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대지 말자 (1)
“스트라익.”
타자의 고개가 뒤로 획 돌아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주심의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쳐에 타자가 입맛만 다신다.
‘야! 대충 좀 해라. 니 눈보다야 기계가 정확하지 않겠니?’
한동안 하부 리그 경기에 기계판정 시스템이 시범 운영되다 작년부터 A+ 모든 경기에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건 멀지 않은 장래에 메이저리그 경기에도 적용된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된 이상 포수의 프레이밍은 무의미하다. 볼 판정에 유리하게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포일을 범하지 않도록 최대한 안전하게 잡아내는 것이 현재 방식으로는 좋은 포수다.
해왔던 방식을 바꾸는 것에 기계는 딜레이가 없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더군다나 아직 메이저리그 경기에는 기계 판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지난 경기에서 포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었다.
‘내 책임도 좀 있었어. 유인구라고 생각하고 던져왔던 코스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니까 기존의 내 존이 흔들려 버렸지.’
사람의 눈으로 공의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대개 잔상으로 남은 공의 움직임과 포수가 공을 잡은 위치를 종합적으로 생각해서 주심이 볼 판정을 하게 된다.
‘이게 유리한 건지 불리한 건지 감이 잘 안 오더라고.’
교정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존에 넣었다 뺐다를 몇 번 하니까 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포수도 현혹되었는지 공을 놓치기 시작했었다.
‘삼중고였었지. 포일은 시시때때로 나와 내야진의 어정쩡한 수비에 주자는 쌓이고 스트라이크 존의 느낌은 이상해··· 그런데···’
실점을 하나 하기는 했지만, 위기 때마다 삼진과 더블플레이를 잡아내면서 억지로 경기를 끌고 나갔었다.
‘내야진의 수비 범위는 엉망이었지만 정면 타구는 곧잘 잡아 내더라구. 어째어째 억지로 8회까지 막아내긴 했는데···’
결론을 내렸다. 여기 애들 정말 야구 지지리 못한다. 상대는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이렇게 못 칠 수가 있을까. 그뿐 아니라 우리 팀은···
‘어쩌겠어. 단체 경기에··· 내가 맞춰야지.’
하고자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내가 평소에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말이었는데 지금 의도적으로 싱커의 각도를 줄여 던지고 있다.
‘나는 아무래도 실전형 인간이었나 봐. 예전에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되더니··· 급해지니까 다 되더라고.’
경기는 내가 맞춰주니까 제법 모양새가 난다.
지난 경기에 비해서는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고 있었다. 포수도 이제는 자신감이 좀 붙었는지 조금 각도를 키워도 곧잘 잡아낸다. 물론 공을 잡는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다.
‘이 짓을 앞으로 얼마나 해야 승격이 되는 거지?’
한두 게임 반짝하는 걸로 승격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건 내가 프론트의 입장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잔돈푼에 복권 한번 긁어보는 심정으로 날 데려왔는데 검증 절차가 단순할 리 없다.
이 팀이 내 이메일에 답장을 해온 유일한 곳이었다.
집에 갇혀 있으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심정으로 벌인 일이었다.
‘나름 자신 있었다고. 세상에서 야구 제일 잘하는 인간들이 모인 리그의 운영진이라면 웬만하면 다 날 알아봐 줄 거라 생각했지.’
나름 전략적으로 판단해서 에이전시 몇 곳과 국제 유망주 계약에 소극적이었던 스몰마켓 팀 몇 곳에 메일을 보냈었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는다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군침만 삼키면서 보기만 하던 국제 유망주 시장에서 괜찮은 유망주가 스스로 파격 세일을 자청해. 그럼 일단 기웃거리기는 할 거라고 생각했었지.’
내용은 단순 명료했다. 입단을 원한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과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일본전 경기 영상의 주소를 적었다.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나 정도의 선수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다른 곳에서는 연락하지 않았는지···
‘어쨌든 입단은 했고 조만간 연락 안 한 걸 다 후회하게 될 거니까 상관은 없어.’
트윈스에서 제의가 왔을 때는 좀 시큰둥했는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여기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상일 마음대로 안 되더라. 메디컬 테스트 후 계약금 20만 달러를 팀에서 제시했을 땐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영원한 레전드 월터 존슨의 팀이잖아. 어떻게 보면 나도 사이드 암인데 공통점이 많지. 원래 이렇게 맺어지려고 내가 투구폼을 바꾸게 된 거였을지도 모르지. 그럼. 원래 인연이란 게 그런 거지.’
물론 그때는 팀명이 워싱턴 세네터스였지만 이 팀의 전신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투자에 대한 검증과정은 꼭 필요하다. 돈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 한다. 나는 이제 막 이곳에 한발 걸친 애송이일 뿐이다. 시쳇말로 까라면 깐다.
빠른 태세 전환이 필요했다. 팀에 대한 충성심이 안 생기면 강제로라도 키워야 한다.
다른 조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A+에 보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보통 이 레벨에서 상위권 유망주는 대개 고교 졸업 후 3~4년 차 정도다. 대졸로 말하면 2년 차다. 대졸이라고 하지만 진짜 대졸은 드물고 3년 마치고 드래프트에 나온 경우가 대다수다.
A+에서 나는 애송이치고는 늙었다, 즉, 노망주다. 예전에 나이가 깡패다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해왔는데 여기 와보니 진짜 그렇다. 실제로 여기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것 같다.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노망주에게 이건 아주 심한 압박이 된다.
