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야성의 부름
8회도 포일 하나 나온 것 빼면 별거 없었다.
‘아! 식겁했네.’
결정구로 업슛을 하나 던졌는데 불안불안하더니 포수가 놓쳤다. 다행히 미트에 맞고 튄 공이 멀리 가지 않아 낫아웃 상태에서의 1루 송구가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8회를 마무리하긴 했는데 마음이 답답해졌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욕심난다.
‘하부리그에서 의외로 이런 기록이 잘 없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나만 잘 던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쓸 수 있는 무기를 제한시켜놓고 여기까지 온 게 요행이다.
‘마음 비우자고··· 하부리그에서 그런 기록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던 대로 싱커로 밀어붙여.’
9회 수비를 나서면서 포수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웃어줬더니 포수가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참 여러 가지 하네.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공 하나 던질 때마다 가슴이 뜨끔거린다. 포구할 때마다 포수의 마스크가 들썩거리는 걸 보니 저놈 아직 딸꾹질이 멈추지 않은 것 같다.
하늘은 맑다. 이상하게 오늘은 땀 한 방울 안 흘린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특별히 컨디션이 좋은 날일지도 모르겠다.
미트를 향해 이 경기의 마지막 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을 뿌렸다.
“헉!”
각도를 줄인 싱커가 아니라 원래 던지던 대로 회전이 걸려버렸다. 손가락을 빠져나간 공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오만 것이 다 사람을 이것저것 신경 쓰게 만들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파울, 파울, 타자 놈아 힘 좀 내라.’
타자의 악다문 입, 유려한 힙턴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타자의 모션이 끊어져 보이는 걸 보니 오늘 컨디션이 겁나게 좋긴 한가 보다.
타자의 배트가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믿을 놈 하나 없네.’
파울이나 인플레이 타구가 나왔으면 했는데 글러 버렸다. 차라리 그게 낫아웃보다는 아웃 확률이 높다. 딸꾹질하던 간 작은 포수 놈이 이 공을 잡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노히트의 기회는 남았잖아.’
이제는 익숙해진 자위로 스스로를 달래려···
“어?”
잡았다. 포수가 포구에 성공했다. 곧이어 심판의 힘찬 콜이 나왔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미친··· 이럴 거 진작 좀 잡지. 그럼 이런 개고생을 안 해도 되었잖아. 저 놈도 변태네. 나한테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고··· 욕하기 전에 잘했으면 서로 좋은 거였잖아.’
쟤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지 모르겠다.
“이런 XXX···"
내 입에서 원색적인 한국어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놈 때문에 이 경기 내내 해 온 노력이 너무 아깝다.
생각이 아닌 육성으로 마무리를 했더니 마음이 급격히 평온해졌다.
‘하아! 너무 개운하네. 응? 왜? 몰라? 투수란 족속은 원래 이기심이 뇌 용량의 90%를 차지해. 나 정도면 상당히 유순한 편이지.’
이건 나의 루틴이다. 게임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그 게임에 털고 가야 다음 게임에 지장이 없다. 그래서 힘든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대개는 속으로만 하는데 오늘은 많이 힘들었는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해야겠어. 효과가 더 조으네.’
감추면 마음의 병이 된다. 가끔 내가 좀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난겨울 본 책에 의하면 계획은 범죄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구체적인 실행 의지나 행위가 없는 생각만으로는 죄가 안 된다.
도덕적인 문제는 제기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성현의 말과 같은 도덕적 기준으로 살아왔다면 나는 지금 야구장에서 공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딴 사당에서 만인에게 숭상받고 있으리라.
상상력은 인간의 고유 속성이며 제한이 없다. 현실에 없는 걸 나에게 찾으려 하지 마라. 난 몹시 떳떳하고 이렇게 마음이 개운해지면 주변에 매우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관중과 우리 팀 전체의 환호를 받으니까 드디어 지금 이 운동장의 주인공이 나라는 자각이 든다.
포수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뒤통수를 한 방 때려주고 싶은 놈이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때론 가면을 써야 한다.
얼싸안고 감격을 누리기엔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나에게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스쳐 갈 수많은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는 그일 뿐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칭찬을 받았지만, 기분이 그저 그랬다.
‘미국 사람들이 확실히 립서비스가 좋아.’
끝나고 나니까 현타가 온다. 왜 그렇게 가슴 조이며 공을 던졌는지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된다.
대학생이 리틀 야구에 선수로 출전해 퍼펙트를 했다면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원한 야구는 이런 게 아니었다. 불완전함 속에서 요행히 얻어낸 완전함이 내 목표는 아니다.
경기 중에 떨었던 건 스스로 불완전함을 너무 잘 알아서였던 것 같다.
불안감의 해소를 위해 제3자에게 그 이유를 돌렸었다. 매우 부끄럽게도 그렇게 자위를 하고 그 힘으로 이닝을 버텨나갔다. 자신감의 분출이 그런 식으로 이루진다는 건 많이 곤란하다. 경기 중엔 그렇게 집중이 안 되더니 끝나고 나니까 오히려 집중해 복기를 하게 된다.
흥분의 시간이 지나고 팀원들과 라커룸에서 나가 버스로 향하는데 감독이 불렀다.
