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3화 (23/200)

23화. 재미로 사는 건 아니다

“영원히 안 된다고는 안 했어.”

야구 선수를 영원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안 되면 미래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직 싱글A 선수에게 이런 말장난은 상처가 된다.

“저 오늘 퍼펙트 했는데 뭐가 그리 못마땅하세요?”

이제 어제의 나는 가고 새 시대의 내가 왔다. 무슨 말에든 그저 예 예 하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기 싫었다. 짐작되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너무 순순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부끄럽다. 미스 마일리도 있는데···

“퍼펙트? 그게 뭐? 나도 지금 하라면 당장 할 수 있어. 현역 은퇴한 지 십몇 년 되었지만 어디 사회인 야구팀 정도 가서 던지면 못 할 거 같냐?”

말이 안 된다. 사회인과 전문 선수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이너긴 해도 A+ 와 그걸 비교하는 건 좀 심하잖아요. 왜 제가 AAA쯤에서 던지면 안 될 거 같으세요?”

“아니, 안 통하진 않을 거야.”

괜히 고 감독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본인은 자기 말이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는 것 같다. 너무 태연하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 정말 옛날부터 속 뒤집어지게 말하는 건 어떻게 변하지를 않냐!’

“이대로 AA로 올라가면 방어율 한 2점대는 찍지 않을까 싶은데··· AAA는 3점대··· 잘 풀려서 운수 좋게 메이저 올라가면 4점대 이상 찍겠지.”

상위 레벨로 갈수록 기록이 안 좋아질 것이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 감독은 메이저리그 경험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구체적인 수치를 말하는 건 오버다.

“감독님이 어떻게 그리 잘 아실 수가 있어요? 직접 여기 타자들을 상대해 본 것도 아니면서···”

조금 심한 표현이긴 했지만 사실이다. 한때 메이저리거를 꿈꾸지 않았던 선수는 없다. 감독은 KBO에서 초엘리트 투수였다. 이런 말에 자존심 상해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어야···’

요즘 내가 너무 어려운 말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스스로 놀랄 지경이다.

‘지난 늦가을 뿌린 씨가 봄에 발아를 했네. 하아! 엄마 미안해요. 내가 이런 줄 알았다면 엄마 말씀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봐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너 무슨 생각 하냐? 생각해보니 내 말이 맞다 싶지?”

정말 분위기 파악 못하는 건 병이다. 불치병.

‘불치병? 좀 이상하네. 하! 한 글자만 더 늘이면 짝이 딱 맞는데··· 음. 그렇지. 불치병자.’

“영어로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잖아요.”

마일리의 항의에 영어 짧은 고 감독을 위해서 어려운 단어는 내가 대신 번역해주기로 했다. 요즘 기술 문명이 발달해서 전화기에 대고 말하면 다 원단어가 나타나고 번역도 된다, 아직도 선글라스를 라이방이라고 말하는 고 감독은 모르겠지만.

“넌 용 머리가 될래 뱀 꼬리가 될래?”

“용 머리가··· 저기 감독님 말씀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야! 대가리는 어딜 가도 대가리인 거야. 한 번 꼬리는 영원히 꼬리밖엔 안 돼. 어쭙잖게 꼬리가 대가리 노릇 하려고 하면 망하는 거야.”

‘이거 내 욕하는 거 맞지?’

원래부터 난 참을성이 좋았다.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이런 모욕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 감독의 말에 대한 내성을 대학 4년 동안 꾸준히 길러 왔었다.

‘참자 참어. 참을 인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너 오늘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질 게 마땅찮았지?”

“그건 오늘 포수가···”

“음. 그건 인정. 하지만 좋은 포수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건 정말 아니다.

“업슛을 타이밍에 맞춰 던질 수만 있었어도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거고요.”

“싱커는 좋더라. 예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각 조절이 되는 거 같더구나. 겨울 동안 애 많이 썼겠더라. 오늘 넌 딱 그거 하나로 버텼어.”

업슛 이야기를 씹혔다. 이 고 감독이란 양반은 꼭 자기 불리한 말은 어영부영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경기 내용이 그렇기는 했어도 그건 포구 문제 때문에 던질 수 있는 구종을 제한당한 탓이다.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좋아요. 그렇다고 치구요. 업슛을 안 던진 거지 못 던진 게 아니잖아요. 그걸 왜 내 잘못처럼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 내가 머리 나쁜··· 고용주가 될 사람을 위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마. 내가 상대 팀이라서 널 분석했다면 어떻게 상대하려 하겠니?”

흥미로운 소재이긴 하다.

“그걸 머리 나쁜 제가 어떻게 알아요? 훌륭한 코치가 잘 아시겠죠.”

좀 비꼬듯 말했는데도 고 감독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넌 냉정하게 말해서 자유롭게 던질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구종이야. 그거 가지고 각을 키우거나 줄여서 던지는 거야. 아! 가끔 빠른 볼로 구속을 조절하는 효과를 주니까 체인지업 정도를 추가할 수는 있겠네.”

“오늘 커터 던지는 거 못 보셨어요? 어떻게 그게 단일 구종이에요?”

“우리 기준 이하는 빼고 말하자꾸나. 그런 똥볼 이야기까지 하려면 내 머리가 터질지도 몰라.”

고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너 똥볼을 어떻게 번역할래? 더티 볼이라고 표현하면 저 아가씨가 구질이 더럽다는 좋은 뜻으로 오해할지도 몰라.”

