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1화 (21/200)

21화. 나대지 말자 (2)

2번 역시 우타자다. 똑같은 코스로 커터를 하나 던진다. 큰 횡각의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슬라이더의 각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단기간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슬라이더는 봉인했다. 구질 자체는 훌륭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대체로 커터를 던진다. 사실 공 자체는 별거 없다. 변화가 그리 날카롭지 않고 구속이 빠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타자는 앞의 타석에서 싱커를 봤다. 이 공이 싱커와 콤비네이션을 이루면 내용물이 달라진다. 2번쯤 치는 타자는 대개 배트 컨트롤이 좋다.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가 대개 2번을···

‘헉! 여긴 미국이잖아. 그럼 강한 2번···’

딱-

‘악! 소리가···’

투구 직후 눈으로 잘 맞은 타구를 좇기는 어렵다. 그래서 제일 먼저 타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타격음이다. 이건 정타의 소리였다. 관중의 함성이 뒤따랐다. 투수를 오래 하다 보면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젠장, 생각 없이 던지다가 맞아버렸네. 병신 XX을 해라. 떠먹여 주는 것도 못 받아먹고···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버려라.’

자책이 심하게 된다. 화가 풀어질 줄 모른다. 고개를 들기가 싫다.

‘에잇, 빌어먹을 퍼펙트 깨졌다고 좋아하기는··· 그래 잘난 놈 꼬꾸라지는 걸 즐기는 게 대중의 숨은 심리지. 한국이나 여기나···’

잠시 쭈그린 채 심호흡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부 리그에서 안타 하나 맞았다고 이 꼴이라니··· 잘난 놈으로 살아야 할 운명인 내가 이 정도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허리를 펴고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주자도 없고 스코어보드의 숫자도 변하지 않았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건···

‘히힛. 어이구, 잘 맞았다고 다 안타가 되진 않지.’

아무리 잘 맞아도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향하면 소용없다. 짐짓 모르는 척 글러브 낀 왼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파인 플레이를 해준 누군지 모르는 야수에게 하는 감사의 표시였지만 관중석에서 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뭐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직 못 알아듣는 말이 많다. 아무려면 어떨까. 지금은 아무 상관없다. 좋은 의미라는 건 다 이해했다.

‘그래, 여기가 우리 홈인데 설마 악담이기야 하겠어? 오해해서 미안해요. 내가 좀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줘요.’

우리 팀이 빳따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수비는 빈말이라도 좋다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모자란다. 그동안 여러 번 봐왔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에잇, 애들이 기본만 하면 됐지. 싱글A에서 뭘 더 바라겠어. 수비마저 잘하면 여기 있겠냐구.’

아무래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타구가 안타가 되지 않는다면···

‘우주의 기운이 날 돕고 있는··· 음. 이건 철 지난 유행어 같은데···’

운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불가해의 무엇인가가 나를 돕고 있다.

‘그렇지. 이렇게 생각해야 그럴듯하지. 일테면 조상의 음덕 같은 것. 바다 건너고 산도 넘어 멀리도 오셨네.’

“어?”

금방 뭔가 이상한 게 보인 것 같다.

‘동양인이 별로 없는 동네라서 다 비슷하게 보이는 거겠지. 그건 거 있잖아. 확증편향이라고 하나?’

고 감독이 지금 여기 있을 수가 없다. 백금발의 그녀 옆에 보이는 검은 라이방의 아저씨는 분명히 다른 사람일 것이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수염이 덥수룩하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왜 고 감독처럼 생각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빳다, 라이방 이게 다 감독이 자주 쓰던 추억의 단어들이다. 이거 알면 아재다.

마음을 정화하려고 여신님을 보았는데 엉뚱한 아저씨 때문에 정화가 되려다 말았다.

‘에구, 공 던져야지. 경기 중에 무슨 생각을 이렇게 하는 거야?’

상위 리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여기서는 경기에 집중이 잘 안 된다.

틱-

‘아이구, 또 왔구나.’

타구가 2루수 앞으로 돌돌 구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타자 놈들이 너무 못 친다. 이러다가 대충 던지는 습관이 생길까 두려울 지경이다.

7회를 막았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여섯이다.

***

“한국 사람인가요?”

6회 공수 교대 시간에 So가 덕아웃으로 다가오자 옆의 남자는 열렬하게 So의 이름을 불렀다. 영수라는 이름이 확실히 귀에 들어왔다. 이름을 부르는 게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일리는 가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특히 그의 아버지.

“예. 맞습니다.”

“이름을 부르던 선수와 잘 아는 사이 같네요.”