‘그래도 어려는 보이지. 정말 겉늙어 보이는 애들 많아.’
외모도 경쟁력이다라는 말을 지난겨울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외모로는 이곳에서 나름 경쟁력이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정면 관중석에 화사한 백금발의 미녀가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선글라스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촉이 온다. 이 정도 느낌이면 거의 100%다. 저 정도 스타일이라면 선글라스 아래 눈이 짝짝이라도 예쁠 것 같다.
‘내가 연애를 한 지가··· 하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제 겨우 싱글 A에 있을 뿐인데 운동에 전념해도 모자라는··· 에궁, 이름 모를 미녀여! 죄송하외다. 제가 공사가 다망하여···’
이래서 내가 연애경험이 없나 보다. 그런 것 하기에는 늘 바빴다.
휙-
포수가 내게 공을 안 주고 돌아서 퇴장하는 걸 보니 이번 회가 끝난 모양이다.
‘타자 놈이 병신이네. 치라고 줘도 그걸 건드리지도 못하냐? 아무튼 여기 애들 야구 지지리도 못하네. 아! 상대 팀이 어디지? Cubs? 아! 맞다. 사우스 밴드 컵슨가 그랬었지.’
스코어 보드를 확인하고서야 간신히 기억이 난다. 시카고 컵스의 하위 리그 팀이다. 근거지는 인디애나주. 원정 경기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원정 경기는 웬만하면 버스 타고 간단다. 아이오와에서 거기 가려면 2,000km쯤 이동해야 한다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상대 팀의 전력분석. 그런 것 안 한다. 자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지금은 본신의 능력을 키워야 할 때지 분석으로 리그를 헤쳐가야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못 치는데 분석까지 하면··· 아! 에구.’
문득 정신이 들었는데 상대 팀 선수들이 수비를 위해 뛰어나오는 게 보인다. 머쓱해져 서둘러 덕아웃을 향해 달려갔다.
“영수야.”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려오는 것 같다. 분명히 토종 한국인의 발음이다.
이곳은 아이오와주 하고도 시더 래피드라는 인구 10만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다. 교외로 조금만 나가면 온통 옥수수밭만 보이는 깡촌이다.
‘여기 한국 사람이 없는 거 아니었나? 유학생이라도 있나? 그러든지 말든지.’
깡촌이라서 너무 좋았다.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너무 편안하게 좋아하는 야구를 했다.
‘애들이 조금만 더 야구를 잘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경치 좋은 정자에서 바람까지 불어오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이렇게 자위 방법만 늘었다.
‘음. 이게 그거 아닌 거 다 알지?’
커널스. 내가 뛰고 있는 팀이다. 1890년에 창단된 아주 긴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이상은 나도 잘 모른다. 더 이상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이 팀에서의 내 존재 이유는 투구를 위해서다. 그래서 그 역할에 충실하고 싶은데 그러기가 너무 힘들다. 집중이 너무 어렵다.
6회가 끝났는데 스코어보드 상대 팀 란의 끝 네 개 칸의 숫자가 0,0,0,0이다.
‘무득점, 안타 없음, 에러도 없고 볼넷도 없네.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군. 투구 수는 54개 한 회당 9개 정도라··· 괜찮네.’
내 경우엔 미국에서 하는 야구가 한국에 비해 더 수월한 것 같았다. 일단 타자가 굉장히 적극적인 자세로 타격에 임했다. 좀 더 높은 레벨에 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주 쉽게 땅볼 타구가 양산되고 의도하지 않아도 투구 수가 조절되었다.
오늘은 포수가 포일도 안 하고 운이 좋은 날인지 빗맞은 타구가 애매한 곳으로 흐르지도 않았다.
‘노려봐?’
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리고 하부 리그에서 그런 기록을 가져봤자 상위 레벨로 올라가면 별 의미도 없다. 하지만 몹시 끌린다.
덕아웃에서 아무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짜씩들이 기록을 의식하고··· 아! 아니구나. 원래도 이랬었지.’
언어도 아직 어색하고 별로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야구는 단체 종목이지만 투수란 포지션은 팀원들과 특별한 유대감이 없어도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대개는 혼자였다. 혼자가 편했다.
‘괜한 욕심 부려봐야 이래저래 피곤해. 이 레벨에서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하지. 나대지 말자.’
해오던 대로 하면 된다. 다시 또 수비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빳따질 제대로 하는 놈이 없다.
‘해리 스미스라··· 아무튼 다들 등빨은 큼지막한 것이···’
한국에서 1번은 선구안이 좋고 기동력이 좋다. 대개 공을 맞추는데 재질을 보이는 교타자 타입이다. 여긴 그렇지 않다. 내가 아직 경험이 얕아서 그렇겠지만 익히 봐오던 호리호리한 체형은 드물다. 다들 덩치만 보면 맨손으로 소라도 때려잡을 것 같다.
스윙도 몹시 힘차다. 나무꾼의 도끼질 같은 박력이 느껴진다.
우타자에 대한 레퍼토리는 항상 비슷하다. 아웃코스 존의 경계면으로 좀 빠져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애매한 싱커를 하나 던진다. 그럼 이 공은 백도어 스타일로 존에 걸치던지 아래로 빠진다. 워렌 스판이 그랬다. 타격은 타이밍이고 투구는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라고.
‘그럼 대개 파울이··· 응? 1루수가 잡았네. 운이 좋았어. 파울 될 공이 라인 안쪽으로 구르다니···’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