는 긍정적인 말을 들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빨리 나가서 던지고 싶어?”
“당연히 그렇지. 빅리그 데뷔인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베그웰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니 킥킥거린다.
“크크큭.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 마이너에 세 달도 안 있었다면서? 그게 오래면 우린 다 마이너에서 늙어 죽었어.”
“그렇긴 한데 나에게는 삼 년 같은 세 달이었다고··· 음. 개인차가 있을 수···”
농담에는 농담으로 받아야 한다. 웃음을 유발하는 건 의외성이다. 내가 말한 내용은 진실하지만 때로는 진실이 거짓말 같을 수도 있다.
“루키 데리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럴 땐 웃음은 좀 참아줬으면 해. 적당히 쉬었으면 내 공이나 좀 받아줘. 곧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세컨더리 셋업맨을 맡고 있는 마이크였다. 34세의 노장 아니, 베테랑 투수다. 음. 너무 한국식으로 말했다. 여긴 MLB이다.
‘베테랑(vétéran)이라··· 불어가 객지에 와서 고생하네.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디에서 온 거지?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에 불어는 좀 그렇지 않나? 나만 그렇게 느끼나?’
투수의 워밍업은 여러 유형이다. 불펜투수의 조건 중에는 몸이 빨리 풀려야 한다는 것도 있다. 물론 마무리나 강팀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고정되면 그런 제약은 거의 없어지지만 스몰마켓인 트윈스 같은 팀에서 그런 것이 충족되기는 어렵다.
나는 몸이 굉장히 빨리 풀리는 편이었다. 공 몇 개만 던지면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 때 원 포인트 릴리프는 못 했을 거다. 사실 이렇게 일찍부터 불펜에서 대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 그런 부분을 어필하기에는 짬밥이 딸린다. 그래서 불펜의 지박령이 되어 가고 있다.
불펜이 분주해졌다는 건 경기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무난하게 연패를 끊어내면 좋으련만 오늘도 접전 양상이다.
‘오늘도 못 나가는 건가?’
대개 루키의 데뷔전은 가급적 편안한 상황에서 치러진다. 첫 등판의 흥분과 긴장이 풀발···
‘에고, 점잖게 표현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비속어가 나오려고 하는지···’
아무튼 루키에게 첫 등판은 중요하다. 첫 끗발이 개···
‘흠. 첫 매듭이 잘 매어져야 다음도 순조로운 거야.’
루키를 등판시키기에는 현재 상황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큰 점수 차이로 이기거나 지는 상황이 와야 부담 없이 등판시킬 텐데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나는 어떤 상황이라도 괜찮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루키가 데뷔전에서 잘하지 못하는 건 일반적 이해 범위 안에 있다. 통상적으로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잘해 버리면 거기서 의외성이 생긴다. 트윈스 프런트와 스탭, 팬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위기 상황이 더 좋다.
그 임펙트가 크면 클수록 나의 메이저리그 정착이 현실화될 것이다. 실패한다고 해도 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다. 기회는 한두 번 더 주어질 거고 그때 잘해도 된다.
지금 경기는 점입가경이다. 3:1, 3:4, 5:4 관객은 재미있겠지만 관계자들은 피가 마를 것 같다.
한때 역전을 당하기도 했지만, 경기는 대개 우리 팀이 리드한 가운데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방이 부족해 상대를 떨쳐 내지를 못하고 있다.
우리 팀은 뒤가 없었다. 오늘 어떻게든 연패는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지 투수를 쏟아부으면서 버텨내고 있다. 위기 상황을 물량으로 막아낸다.
‘아! 오늘도 못나가나 보네.’
7회 말 공격에서 타자들이 힘을 냈다. 이사 후 볼넷에 이어 투런 홈런이 터졌다. 스코어는 8:5 3점 차이로 벌어졌다.
‘3점이면 8, 9회야 어떻게든 막아내지 않겠어. 쩝! 할 수 없지. 데뷔는 다음 경기로··· 그래도 내일부터 팀 분위기는 풀리겠네.’
같이 대화를 나눠주던 베그웰도 안드레의 공을 받느라 바쁘고 혼자서 멍하니 경기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어!”
8회 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나선 해크먼이 일사를 잘 잡아내더니 연속된 볼넷으로 두 명의 타자를 출루시켰다. 그 장면 후 바로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바꾸나? 누구를? 지금 불펜에 있는 게···’
안드레와 나밖에 없었다.
‘이거 혹시···’
힐끗 벽에 달린 전화기를 바라보게 된다. 저게 울리면··· 울렸다.
