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콜업
“조금 오래전이긴 하지만 KBO에서 외국인 투수와 국내 투수들의 커브 발사 각도를 조사한 통계가 있어. 그때 외국인 투수의 평균 커브 발사각은 +0.9도였고 내국인 투수는 +2.1도였지.”
나도 그런 통계를 본 적 있었다. 최초 조사가 10여 년쯤 전의 통계인데 그 뒤 통계에 의하면 해마다 국내 투수의 발사 각도는 줄어들고 있었다.
“변화구가 단일 구종으로 아무리 위력이 있다 해도 타자가 미리 알아차릴 수 있으면 그 위력은 반감이 되지.”
커브의 발사 각도가 크면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 뜨는 느낌이 생긴다고 타자들은 대개 표현한다. 그럼 대개 커브를 노리지 않은 이상 스윙하지 않는다. 변화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 발사각 차이가 현재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차이는 존재해. 왜 그럴까? 꽤 많은 시간이 있었고 발사각이 낮으면 좋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서양인과의 신체적인 차이 때문 아닐까요? 체격이 많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선수들이 작은 건 맞잖아요.”
고된 연습에 겁나게 피곤해도 질문에 이렇게 맞장구는 쳐줘야 한다. 안 그럼 삐진다. 아무튼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근본적으로 왜 그런가 하면···”
목소리가 은근하다.
“그렇게 던져도 괜찮으니까! 그래서 발전이 없는 거야!”
별안간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살살하셔도 다 들려요. 귀 아프게 왜 이러세요.”
예전 한국에서 훈련할 때는 이렇게까지 안 하더니 미국에서는 왜 이러냐고 한마디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렇다.
“그래서 너한테는 KBO가 딱인데 그런 애들 상대로 무리할 필요도 없고, 롱런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어휴! 그랬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겠지.”
“지나간 일을 되씹고 그러세요.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도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이런 강제적인 도전 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를 초식동물처럼 되씹지는 않는다. 나는 포식자가 될 운명을 타고나서 그렇다고 자기 합리화에 성공했다.
“돈 문제도 그래. 10억과 20억은 많이 다르지만 한 100억 넘어가면 100, 200 숫자가 다를 뿐이지 실생활에서는 별 차이를 못 느껴요.”
“말씀을 꼭 수백억 벌어본 사람처럼 하시네요. 감독님 FA 하실 때 30억인가 그렇지 않았어요?”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거 같은데 100억과 200억이 같다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계산이 있을 수는 없다. 나에게 돈은 다다익선이다. 많을수록 좋다. 돈 벌어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야. 비유 몰라? 그리고 우리 때는 돈 가치가··· 지금으로 환산하면···”
‘가만히 있을걸.’
괜히 건드렸다. 이러면 이 지겨운 말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돈 많다고 하루에 수십 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편하지 않게 사는 데는 그것이면 충분한 액수지. 그게 행복 아니겠어? 우리 땐···”
“아··· 예. 그렇죠.”
빨리 동의하고 이 쓸데없는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한동안 잘 나갔다고 대가리 들지 마. 아직은 모르는 거야. 지금은 기본에 충실하면서 공격적인 볼 배합을 통한 승부에 익숙해져야 할 때야.”
“거··· 대가리라니요. 곧 메이저 갈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좀 품위 있는 표현으로···”
“응? 내가 대가리라고 했니? 쏘리. 니 말이 맞긴 한데··· 머리에 든 거 없다 보다는 대가리란 단어를 쓰면 좀 더 리얼하게 들리지 않니? 머리라고 하면 뭔가 2% 모자라는 느낌이야.”
그건 그렇다. 하지만 다른 대가리들보다 내 머리는 소중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속성이 있고 투수란 족속은 더하다.
나도 아주 이기적으로 던졌다. AA에서 등판하기 시작한 4월 말부터 6월 초인 지금까지 안타를 하나도 안 맞았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다.
얼마 전 지역 신문에서 나를 가리켜 제2의 조쉬 헤이더라 하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그는 단축 시즌이었던 2020년 7월 23일 시즌 개막일부터 한 달 이상을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타자들이 그에게 첫 안타를 때려낸 것은 9월 5일이 되어서였다.
그와 비교해줘서 고맙긴 한데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를 생각하면 좀 비참한 기분이 든다. 마이너를 평정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가 있을 리 없다. 그런 비교가 억지라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래서 현재 잘하고 있다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인다. 그걸로 기고만장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콜업이 된다면 그 시기를 빨라도 올 확장 로스터 기간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슬금슬금 기대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말도 그렇고 트윈스 불펜 사정이···’
지금 트위스 불펜의 ERA는 5점 대가 넘는다. 시즌 시작부터 삐걱거리더니 시즌의 삼 분의 일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정도라면 붕괴되었다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
‘내가 가면 그것보다는 훨씬 잘할 수 있지.’
