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인생에 시련은 양념 같은 것
여론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이젠 대표팀 개혁을 넘어서 대표팀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이 돌아가고 있었다.
협회는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고 감독이 전권을 행사했다며 발을 뺐고 학교도 발전 기금 문제를 고 감독과 몇몇 관계자 개인의 일탈로 몰고 갔다. 그나마 쉴드를 쳐 줄 수 있는 곳들에서 우리는 버려졌다.
모든 악습의 주범으로 고 감독이 지목되었고 나는 그 옆에서 단물을 빨아 먹은 기생충 같은 인간이 되었다. 대중의 의견 제시에 나의 실력이나 노력은 전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되지 못했다. 프로 진출은 고사하고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음. 오늘은 무슨 기사가 났지? 어? 우리 집이 망했네. 거봐! 금수저 아니라니까. 쫄딱 망한 집 아들이 무슨 금수저야? 댓글이··· 어디 보자. 사필귀정? 이게 무슨 뜻이지? 천벌을 받은 거라고? 진짜 그런가?’
며칠간 하도 이성을 마비시키는 글들을 봤더니 지금은 웬만해선 무덤덤해졌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 이건 또 뭐야?’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전엔 몰랐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부잣집 망나니의 명품 사랑은··· 얼마 전 중고품 경매 사상 최고가로 낙찰··· 과연 그에게 그 시계 하나뿐이었을까? ··· XXX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망한 부잣집 도련님 걱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응. 반지도 있었어. 잘 좀 알아보지.’
사람의 감정을 잘 자극하는 아주 좋은 글솜씨다.
‘천벌을 받아도 빌런은 빌런이다. 불쌍할 거 없다. 뭐 이런 이야기?’
엑설런트한 문장력이다.
‘그 시계가 그런 거였어? 너무 싸게 판 건가? 원래 팔 물건이 아니었는데 사정이··· 아! 선 넘네. 부모님을 건드리는 건 아니지.’
요즘 내 신상정보는 공공재다. 만인이 공유한다. 그걸 낱낱이 다 까발리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죄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살아온 과정이 공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건? 기사 제목이 좀 이상하네.’
공정사회를 위한 학부모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법원에 나의 대학 입학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냈다. 길고 복잡한 법률 용어를 이해하긴 어렵지만, 대학 입학을 취소하라는 이야기인 것은 대충 짐작하겠다.
‘웃기는 인간들이네. 야구 선수에게 대학 졸업장이 중요하겠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런 글을 읽는 건 멘탈 강화에 도움이 된다. 자꾸 보다 보니까 일정한 패턴이 보이는 것 같아 이제는 좀 진부해졌다.
‘에잇! 푸쉬업이나 해야지.’
며칠째 집 밖을 못 나갔다. 건물 밖에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현관문 밖에 있었는데 경찰서에 전화 걸어 신고했더니 거기서는 물러났다.
지금 나의 걱정은 근손실이다. 어차피 지나갈 일은 지나간다. 이런 일에 영향받아 현재 나의 몸 상태가 나빠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실내에서 근력 운동과 요가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이게 다 시계 반지 판 돈 덕분이다. 그건 고통의 기억이다.
‘야구? 야구 할 곳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 엄마의 유지를 생각해서 안정된 길을 가려고 한 거였지.’
정말 인생 맘대로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내가 현재의 실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날 원하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바랐던 이상적 조건은 아닐지라도···
알아봐야 할 건 다 알아봤다. 진수 형이 도움을 많이 줬다.
‘딱 한 달만 이대로 버텨보자고··· 이대로 주저앉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아! 세는 걸 잊어버렸네. 그런데 몇 개 더 하나 안 하나 의미 있겠어? 한 삼십 분 더 하면 대충 숫자는 맞겠지.’
몸 만들 시간은 많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안 풀릴 때 억지로 용 써봐야 더 꼬이기만 한다.
‘요즘 책도 많이 본다고··· 비룡이 나오는 건 이제 졸업해야지.’
이메일을 몇 개 보내 놓았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건 내 야구 실력이 퇴보하는 것이지 실체 없는 대중의 의견이 아니다.
“자신 있다. 해낼 수 있다고··· 내가···”
푸쉬업을 하면서 괜히 큰소리를 내고 있다.
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지는 않다. 의연한 척했지만 의연하지 않아도 똑같이 힘들다. 그렇다면 의연한 쪽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보다 타의에 의해 제한된 장소에서 하는 운동이 정신에 좀 더 심한 타격을 주는 것 같았다.
***
제레미 요한슨은 슬그머니 회의실에 모인 스카우터들을 둘러봤다.
“누구 또 없어? 그냥 3:3 트레이드로 진행해야 하는 건가?”
GM은 뭔가 좀 모자라는 느낌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리빌딩으로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치프 스카우터인 존슨은 최선의 답을 했다. 영광의 나날은 가고 고난의 겨울이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산체스, 프레디, 안드레를 주고 그 셋이라면 무게가 한쪽으로 너무 기운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거야. 아무리 유망주 순위가 높다고 해도 3:3은 말이 안 되는 거 같아.”