‘아싸! 드디어 나가게 되는구만. 다 죽었어. 히히힛’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무심한 척 전화 받는 불펜코치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나대면 가오···
‘에공, 또··· 이게 다 고 감독한테 잘못 배워서 그래. 이래서 교육 환경이 중요한 건데···’
불펜코치가 움직였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에게··· 오지 않았다.
‘이거 뭐야? 왜 안드레에게 가는 거야? 설마 마무리에게 2이닝을 맡기려고··· 아 놔!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나 참! 이런 게 스몰마켓 팀의 한계라니까. 마무리는 딱 1이닝··· 어휴!’
좋다 말았다. 모자를 다시 눌러 썼다. 여기서 열 내어 봐야 나만 손해다. 금방 잊었다. 투수는 안 좋은 상황을 빨리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타킷 필드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투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한 타자 더 상대하게 하고 교체하려는 것 같았다.
외야 뜬 공이 나왔다.
“그래. 잘 막았어. 이기자!”
고함 좀 질렀더니 안드레가 돌아보면서 피식 웃는다. 그래 이제 마음 비웠다. 야구는 내일도 한다.
‘아! 안 바꿔? 뭐 하는 거야? 이럴 거 왜 전화는 해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불펜에서 바라본 내야 관중석의 절반이 비어있다. 이런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경기를 이겨내면 아마 내일은 다 채울 수 있으리라.
“아!”
맞아버렸다. 투수 교체 타이밍을 늦추더니 결국 맞아버렸다. 주자 일소 2루타를 맞아버렸다. 하지만 아직은 1점 차 리드를 가지고 있다.
이제야 끌어오던 투수 교체가 이루어졌다. 안드레가 마운드를 향해 뛰쳐나갔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네 개. 2사를 잡았지만 2루에 주자가 남았다.
“뭐 해? 너도 몸 풀어야지.”
어느 사이엔가 베그월이 다가와 있었다.
“응? 아! 그렇지.”
안드레가 막아내면 좋겠지만 단타 하나면 동점이다, 홈런을 맞아버리면 역전이고. 만약 동점이 된다면 경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안드레는 9회까지만 던질 것이다.
“이래서 루키는 곤란하다니까. 너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지?”
“무슨··· 멀쩡하다고. 우리··· 우리 팀이 이길 거니까 내가 나갈 일은 없겠지. 안드레가 막아낼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이 동네에 좀 있다 보니까 여기서는 대부분의 경우 희망대로 잘 흘러가지 않더라고··· 쓸데없이 길게 말할 필요 없어. 네 역할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희망과 상관없이···”
베그웰의 예언과 같은 말은 이루어졌다. 안드레가 나가자마자 맞아버렸다, 냉정을 잃지 않고 다음 타자는 잡아냈지만 8회에 동점이 되어 버렸다. 가슴이 답답하다.
8회 말 우리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투수 코치가 불쑥 불펜에 나타났다.
“첫 등판은 조금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어쩌면 무리한 일을 시키게 될지도 모르겠군.”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동점이 유지되면 10회부터는 자네가 나가야 해.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겠지. 음. 문제는 자네 이후 올릴 투수가 없네. 조금 전 감독님과 의논을 했는데··· 오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더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했어. 이 경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네 탓만은 아니야. 스탭의 책임이 더 크지. 등판해야 할 상황이 된다면 편안하게 던져 줬으면 해.”
등판을 바라왔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기분이 묘하다.
“예.”
아직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지금 우리 공격이 이번 회를 포함해 두 번 남았고 상대의 공격도 한 번 남아있다. 이기든 지든 9회에 결판이 나버리면 내 등판은 없다. 이렇게나마 미리 말해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조금 전까지는 등판하고 싶은 욕심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별생각이 다 든다. 마음 한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경기가 끝나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뜬금포라도 한 방 안 나오나?’
이미 블론을 기록하긴 했지만, 안드레는 9회를 막아냈다. 불펜에서의 느슨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안간힘을 쓰는 게 불펜에서도 느껴졌다. 이제 절반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다.
9회 말 우리 공격에서 점수가 나지 않으면 내가 경기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된다. 난 항상 왜 이렇게 이상한 경우가 많이 생기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사주에 그런 운이 있나? 묘를 잘못 써서··· 이래저래 겁나게 안 풀리··· 하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다 어릴 때 선녀 보살을 만나서··· 그래. 이게 아니지. 이럴 땐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해 내 의지로··· 그렇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제 스타가 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