‘낄낄거리는 저 면상에 한 방을···’

정말 감옥에서 반성 대신 사람을 열 받게 하는 화술연구를 하고 온 것 같다.

“다 좋아요. 감독님 말이 다 맞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정 대립은 피해야 한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고 감독의 능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내게 가장 득 되는 길이다.

‘고 감독 당신은 인스트럭터잖아. 해결책을 내놓으시오. 돈값을 하세요.’

후불 계약도 계약은 계약이다. 인간성은 좀 그렇지만 능력이 확실한 코치니까 해답을 줄 것으로 믿는다. 지금까지 한 대화 중에 고 감독은 날 놀리기만 했지 답을 말해주지 않았었다.

“야! 벌써 손들면 어떻게 해. 좀 더 해야지. 타격감 좋았는데··· 이러면 재미없잖아.”

‘정말··· 이 사람이··· 제발 절 악의 길로 인도하지 마세요.’

“헤헷. 이쯤에서 그냥 해조~요.”

미스 마일리도 있고 해서 이런 모습은 피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다. 고 감독은 원래 이런 거에 약했다.

“야! 그거 하지 마. 꿈자리 뒤숭숭해져.”

“아잉! 그러지 말고 해조~용.”

미스 마일리가 보고 있는 데서 이 짓거리까지 하려니 확 죽어버리고 싶다.

‘한국말도 모르는데··· 농담처럼 넘기면 잘 모를 거야.’

난 야구가 무척 중요하다.

‘흑흑. 이 수치를 갚아 줄 날이···’

“업슛은 오늘 정도 사용빈도가 딱 좋아. 지금은 분석이 안 돼서 그렇지 곧 상대들이 알아차릴 거야. 오늘 포수가 문제이긴 했지만 그런 문제가 없었더라도 많이 던지면 안 돼.”

업슛은 기본적으로 유인구다. 그 공이 위력적이려면 최초 궤적이 존에 들어가는 싱커와 비슷하게 던져야 하는데 그렇게 던지면 업슛은 결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수 없다.

“음···”

“지금 레퍼토리로는 우타자 상대가 어려워. 지금 던지는 싱커가 좌타자에게는 아웃코스로 빠져나가는 식이 되니까 괜찮은데 우타자에게는 백도어성이 되잖아. 그럼 분석되고 나서 게스 히팅으로 그 코스를 노리면 메이저급 타자들에게는 높은 확률로 홈런이 나올 거야.”

눈으로 다가오는 공이 익게 되면 그렇다. 투구의 기본은 타자의 눈에서 멀어지는 공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장타가 방비된다.

“오늘 그 커터는 앞으로 안 던지는 게 좋아.”

“구속을 더 높이면 어떨까요?”

“그게 쉽겠니? 그리고 어떻게 네 최고 구속 가깝게 그걸 던질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메이저에서 빠른 구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그런 트레이닝은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가. 네 구속을 인위적으로 더 올리는 건 반대야.”

그건 그렇다. 언더의 약점은 구속이다. 언더스로우의 강점인 변화와 로케이션으로 타자를 상대할 생각을 해야지 구속을 올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에러다.

지금 고 감독의 말은 지금 내 투구가 생소한 궤적과 볼 배합이 분석되지 않아 하위 리그에서는 통하지만, 타자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힘들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결국 길게 던지면 안 된다는 거네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만 빨리 메이저 올라가서 정착하려면 지금 상태로는 그 방법이 가장 좋지. 더군다나 짧게 던지면 빠른 볼의 빈도를 좀 더 올려도 돼. 선택지가 늘어나면 타자는 결정구에 대한 컨택이 더 어려워지겠지.”

“말씀하시는 건 단기 처방이지요?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펜도 괜찮기는 한데 좀 아쉽다. 아니 많이 아쉽다. 좋은 선발이 3,000만 불 이상 받는 시대지만 최상급 불펜이라도 1,000만을 받기가 어렵다. 프로 스포츠에서 돈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사실은 오늘 내가 좀 놀란 부분도 있어.”

“싱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 연습 때는 잘 안되더니 오늘 어쩌다 보니 되더라구요. 완전히 감 잡았어요. 뭐든지 감만 잡으면···”

“그게 되는 걸 보고 메이저에서 4점대 방어율 이야기를 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메이저에서 선발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감독은 나에게 묻고 있었다. 평범한 선발투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특급 불펜투수를 할 것인지···

“생각보다 메이저리그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용병으로 온 친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봤으니까. 그들 대부분이 일명 AAAA급 선수라고 불리는 것 알지? 내가 보기엔 지금 상태로 네가 선발을 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마이너의 수준은 넘었지만, 메이저에서 뛰기에는 한 끗 모자라는 선수를 비아냥거리듯 그렇게 불렀다.

“아까 영원히 그런 건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지. 만약 네가 우타자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던질 수 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지. 하지만 그건 될지 안 될지 장담하기 어렵잖아. 물론 그 공 수준이 오늘 던지던 커터 정도면 곤란하고.”

봉인한 슬라이더 이야기다. 싱커과 구분하기 힘든 릴리즈 포인트를 가지고 공의 휘는 각을 조절해 존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해서 넣을 정도면 된다. 느린 구속을 커버하려면 공의 움직임 수준은 현란해야 되고··· 말로 하면 하주 쉽다.

“다 싸운 건가요?”

미스 마일리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싸우다니요. 우린 원래 이랬어요. 재미있지 않아요? 하하핫.”

사실 이런 거 나도 별로 재미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