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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5화 (25/200)

25화. 전진하다

AA 생활은 즐거웠다. 오래전 한국 학교에 우열반이 있었다고 하던데 왜 그랬었는지 알아가고 있다. 여기 오니까 그래도 다들 좀 선수 같다. 그리고 그렇게 우등생들만 골라 모은 곳에서도 다시 우열이 생긴다.

여기서 내 일은 그렇게 튀는 놈들을 때려잡는 거다.

7회 원 아웃 주자 1, 2루에서 구원 등판했다. 지루해 혼났다. 불펜투수의 안 좋은 점은 언제 나갈지 모른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역할이 딱 고정되지 않으면 5회 이후엔 불펜에서 몸을 데우고 있어야 한다.

오늘은 선발투수의 호투로 어쩌면 나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더니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 누구 말처럼 야구 정말 모르겠다. 6회까지 산발 2안타로 잘하면 완봉도 가능할 것 같은 페이스더니 7회 들어 연속 3안타를 맞고 1실점 후 강판되었다.

내 역할은 공식적으로 프라이머리 셋업맨이다. 원래는 마무리 투수 바로 앞이 등판 순서지만 가끔 스윙맨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원 포인트 릴리프와 비슷한 역할인데 조금 길게 던지는 거다라고 나름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승리조다. 이기고 있어야 나간다.

처음엔 일반적인 불펜투수처럼 역할을 고정시키더니 몇 게임 던지고 나자 감독이 급할 때마다 마운드에 올린다. 지금으로서는 아주 좋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자주 많이 등판해야 더 빨리 눈에 띈다.

“스트라익.”

하이 패스트볼을 인코스에 딱 붙여 찔러 넣었다.

8번 타자 타순에서 대타가 나왔다. 3:1로 추격하는 스코어. 이런 장면에서 나올 정도면 나름 좀 치는 놈일 텐데 첫 구를 그냥 보내고 타석에서 물러나며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똥볼 같냐? XX하네. 니가 그렇게 보면 어쩔 거야!’

***

“넌 패스트볼을 높게 던질 수 있어야 해.”

“예? 저 아무리 세게 던져도 90마일이 될까 말까 하는데 그걸 높게 던지라고요?”

이 동네는 웬만하면 최고 구속 95마일은 기본으로 던지고 100마일을 넘기는 애들도 드물지 않게 있다. 대부분 평속으로도 90마일을 가볍게 넘긴다. 이런 데서 패스트볼을 높게 던지라니··· 간 작은 나로서는 절대 그런 짓 못한다.

물론 어퍼 스윙이 주류가 된 현대 야구에서 하이 패스트볼의 유용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난 구속이 느리다. 눈에서 가깝고 구속이 느리면 삐끗하면 홈런이다. 여기 애들 힘 겁나 좋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코너워크로 낮은 코스를 공략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너한테 수직 무브먼트니 뭐니 그런 말 쓰기가 좀 그렇긴 하다만 아무튼 일반적인 측정치로 네 패스트볼을 평가하기는 어려워. 왜 그렇겠냐?”

“언더라서?”

“역시 환경이 달라지니까 사람이 변하기도 하는구나.”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지금 패스트볼이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내 기준에 의하면 그건 좀 세게 던지는 싱커다. 실제로 내가 던지는 공은 커브를 제외하면 단일 구종이다.

쓰리쿼터를 낮은 자세로 던진다는 느낌으로 던지면 투심성의 무브먼트를 가진 가장 빠른 볼, 언더라는 느낌으로 던지면 싱커다. 각 조절은 그립을 조금 깊게 잡거나 얕게 잡는다.

그런데 이건 오로지 내 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외부에서 보기에는 거의 똑같다. 투구폼도 같고 그립도 같다. 이거 아주 좋은 거다. 상대에게 구질 더럽네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훌륭한 조건이다.

“메이저의 불펜투수들 중에서 구속은 느리지만 하이 패스트볼을 자주 던지던 투수들이 있었지.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니?”

“음. 호프먼?”

“그래 그도 그랬었지. 하지만 네 스타일상 호프먼처럼 던지는 건 무리야. 데니스 에커슬리라고 들어봤니?”

들어는 봤는데 어떻게 던지는지 본 적은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1이닝 마무리 시스템의 시초를 만들어낸 투수라는 건 안다.

“그는 24시즌 동안 메이저에서 197승 171패 390세이브를 했어. 선발투수로도 150승을 하고··· 한 시즌 20승을 하기도 한 특급 선발이었지.”

“그렇군요. 그를 롤모델로 삼으라는 건가요?”

“글쎄,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아무튼 그와 너는 유사점이 좀 있어. 아! 마무리 투수였을 때의 그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너무 헤벌쭉하지 마. 스타일상 그럴 수 있다는 거고 능력은 아직이니까.”

그런 대투수와 비교하기엔 내가 아직 너무 많이 모자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서 사람 기를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에커슬리와 호프만 모두 선발이었을 때 90마일 중후반의 패스트볼을 던지던 파워피쳐였어. 부상 등의 이유로 구속이 안 나오니까 불펜으로 전향을 했고 커맨드에 초점을 맞춘 피칭으로 변화를 시도한 거야. 하지만 결정적으로 원래 스타일을 바꾸진 않았다고 난 생각한다.”

‘이게 뭔 개소리야? 구속이 떨어졌는데 스타일을 안 바꿨다고? 그럼 바뀐 게 뭔데?’

이걸 감독에게 되물어보기에는 내가 감독과 보낸 시간이 너무 길다. 괜히 되물었다가는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1박2일로 들어도 모자란다. 그냥 동의하면 자기 말에 취해 진도가 팍팍 나간다.

