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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4화 (24/200)

24화. 생활의 발견

감독의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마일리에게 들려주었더니 그때부터 그녀가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녀는 무엇을 해도 그럴듯하게 보인다.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한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동화가 된다.

‘헤헷.’

“여기 맥주 맛있네. 한 잔만 더 하고 집으로 가자.”

감독이 맥주 세 병에 취했나 보다. 수감 생활 몇 개월에 몸이 많이 축난 것 같다.

“제 집이요? 그런 게 있겠어요.”

“뭐? 그럼 어디 살아?”

“선수 숙소에 있죠. 말했었잖아요. 저 이제 부자 아니라고···”

아무튼 옛날 사람이다. 마이너에서 숙소 제공을 한 게 몇 년 되었는데 최근 소식에 너무 어둡다. 2022년 시즌부터 선수들 숙소 제공이 의무화되었다.

“선수 숙소? 그건 공짜냐?”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더니 감독이 또 해괴한 소리를 한다.

“아! 그럼 이제 마이너도 할 만하겠네. 우리 때는 눈물 적은 빵을 땅콩버터와···”

내가 알기론 이 양반 KBO에서 꽃길만 걸었다. 아마 2군 한 번 안 가봤을 거다. 대졸로 입단 첫해부터 1군이었다. 누릴 거 다 누린 양반이 이런 소릴 하니 기가 막힌다.

“저기 땅콩버터는 지금도 있는데 거기에다 샐러드 정도는 주거든요. 아침은···”

“그러니까 할 만하다는 거잖아.”

“군대에서 삼시 세끼를 소갈비, 등심, 안창살 이런 거 먹으면 군 생활이 안 힘들 거 같아요?”

“내가···”

그러고 보니 이 양반 군대도 면제였다.

‘정말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런 사람하고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그럼 넌 숙소에서 살고··· 그럼 난 어디서 지내야 하지?”

그걸 나에게 물으면 내가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도 이 도시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숙소와 야구장 이외에는 거의 다녀본 곳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면 감독도 이제부터 여기 같이 있어야 하는 거네. 그런 일은 어디에서 알아봐야 하는 거지?’

낯선 여행지에 왔으면 당연히 숙소부터 정하고 움직이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원래부터 유별났던 우리 감독은 그 범주에 넣기엔 너무 비범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이용해 야구장으로 직진하는 남다른 현실 감각을 자랑한다.

적당한 호텔을 숙소로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경제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그럼 내가 내줘야 하나? 나는 후불로 연봉을 보장하는 거잖아. 그럼 생활에 필요한 개인적인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좀 얌체 같은 생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계약금으로 20만 불을 받았지만, 실수령액은 그렇게 되질 않더라고’

미네소타의 개인소득세는 9.85%였다. 이게 미국의 주들 가운데 상위 5번째 안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뿐 아니라 연방 소득세가 있고, 고용주와 나눠 내는 거긴 하지만 6.2%의 사회보장세와 1.45%의 노인 의료보험세도 있다.

계약할 때 구단에서 도와줘서 어떻게 처리하긴 했지만, 처음엔 사기당하는 줄 알았다. 계약금으로 20만 불을 준다더니 훨씬 작은 액수가 구좌에 들어왔었다. 나중에 들으니까 개인소득세가 없는 주가 8개인가 있다는데 FA 할 때는 기필코··· 이번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수입이라고 해봐야 연봉으로 따지면 1만 불이 될 듯 말 듯하다. 시즌 중에만 급여를 받을 수 있는데 일 년 중 시즌 5개월을 제외한 7개월을 생으로 버텨내야 한다. 원래 가지고 있던 돈까지 다 합쳐도 지금 잔고가 20만 불이 안 된다.

그걸로 메이저리그 갈 때까지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시즌 후 돈 버는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하루빨리 메이저로 올라갈 수 있도록 훈련에 열중하는 게 낫다. 개인 훈련도 그냥 할 수는 없다. 그 비용은··· 갑자기 머리가 답답하다.

“감독님 제가···”

염치 불구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감독에게 다 이야기했다. 모양새는 안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감독은 상당히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FA도 했었고 선수 은퇴 후에도 직업인으로 긴 시간을 보냈으니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는 있을 것이다.

“영수야. 사회생활이란 게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좀 풀리면 서로 나누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런데 왠지 투아웃 잘 잡아 놓고 볼넷과 몸에 맞는 공으로 타자들을 출루시킨 것 같은 기분이다. 감독이 이렇게 좋은 말을 하고 나면 바로 뒤따라오는 말은 대개 아주 험했었다.

“사회생활의 기본이 협동이라면 그 협동에는 신뢰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하지. 나는 너의 인성과 능력을 신뢰하지. 아! 물론 야구에서 그렇다는 거야. 하지만 이건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주로 일상생활과 관계된 거잖아. 그렇지?”

“그건 그렇죠.”

찝찝하긴 했지만 맞는 말을 하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들어봤지?”

‘하아! 어쩐지···’

“예.”

나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이런···’

눈을 질끈 감았다.