마일리는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이었지만 대인 관계에서 자신의 여성성이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가장 사용하기 쉬운 도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강조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그 여성성에 묻혀 버리지만 많은 경우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의 역할에 매우 유용했다. 그동안의 사회생활 경험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발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모르는 사람의 질문에도 상대의 입은 벌써 경계심을 풀고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의 코치였어요. 대학 때···”

So에 관해서 계약 전 상당한 사전 조사가 있었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평범한 일상을 가졌을 수줍은 청년. 그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을 내렸었다. 워크 에씩은 상급.

“오랜만의 만남에 즐거우신가 보군요. 전 트윈스에서 일하고 있어요.”

소영수의 이메일을 구단의 대표 주소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은 것이 마일리였다.

“아! 그렇군요. 미스··· 하핫. 나는 고하라라고 하는데 그냥 고라고 부르면 됩니다.”

고라고 불러 달라는 상대의 영어가 썩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은 된다. 고라는 코치에 대해서 마일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 뜻밖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것을 내색하는 사회초년생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다.

“아직 못 만났어요. 연락처가 바뀌어서 연락을 못했어요.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냥 왔죠.”

“그렇군요. 오늘 So를 보시니 어떤가요? 대학 때와 피칭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마일리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다.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부자연스럽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적당한 소재로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답에 대한 별다른 기대도 없었다.

“대학 때는 사용 구종도 단순했고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죠.”

“지금은 어때 보이나요?”

고 감독이 막 입을 열려는데 공수 교대가 되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무릎 위 태블릿으로 돌렸다.

고 감독은 그저 그런 경기 내용에 무료하던 차에 말벗이 생겨서 기분이 괜찮았다. 더군다나 스스로 트윈스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백금발의 여인은 구단 홍보 모델급의 여신이 아닌가!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영어가 짧아서 일한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주제를 막 말하려는데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는 소영수에게 리그의 수준이 맞지 않았다. 타자들이 저런 수준의 싱커에 대해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고 있었다.

“저런 바보같이···”

그냥 위아래로 낙차에 변화를 줘가며 찔러 넣기만 해도 꼼짝 못할 타자들에게 어정쩡한 공으로 코너워크를 시도한다.

“뭐 하는 짓이야. 타자들에게 아웃 코스를 익숙하게 만들어 놓고 비슷한 코스에 되지도 않은 공을 던지면 어떻게 해.”

저런 식이면 메이저 아니 웬만한 KBO 타자에게도 일격을 맞을 수 있다. 운이 좋아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긴 했지만, 타자의 타격 기술이 조금만 더 정교했다면 장타를 맞았을 것이다.

고 감독이 혼자서 고함을 치듯 한국어를 내뱉었지만, 관중들의 환호에 묻혀 큰 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고함이 마일리의 주의를 끌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저런 식으로 던지면 안 돼요.”

“왜 그렇죠? 백도어성으로 떨어지는 싱커 다음에 반대 움직임을 가지는 커터잖아요. 저건 타자가 잘 친 거지 투수가···”

구단 직원이라더니 좀 아는 게 있긴 하다. 하지만 고 감독에게는 가소롭게 들렸다.

“언더스로우는 저렇게 던지면 안 돼요. 기본적으로 구속이 느리다고··· 쟤가 평속으로 150 아니 92마일 정도를 던질 수 있다면 저렇게 던져도 되지. 안 되잖아. 느리면 변화가 크든지 의외성이라도 있어야 못 친다고.”

고 감독은 열이 올라왔다. 아무리 하부 리그라지만 큰 게 진행 중인데 코치들은 뭐 하나 싶었다.

곧 투수가 문제없다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고 감독에게는 허세로밖에 안 보였다.

“당신네들은 왜··· 쟤 그러니까 So를 선발로 쓰는 거지?”

“잘 던지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마일리는 어이가 없었다. So는 마일리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큰 꿈을 가지고 야구판에 들어왔지만 얼마 전까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스카우터로 입사했지만 하는 일은 사무보조원 수준이었다. 단순한 통계치의 추출과 조합이 그녀의 업무였다. 정작 그 자료의 분석과 실행에는 본인은 끼지도 못했다.

그러다 운명처럼 이메일을 보았고 So를 발견했다. 그만 잘 자라주면 그녀의 입지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 확실하다.

더군다나 GM으로부터 그를 전담해서 관리하라는 입사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받았는데 그런 내 선수를 폄하하다니,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들어.”

고 감독은 황당했다. 전문가가 알려주면 귀 기울여 듣고 참고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든지 실행에 반영해야지 트윈스 직원이랍시고 무조건 배척하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성을 존중하지만 고 감독에게 이런 감정적인 측면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거 봐요. 아가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이름을 몰랐다. 그냥 미스라고 호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그 말은 성차별적(Sexism)이야.”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면 표정에 경악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헉! S로 시작했어. 허헛. 초면에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많이 곤란한데··· 내가 틀림없이 잘못 들은 거겠지?”

고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부끄럼이 많은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감당해 낼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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