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화 (19/200)

19화. 희망이라는 이름

“감독님. 저 미국 가요.”

일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구치소에 있는 감독을 면회 갔다.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니 아무 생각이 안 나 그냥 멀뚱히 초췌해진 얼굴만 보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 할 수 있었다. 면회 시간도 짧은데 그 시간을 얼굴만 보다가 끝낼 수는 없었다.

“음. 미국이라··· 휴우!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넌 야구를 해야 할 놈인데···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보장이 없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말에 고저가 없다. 그 냉철하던 사람이 구금된 지 한 달 만에 이렇게 된 걸 보니 많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내용에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저기··· 저 야구하러 가는데요.”

“뭐? 어떻게··· 설마 메이저?”

감독 얼굴에 홍조가 조금 올라왔다.

“예. 아직 계약 전인데··· 가서 메디컬 테스트와···”

“이상한 일이네. 아니 네가 미국 가는 게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 해외 스카우터들이 관심 가질 만한 경기가 아니어서 접점이 생기기 어려웠을 텐데··· 아무튼 잘됐네. 계약금은··· 하긴 지금 이 상황에 그것까지야 어떻게··· 그래도 일단은 좀 받아야···”

사람이 좀 이상해졌다.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많이 외로웠나 보다.

‘하긴 나도 얼마 전까지 저러고 있었지.’

“야! 너 에이전트 있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감독이 불쑥 물었다.

“아직 없는데요.”

“에이전트가 없으면 에이전트를··· 아니야. 그런 걸 하기엔 좀··· 인스트럭터 그게 딱이겠네. 좋아, 결정했어.”

혼잣말이 또 되풀이되고 있었다.

“영수야.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더라도 현실적으로 야구계 복귀는 어렵겠지?”

말투가 은근하다. 감독의 얼굴이 번들거리고 있다.

“아마도 그렇겠죠.”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다.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아무리 오래 있어도 한 일 년이면 될 거 같아. 더 빠를 수도 있고···”

데자뷔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항상 이럴 때면 뒤가 답답해졌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국에서 징징거려 봐야 사람대접받기는 글러 버린 것 같아. 여기 일이 정리되면 나도 미국 가마. 니가 날 고용해 줘야지. 인스트럭터 좋잖아.”

이 양반이 안에서 별생각을 다 했나 보다. 사람 망가지는 것 순식간이다.

“저기 감독님. 뭘 잘못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계약금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받겠어요. 연봉이야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 선수에게 구단에서 인스트럭터 같은 걸 붙여줄 리가 없잖아요, 우리 집 망해서 저 이제 부자도 아니에요.”

“야! 내가 그런 걸 모르겠니? 내가 모른 척해서 그렇지 모르는 것 빼고 다 아는 사람이야. 내가 널 위해서 니가 외부 일 신경 쓰지 않고 운동만 열심히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잖아.”

“예?”

나를 위해서란다. 본인 처지부터 챙겨야 할 상황 같은데 이런 말을 들으니까 말문이 막힌다.

“비용이야 후불로 하면 되지. 서비스 타임 끝나면 천천히 연봉 몇 % 주면 돼. 니가 바로 메이저로 가지는 않을 거잖아. 잘 풀린다고 해도 마이너에서 최소 일이 년은 굴러야겠지.”

“그건 그렇겠죠.”

“메이저에 언더 투수가 드물잖아. 거의 없지. 선수가 없는데 코치가 있겠니?”

반대가 아닌가 싶은데 지금 그걸 따질 때는 아닌 것 같다.

“널 위한 전문 인스트럭터인 거야. 니가 메이저로만 올라가면 내 이름값도 같이 올라가겠지. 언더스로우가 드문 미국에서 희소성 있는 전문 코치가 되는 거야. 명성이 생기면 프라이빗 클래스도 열고···”

아무래도 짧은 수감 생활이 그의 정신에 심각한 타격이 된 것 같다. 환자는 돌봄을 받아야지 그냥 놔두면 안 된다. 내가 메이저 올라가면 요양소 비용 정도는 대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내가 고등학교에서 빌빌거리던 선수 하나를 발탁해서··· 비인부전이라 고민했지만 결국 비전의 수법을 다 가르쳐 투수 모양새는 나게 만들었지.”

‘어째 말에서 비룡이의 향기가··· 요즘 저 안에 혹시···’

비인 거시기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내용은 맞다. 그런 고마움을 알기에 이렇게 면회를 온 것이다.

“그놈이 제대하고 운동하고 싶어서 기웃거리길래 주변 말을 무시하고 욕먹어가며 국가대표까지 발탁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또 만들어줬었지.”

정확한 내용은 아닌데 아니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하다. 대략적인 전체 내용은 그랬었다.

‘이게 입장 차이인가? 감독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나는 검은 머리 짐승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안 믿는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정을 주고받으면서 사는 곳을 사회라고 하지. 이 기준에 닿지 못하면 사람 같지 않은 혹은 반사회적인··· 사회 부적응자 이렇게 불리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이곳의 별칭이 학교라고 하더니 감독의 화술이 화려해졌다. 예전엔 기본기로 사람 속을 뒤집더니 이젠 응용 기술 사용이 자유롭다.

멍하니 듣고 있다 대답할 자유를 상실해 버렸다. 어이가 없다.