“그렇군요. 역시 감독님다운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렇지. 그들은 구속을 잃은 후에도 피칭 내용에 파워 피처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 호프먼 같은 경우는 수직 무브먼트가 어마어마한 패스트볼로 높은 곳을 공략했고 애커슬리는 사이드 암에 가깝게 투구폼을 변형해서 패스트볼의 수평 무브먼트를 극대화했지.”

“아··· 예.”

머리가 멍해진다.

“혹자들은 호프먼의 체인지업이 어떻고··· 애커슬리의 슬라이더가 탁월해서···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건 부가적인 거야. 기본적인 패스트볼의 위력에 그런 것들이 곁들여지니까 돋보였던 거지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저도 그런 식으로 던지면 통할 거다라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감독님은···”

말 같지 않은 소리다. 이건 적재적소에 주무기를 활용해서 잘 던지면 된다와 같은 말이다. 잘하면 된다. 말은 쉽지만, 그 잘하기 위한 조건이 무척 까다로울 게 뻔하다.

“일단 넌 제구가 되잖아. 그러면 그들처럼 던질 수 있는 기본 조건은 갖춰진 거야.”

‘이런 긍정적인 말 뒤에는 항상···’

“느린 구속을 인위적으로 빠르게 만들 방법은 피치 터널이 길면 돼. 그럼 타자에게는 90마일이 95마일처럼 느껴지지. 네 경우에는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와 공의 초기 궤적을 맞추면 되겠지. 익스텐션은 시즌 중에 함부로 건드리면 제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건 시즌 후에···”

고 감독은 정말 날 심하게 굴렸다. 어느 순간 미스 마일리와 쑥덕대더니 AA의 합류 스케줄을 무려 일주일이나 늦춰버리기도 했다. 승격하고도 팀 합류 스케줄이 늦어지는 바람에 처음엔 팀에서 눈총 좀 받았다.

***

지금도 고 감독은 바로 정면의 관중석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지금 경기가 열리고 있는 리버프론트 스타디움은 1만 석 규모로 2021시즌에 개장한 별로 오래되지 않은 구장이라고 한다. A+때는 5,000석 정도의 구장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여긴 관중이 확 많아진 느낌이다.

이곳은 아직 생소해서 그런지 홈인데 홈 같지가 않다.

‘아담한 구장이 좋았는데 음. 퍼펙트도 했었고···’

추억은 추억이라서 아름다웠던 것이고, 사실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퍼펙트의 추억은 영원히··· 음.’

이 장면에서 홈런이라도 맞으면 어쩌면 바로 갈 수도 있다.

‘그건 사양이지. 그런 식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구. 이놈부터 일단 처리를 하고···’

포수 제프의 사인이 아웃코스 낮은 쪽을 가리킨다. 고개를 저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 마우어다. 사실 옛날에는 누가 있었는지 잘 모른다. 월터 존슨과 스티브 칼튼 같은 대투수를 알긴 하지만 너무 오래전 선수들이다. 요 이삼십 년 사이에 조 마우어 이상의 누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때 신이 빚은 포수란 극찬을 들었고 스몰마켓 트윈스가 2001년 전체 드래프트 1번 지명 후 계약금으로 515만 불을 안겼다. 2010년 8년 총액 1억8천4백만 달러의 장기계약을 안겨줄 만큼 공수 양면에 균형 잡힌 선수였다. 마크 프라이어를 2번으로 밀어낸 선수다.

그런 그의 팀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포수자원이 부족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왜 이 모양이야!’

제프란 친구는 팀의 세 번째 포수였다. 말하자면 백업의 백업이다. 이렇게 배터리를 이루는 건 처음이다. 연습 때도 한 번 맞춰보지 못했다.

어쩌면 타자들이 느끼는 생소함을 포수들도 같이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담 포수가 있었으면 하지만 나는 팀의 주력 투수라고 말하기는 곤란한 일개 불펜투수다. 전담 포수는 아직 어울리지 않은 옷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아직 트위스의 선수라고 말하긴 부끄럽긴 하다. 나는 현재 AA의 위치타 윈드 서지 소속으로 공을 던지고 있고, 타석에서 날 노려보는 근육질 멍청이들을 때려잡으며 계속 위를 향해 나가야 할 때다.

이구는 업슛이다. 최대한 초구와 같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타자의 어이없는 헛스윙과 포수의 포일이 동시에 나왔다. 다행히 미트로 공을 막아내긴 했고 주자들도 적극적인 베이스 러닝을 하지 않았기에 추가적인 진루를 허용하진 않았다.

‘이래 가지고서는 커브를 위닝샷으로 던질 수가 없잖아.’

투 스트라이크 이후였으면 상황이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나도 바보는 아닌데 감안해서 던진 거다.

제프가 타임을 요청하려고 하길래 손을 저어 말렸다. 본인 실수에 미안하고 혹시 내가 그 영향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흐름을 끊으려 했겠지만 난 상관없다.

‘불평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일부러 스트레스를 만들겠어?’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기에는 나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냥 웃었다.

삼구는 싱커다. 릴리스 포인트에 신경 쓰면서 가볍게 던졌다. 타자의 배트가 움찔하더니 끝내 나오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이번에 포수가 잘 잡았다. 다행히 싱커는 잡을만한가 보다.

일구 90마일의 패스트볼, 이구는 87마일 업슛, 삼구는 81마일 싱커였다.

체인지업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효과가 났다. 유인구를 남발하지 않는 정면 승부. 구속과 상관없이 나의 구위는 탁월하다.

다음 타자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지난 7게임 9이닝 동안 안타를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제 스탭과 선수 모두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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