“투자금이 커지면 배당이 커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아무래도 금액이 커지면 회수 못 할 위험도가 높아지지. 내가 예전에 너 FA되면 그 금액의 몇 % 정도만 받겠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내가 추가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면 그 부분에 대한 조정이 따라와야 합리적인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안 할 게 아니라면 이왕이면 시원하게 말하는 게 낫다.

“당연하죠. 전 감독님과 첫 만남에서 감명 깊게 들었던 기브 앤 테이크를 생활신조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에고, 아 몰라.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데··· 후불인데 일단 질러···’

“그렇지. 역시 네가 사회생활을 좀 하더니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구나. 우리 사이에 세세하게 말해 정하긴 그렇고 두 자리 숫자 정도는 맞춰주는 걸로 알고 있으마.”

두 자리면 최소 10%로다. 원래 한 5%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상 지출이 두 배가 되어 버렸다.

“예.”

왠지 모르게 기운 빠진 목소리가 나온다.

‘나를 인정해서 담보도 없이 자기 돈과 시간을 쓰겠다는 거잖아. 잘못되면 안 받겠다는 조건인데 내가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지.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내가 말로는 욕심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아무튼 감독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끝에는 이런 찜찜함이 남는다.

‘엉? 이상한 느낌이···’

미스 마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생각이 끝났나 보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 때문에 방해를 받아 멈춘 것일 수도 있다.

“이 라운드의 토론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그냥 얼버무리고 지나갈까 하다가 고 감독이 내 훈련 스케줄에 개입하려면 구단의 협조가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단 직원에게 미리 말해 놓으면 편의를 좀 봐주지 않을까?’

“아! 그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감독과의 개인적인 계약과 그 필요성에 대해 설명해줬다.

“선수가 개인적으로 인스트럭터를 고용하겠다라는데 특별하게 해로운 게 아닌 이상 그것에 대해 구단이 간섭할 필요는 없겠죠.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아주 긍정적인 답변이다.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이 외면에만 존재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문제점이 좀 있을 것 같네요.”

“예? 무슨···”

마일리는 내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고 감독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고는 입국을 어떤 방식으로 하셨나요?”

“What?"

고 감독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고 감독이 일상 회화는 곧잘 하는데 조금만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이해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고 감독은 허둥대고 있었다. 아마 그도 잘 모를 거다. 평생 그런 걸 직접 해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실 대개의 운동선수 출신들이 이런 부분에 약점이 있다.

“아마 ESTA(전자여행허가제)를 신청해서 오셨을 거예요. 맞죠?”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내 경우는 구단에서 수속을 다 도와줬었다.

ESTA는 선박이나 항공기를 통해 90일 이내 여행, 경유, 사업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발급받아야 하는 여행 승인서라고 한다.

고 감독이 특별한 비자를 신청하지는 않았으니 그게 맞을 거라고 어영부영 대답을 했다. 썩 자신 있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건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구단의 문제일 수도 있죠. 만약 미스터 고가 비자 없이 미국에서 영리적 행위를 한다면 불법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그걸 구단에서 동조할 수는 없죠.”

“그렇겠군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 감독은 필요한데 그가 조언하는 게 불법이라면···

‘이민 전문 변호사라도 찾아봐야 하나?’

“제게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말을 들어보니까 미스터 고에게 지금 당장의 수익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건 그렇다. 고 감독은 상당한 기간 동안 자기 돈 쓸 생각을 하고 미국에 온 사람이다. 고 감독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우리 구단에 파트타임 인스트럭터로 미스터 고를 채용할 것을 건의해 보겠습니다. 다만 구단 예산 계획에는 없던 일이라 된다고 하더라도 최저 임금에 준한 급여밖에는 못 받을 겁니다. 그렇지만 구단에서 비이민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꽤 합리적인 제안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말을 좀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큰 비용 부담 없이 부려 먹겠다는 말이 되지만 물 좋고 바람까지 좋은 정자는 없는 법이다.

고 감독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그도 쉽게 동의했다.

“지금 어쩌겠냐. 그렇게라도 구단에서 도와주면 감사한 거지. 급여야 문제가 될 게 뭐가 있겠어.”

때가 왔다.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생기고··· 히히힛. 이제 수금할 시간이네.’

“저기 감독님. 기브 앤 테이크 아시죠?”

“뭐?”

“투자 조건이 달라졌는데 수익 배분율이 그대로라면 그걸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의 굴욕을 견뎠더니 예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이건 구단과 나의 관계지 니가 무슨 상관이냐.”

“전 투잡 싫어해요. 투잡 금지를 풀어주는 건데 원고용주인 저와 관계가 있지요.”

“이게 어떻게 투잡이야. 어차피 같은 일을 하는 건데···”

“그건 아니죠. 원래 이런 식으로 될 거였으면 애초에 면회 가서 그런 식으로 계약하진 않았겠죠.”

매우 좋은 타격감을 느끼며 아주 유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열쇠는 필요 없었다.

A+에서 그 지독하다던 원정경기를 경험할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홈 8연전이 끝나던 날 나는 AA로 승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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