***
“주력 구종은 싱커입니다. 구속과 휘는 각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구속은 80에서부터 90마일까지 나타나고 커맨드는 최상급입니다. 20-80 스케일로 평가하자면 70을 줄 수 있습니다.”
“자료를 보면 평속이 82.5 마일인데 플러스 플러스 피치라니 너무 과하지 않나?”
팜 디텍터인 빌 해밀턴에게는 서류에 적힌 숫자들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가 상당한 수준의 공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 과대 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제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견이시군요. 전 그가 기존의 세이버메트릭스 상의 숫자로 표시하기 어려운 특출한 부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싱커에 대해서는 만약 구속이 더 높았다면 제 점수는 80이었을 겁니다.”
마일리는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처음엔 약간의 의심이 있었지만 그를 전담해 가까이서 지난 이 개월을 지켜보며 그 약간의 의심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그건 단견이야.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생소함을 특별함으로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도 그의 경기를 그동안 보고 있었다네.”
“그 착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그것을 좀 들어보고 싶네요.”
상급자의 부정적인 말이 마일리를 자극했다. 그녀는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유? 많지. 언더스로우가 왜 드물어졌지? 야구가 만들어졌을 때 투수는 다 언더였어. 그랬었는데 왜 그럴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해. 리그에서 안 먹히기 때문이야. 시도했는데 안 먹혀서 그래. 예외적인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예외에 So가 들어가기에는 공이 너무 평범하지.”
“So의 공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지금 AA에서 기록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생소하니까 특별해 보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들이 적응해 나갈 거야. 그럼 지표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 마이너에서는 그것이 천천히 진행될 거야. 하지만 메이저는 달라. 메이저는 괴물들이 서식처야. 그 괴물들은 적응이 아주 빠르지. 지금이라면 한두 시즌이면 기존에 가진 밑천이 다 털릴 거라고 생각하네.”
마일리로서는 무턱대고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타자의 적응만큼 투수의 타자에 대한 적응도 중요해. 메이저에 올라갔을 때의 적응을 위한 시간을 그는 좀 더 가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굳이 올려야 한다면 다음은 AAA 이런 식으로 가야 맞는 거라네.”
“하핫. 빌도 관심이 있었군요. 별말씀이 없어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죠.”
GM은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지난 두 달간 인상을 찌푸릴 일이 다반사였는데 지금 토의하는 내용은 긍정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부정적 현실에 시달렸던 시간들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나도 콜업은 이르다고 생각해. 빌 그런 뜻으로 말한 것 맞지? 우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치프 스카우터인 존슨이 한쪽 눈을 찡긋한다.
“서비스 타임 때문에 그런 의견이라면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So를 콜업한다면 그가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한정해서 의견을 주세요. 다른 제반 조건은 무시하고···”
GM 요한슨이 어지러워진 대화 방향을 바로 잡았다.
“그 말씀은··· 음. So를 길게 끌고 갈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빌이 조금은 의외라는 듯 질문을 던졌다.
“지금 확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가 서비스 타임 정도까지 훌륭한 성적을 보여줄 수 있다면 훌륭한 트레이드 카드가 될 수 있겠죠. 3년이면 리빌딩이 어느 정도 끝나고 시기도 딱 적당합니다.”
요한슨의 말은 마일리에게 아주 뜻밖의 일로 다가왔다. 그렇게 기대를 가지고 특혜를 베풀면서 애지중지하더니 그것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구성에 대한 의심이 드나 보군요.”
존슨의 말에 요한슨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그런 걱정을 안 할 수는 없겠죠. 투구폼의 문제도 있고 동양인은 에이징 커브가 빨리 오는 편이라 나이도 적지 않고···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해야겠죠.”
GM은 거침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때쯤이 So의 시장 가치가 가장 극대화될 때이긴 하겠네요. 그런 방향 설정이라면 되도록 빨리 올려서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전 조금 더 묵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열어보면 좋은 것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거니까 나쁜 시도는 아니겠네요.”
콜업에 대해 부정적이던 빌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장대로 회의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일리는 이걸 좋아해야 할 일인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곳이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어울리는 자리이긴 했다.
“미스 마일리. So에게 붙인 인스트럭터의 의견은 들어봤나?”
“예. 그는 So가 메이저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연타하기 어려운 유형의 투수라고 하더군요. 빅리그에서 성공의 관건은 홈런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의 의견이 참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는 오래전부터 So와 밀접한 관계로 알고 있는데 중립적인 의견 제시가 가능할 거 같지 않군요.”
팜 디텍더 빌 해밀턴은 인스트럭터 고라는 사람이 못마땅했다. 팜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그곳에 자신의 영향력 발휘가 제한되는 지점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 마일리와 고는 불청객이었다.
“그거야 현장에서 부대끼며 증명을 해야겠지.”
치프 스카우터인 존슨의 말이 논쟁의 끝을 알렸다. 곧이어 GM의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