“샐러리 캡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윈나우는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을 준비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알지 않나. 적어도 외부에서 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모양새는 나와야 할 거 아닌가? 미심쩍은 트레이드를 했다간 지역 언론만이 아니라 구단주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안 나올 텐데.”
GM은 괜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존슨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FA와 유망주의 무게를 당장 비교할 수는 없다, 당연히 지금의 가치로는 저울이 기운다. 유망주는 현 가치가 아니라 미래 가치로 판단해야 추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3년을 끌었던 윈나우는 완전히 실패했다. 지구 우승은커녕 와일드카드 한 번 따내지 못했다. 이유를 분석하면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수습할 때라고 존슨은 생각했다.
“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윈나우를 설계한 게 저였으니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겠지요.”
“책임감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결정은 내가 했어. 원래 GM이 책임지는 자리야.”
요한슨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추가 심하게 기울어지는 것 같은 트레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한 현찰을 불확실한 어음과 교환해야 한다면 부가적인 것을 무엇이라도 더 얻어내고 싶었다. 그래야 구단주인 엉클 깁에게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저기 좀 다른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갑자기 테이블 끝에서 무거워진 공기를 가르는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금발의 화사한 미인이 생글거리며 GM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미스 마일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신입이 끼어들 만한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았지만 요한슨은 잠시나마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다.
“유망주에 관한 이야기죠.”
“그런 이야기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지.”
“응? 우리가 빠트린 팀이 있었나? 어딜 이야기하려는 거지?”
존슨은 서류철을 다시 훑어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없었다. 젊은 친구가 의욕이 넘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런 때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많이 곤란하다.
“트레이드 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드래프트인데 그걸 미리 준비하는 건 좋지만 지금은 11월이었다. 6월 드래프트를 지금 이야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존슨은 앞뒤 모르는 젊은 직원이 답답했다.
“내년 드래프트를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따끔하게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의욕을 가지고 의견을 개진하는 젊은 직원의 기를 죽일까 봐 나오려는 고함을 억지로 누르며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국제 유망주 계약입니다.”
“이보게. 미스 마일리. 우리 팀이 지금 뭘 하려고 하지?”
“리빌딩을 하려고 하죠. 리빌딩을 위해선 유망주가 필요하지요.”
존슨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우리가 자금이 넘치는 구단이었으면 지금 이 시점에서 리빌딩을 하려 하겠나? 이대로 한두 시즌 더 지켜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여타 사정이 우리에게 압박을 주니까 샐러리 캡도 줄이려 하고··· 어휴! 아무튼 그런 데 쓸 돈은 없어.”
열이 올랐는지 제대로 된 대답이 이어지지가 않는다. 존슨은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싫었다. 과거 그도 국제 유망주를 노리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현실이···
GM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있다. 그는 현 상황의 조기 종료를 원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도 다 감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큰돈 들지 않습니다.”
마일리는 자신 있게 질렀다.
“말이 되는 소리 좀 하게. 가능성 높은 유망주를 푼 돈으로 어떻게 데려오나? 우리는 작은 확률이라도 당첨 가능성 있는 복권을 원하는 거지 아무나 데려와도 된다면··· 어휴!”
“가능성 충분하고 기량이 올라올 때까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선수가 있습니다. 잠시 동영상을 하나 봐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자신 있나? 그럼 봐야지. 우리 미스 마일리의 안목을 좀 기대해볼까?”
말릴 틈도 없이 GM의 허락이 떨어져 버렸다. 존슨은 이제 답답함보다 슬슬 걱정이 되지 시작했다. GM은 아직 젊지만 공사 구별이 뚜렷했다. 만일 동영상의 내용이 터무니없다면 말의 책임을 물으려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곧 회의실에 비치되어 있던 대형 모니터에 어떤 경기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양인들이군. 어디··· 저거 베이스볼 클래식인가?”
“예. 그렇습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아시아 지역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입니다. 일본과 대만이 2라운드로 진출했고 한국은 탈락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저기 나오는 선수가 국제 유망주 계약에 해당될 수가 있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체 리그가 있잖아.”
마일리가 무엇인가 착각한 것 같다는 생각이 존슨의 머리를 스쳤다.
“처음에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한국의 선수 중에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가 일부 섞여 있었어요. 확인해 봤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제가 말 안 해도 곧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마일리의 말뜻을 모두가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회가 끝나자 마일리는 바로 4회로 화면을 이동시켰다.
“여기서부터가 압권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아웃 카운터를 삼진으로 처리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회의실에서 마일리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7회가 끝나자 모두 화면으로 빨려들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음.”
“허!”
“아마추어가 확실한가? 나이는?”
“비싸겠는데··· 그런데 왜 안 비싸다고 하는 거야?”
“저 정도라면 일단 잡아서 되든 안 되든 까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