교도관이 면회 시간 종료를 알린다. 겁나게 긴 10분이었다.

“나가는 대로 미국으로 바로 넘어가마.”

면회실에서 돌아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예전처럼 곧다. 만났을 때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휴! 뭐 어쨌든 잘됐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쳐야지 어쩌겠어.’

내가 조그마한 희망 하나를 줄 수 있다면 수감 생활을 버텨내기가 조금은 수월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한 일 년 지나고 나서 막상 사회로 복귀하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미국에 안 올지도 모른다. 감독도 가족 생각해야지 그 나이에 미국행이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난데없는 혹 하나를 붙인 셈이 되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늘 계란 하나를 가지는 것보다 내일 암탉 한 마리를 가지는 것이 좋다란 말이 있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산다.

‘음. 내가 그동안 독서를 좀 했어. 비룡이 이야기보단 이게 낫잖아.’

마치 일 년처럼 느껴지는 한 달이었다. 집 앞의 기자들은 얼마 전 사라졌지만 지금도 공개된 장소에서는 사람들을 심하게 의식하게 된다. 감독 면회를 마지막으로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미스터 요한슨. 이것을 좀···”

제레미는 안경을 고쳐 썼다. 미인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업무상 이건 좀 곤란하다 싶다.

개막한 지 단 일주일 만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아래위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까지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뭐지? 왜 자네가···”

미스 마일리가 GM의 책상 위로 얇은 문서를 내려놓았다.

“치프께 가져갔더니 직접 보고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예외적인 상황이다. 방금 그녀에 의해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에서 지난겨울 예기치 않게 영입하게 된 한 선수의 이름이 보인다.

“벌써 무슨 문제가 있나?”

“문제라면 문제죠.”

자신을 권위적인 사람이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젊은 직원의 이런 말투엔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 걸 볼 시간 없으니 짧게 이야기해 보게. 10분 주지.”

그녀는 GM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했다.

“싱글 A+가 7일 개막 했죠. 8일 경기에서 미스터 So가 8이닝 87구를 던졌습니다. 보고서에 세부 기록이 있습니다만 요약하면 안타 4개를 맞고 1실점을 했습니다. 삼진은 14개를 잡았습니다.”

“대단하군. 그래서?”

상당히 좋은 성적이긴 하지만 A+다. 이제 한 게임 던졌고 시즌은 길다. 그리고 꾸준함에 대한···

“제 생각에는 리그 수준이 맞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좋은 기록이지만 내용을 보신다면···”

생각을 방해하는 무례한 끼어들기다.

“3분 지났군.”

요한슨은 천천히 왼팔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기록상으로는 그의 진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타를 4개 맞은 걸로 되어 있지만 DIPS(수비 무관 투구 기록)를···”

“간단히 말해보라니까.”

세이버메트릭스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어린 여자아이까지 그런 통계학적 분석을 앞세워 야구판에 입성하는 것이 솔직히 그리 탐탁하지 않았다.

“4안타로 기록되었지만, 우리 내야 수비가 리그 평균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두 개는 잡혔고, 최상급이었다면 무안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러까지 두 개 발생해 투수를 괴롭혔죠. 투수는 어쩔 수 없이 투구 스타일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슨은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걸 굳이 수학 공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자네가 주장하려는 게 뭔가?”

“그는 애초부터 AA로 보내야 했습니다. 아이오와에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점은 일반적이지 않은 공의 변화와 커맨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삼진을 잡을 수 있는 특출한 능력도 있지만 그렇게 스타일을 가져가서는 롱런이 어렵습니다. 그는 언더니까요,”

요한슨은 이제야 서류를 펼쳐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주제에 완고한 남자라는 고전적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공사의 구별이 엄격했다. 미스 마일리에게 지금은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으음. 만약 평균 정도의 내야 수비가 동반되어 그가 처음 투구 계획대로 공을 던졌다면 이 경기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하나?”

GM은 이제 안경을 이마로 올린 채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80구 내외에서 완투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BABIP(인플레이 타구의 안타 비율) 리그 평균을 대입했을 때의 예상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상이라는 건 말 그대로 예측일 뿐입니다. 확신을 가지기에는 부족함이 있지요.”

세이버메트리션인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GM에게 좀 뜻밖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를 상위 리그에 보내서 시험해 봐야 합니다. 그가 이 리그에서 배울 건 없어 보입니다. 그의 한계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소영수는 얼떨결에 20만 달러로 거저 주워오다시피 했다. 트윈스는 국제 유망주 시장에 그동안 나서지 않았었다. 그 비용으로 보다 검증된 자원을 영입하는 데 힘을 쏟았다.

지난겨울 미스 마일리가 가져온 정보는 모두에게 한번 질러보자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가격 대비 성능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본 서류의 내용은 유망주가 아니라 완성형 투수라는 느낌을 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일단 한 게임 더 지켜보지. 그리고 결정해도 늦진 않겠지. 소영수에 대한 일은 자네가 전담해 왔나?”

“일은 제가 해 왔었지만 그렇다고 전담은 아닙니다. 팜 디텍터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담일세. 다음 경기가 끝나면 바로 보고서를 가져오게.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써 주면 매우 감사할 것 같네만.”

“예, 보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