“여기는 트윈스 스카우트 팀에서 나오신 마일리 양이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는군.”
‘구단 직원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뚫어지게 날 쳐다봤던 건가? 아무리 업무의 연장이었지만 사적인 감정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 뜨거운 눈빛을 해석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펙트라는 빅 임펙트까지 있었다. 어쩌면···
트윈스 구단 직원을 만나본 것은 계약 당시 존슨이라고 하는 배 나온 중년의 스카우트 팀장이 유일했다. 얼굴을 본 사람은 여럿이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사람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 여신님은 안 계셨다. 그건 틀림없다. 이 미모는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미쿡이 다르긴 하네.’
칙칙한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난 양성이 평등한 이상적 환경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릴만하다. 내가 한국 야구장에서 본 여성 관계자는 아나운서뿐이다. 그 여성은 엄밀히 말해서 야구 관계자라기보다는 방송국 관계자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트윈스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가진 좋은 구단이었어. 이런 인연이라면 야구가 몹시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선순위가···’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런 분이 찾아온다면 내 시간은 항상 오픈되어 있다.
“잠깐 나가시죠. 저녁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질문도 좀 있고···”
‘헉!’
말끝에 여운이 남는 그윽한 허스키 보이스다.
‘개인적인 질문이라니··· 이럴 수가··· 이건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
감독을 쳐다봤더니 미리 말이 되어 있었던 건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감독의 강권에 못 이겨 팀원들과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어쩔 수 없이 마일리를 따라나섰다.
‘아! 잊었네. 열쇠를···’
우리 팀의 공용 숙소는 자정이 되면 출입구가 잠긴다. 그 시간 이후라도 나오는 건 자유로운데 들어가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숙소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열쇠를 받았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진창을 걸을 땐 장화가 필요하고 제비가 낮게 나는 건 비가 올 징조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달무리가 보이는데 당연히 우산을···
미스 마일리를 뒤따라 주차장으로 갔는데 그 앞에 어디선가 본 듯한 동양인 아재가 있었다.
“영수야.”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어? 누구세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상당히 오랜만에 들어본 한국어라 변별력이 떨어진 탓일 수도 있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놈이! 농담도 때를 가려야지. 하늘 같은 선생님이 오셨으면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도 시원찮을 거 같은데··· 누구세요? 그래 누굴 거 같니?”
“저기··· 감독님 목소리로 감독님처럼 말씀하시는 아저씨는 누구신데···”
그 아저씨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모자챙 아래서 많이 봤던 눈매가 나타났다. 올백머리를 야구모자로 바꿔보니까 이제야 감독 같다.
“매치가 안 되잖아요. 그 수염은 뭐고 모자는 왜 안 써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요?”
내 기억 속에 감독은 언제나 모자 쓴 사람이었다. 저런 머리 스타일은 내 상상력의 한도 밖에 있었다.
“야! 니가 이제 머리 컸다고 그런 막말을··· 어휴! 할 수 없지. 이제부터 날 고용할 사람이니 이번만은 참아준다.”
“고용주에게 고용인 말투가 그게 뭐예요. 앞으로 연봉 많이 드릴 테니까 야, 너 이런 말은 지양해 주셨으면··· 그리고 저 혹시 탈옥하셨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반갑긴 한데 어떻게 감독이 지금 이 시기에 미국 땅에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구속 상태는 보석 같은 걸로 나와서 면했다고 쳐도 재판 중일 텐데··· 보석이나 재판 중에 출국이 가능한가?’
“넌 세상 짬밥이 짧아서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의 오묘한 세계가 있단다. 애들은 몰라도 돼.”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더 궁금하다. 어쨌든 탈옥을 했다든지 밀항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어디든 가서 이야기하죠. 여기 햇볕이 좀 뜨겁네요.”
미스 마일리의 제안에 고개가 돌아간다. 그녀에게 미국 사람 특유의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같이 온 거? 미스 마일리는 어떻게 알고··· 감독님. 원래 트윈스 구단과 통하는 뭐가 있는 거였어요?”
“음. 낭중지추란 말이 있지. 그게···”
“레이밴을 라이방이라고 하시는 아저씨가 웬일이세요? 그런 말을 다 하시고···”
“짧게 설명하자면 나도 몰랐던 내 내면의 야성이 인연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말을 계속 돌리는 것 보니 감독에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 같다. 길게 이야기하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다. 마일리의 차를 타고 이동해 시내 호텔의 바에 자리를 다시 잡았다. 깡촌이긴 해도 오성급 호텔 정도는 있다.
“아! 미스 마일리랑 그렇게 알게 되셨구나. 우연히 만난 거였네요.”
“세상에 우연이 어디 있냐. 다 인연이 닿으니까 만나게 되는 거지.”
이 아저씨 말투가 어딘지 수상하다. 맥주 한 병에 취했을 리가 없는데 많이 이상하다.
“자! 이제 말 해봐요. 왜 선발은 안 되는지···”
갑자기 마일리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선발이 안 돼? 누구? 나?’
감독이 야구에 대해서라면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퍼펙트게임을 한 피처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엄청 궁금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