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6화 (16/200)

16화. 내 인생의 갑은 나다

“우리 도착하면 계란 맞는 것 아냐?”

“계란은 무슨··· 그럴 관심이라도 있으면 기사가 그렇겠니? 누가 공항에 나오겠어. 우리도 잘한 건 없으니까 숙소에나 처박혀 있으면 며칠 안 가서 조용해질 거야.”

애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다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언론에서 때리는 대로 좀 맞아주면 곧 사그라질 것이다. 어떤 사건의 수습에는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이번엔 하필이면 우리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협회 대신 욕받이 좀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난 내 실속을 챙겼으니까 그것이면 충분하다. 언론에서 말하는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가진 선수 중에 적어도 난 없을 테니까.

‘나 정도면 잘했지. 이런 걸 군계일학이라고 비룡이가 그러던데···’

따로 해단식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작별은 짧을수록 좋다. 그리고 대략 며칠 후면 내 거취가 결정될 거라 믿는다. 그 전에 감독과 만나서 상의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닐 봉지 색깔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남부지역 그 팀이 적절한 대가··· 아니지. 이제 내가 배가 불러서 별생각을 다 하네. 1군 보장 정도만 된다면 돈이야 아무려면 어떻겠어. 너무 처음부터 돈 욕심 내는 건 모양새가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고···’

일단 1군 경기에 나가는 게 중요하다. 성적이 나오면 돈과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다. 웬만하면 감독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 2시간 30분의 비행 시간이 너무 지루했다.

‘이코노믹 졸라 좁네.’

펑- 펑-

사방에서 밝은 빛이 반짝였다.

짐가방을 찾아 느긋하게 일행을 따라서 출입구로 향했는데 자동문을 벗어나자 느닷없이 주위가 환해졌다.

“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건 분명히···

“소영수 선수.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시나요?”

“예?”

‘국민? 내가 무슨 말을? 그 정도로 내가 유명해졌나?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당황했는지 생각에서 영어가 흘러나온다.

“고 감독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별 이야기 없었습니다. 그럴 경황이···”

이상한 질문이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귀국하길 기다리고 있었나? 일본전 끝나고 아무 반응 없더니 이렇게 느닷없이···’

대비 없이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을 정면으로 받았더니 눈 닿는 모든 곳이 뿌옇게 보인다.

“아! 그만합시다.”

다행히 구원의 손길이 내 팔을 붙잡았다. 고 감독이다.

“말하지 말고 그냥 똑바로 앞으로 가!”

귓전에서 들리는 고 감독의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반사적으로 부딪쳐 오는 사람들을 뚫고 곧장 걸어갔다.

“잠시만요.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

‘전에 어디선가 들어 본··· 피해? 내가 뭘 피한다는 거지? 내가 왜?’

현실 같은 느낌이 없다.

“고 감독님께서 주도하셨던 일인가요?”

‘감독에게 뭘 주도해? 선수 선발을 묻는 건가?’

나의 성숙은 마운드 위에서만 유효한가 보다. 현실에서 난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냥 걸어. 지금은 생각하지 마. 일단 빠져나가자.”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나 보다. 내 팔을 붙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날 인도하는 손길에 이끌려 뚜벅뚜벅 걸었다.

어떻게 현장에서 나와 집으로 왔는지··· 감독이 이끄는 대로 어떤 승용차에 탄 기억은 있다. 차에서 감독은 자세한 사정을 좀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말했다. 연락받기 전에는 누구와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라는 주의 사항도 들었다.

‘내가 모자라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군 생활도 잘했고 특별히 사람과 잘 어울··· 리지는 못했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계속 들어왔고 남 해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특별히 선량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난 나쁜 놈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난 세상일에 서투른 일개 운동선수다. 이번 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엇이든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뉴스를 검색해보고 SNS도 찾아봤지만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아직 대낮인데 피곤이 몰려온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괜찮은 체력을 가졌지만 사람에 시달리고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주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쓰러질 것 같다.

답답했지만 외출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진수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쉬고 있었는지 바로 전화가 왔다. 누군가 필요했다. 마지막 연락이 대표 소집 전이었으니 꽤 오랜만이다.

“귀국했냐? 수고 많았네. 일본전은 잘 봤어.”

“그걸 볼 시간이 있었어요?”

수련의 생활은 무척 바쁘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다.

“실시간으로야 못 봤지. 나중에 편집본을 봤어. 넌 잘하더라. 게임을 져서 그렇지.”

“저야 오래 준비하고 여기서 밀리면 마지막이라 생각해 죽을힘 다한 거죠.”

그게 진실이다. 정말 그랬다.

“어느 팀이야?”

“예?”

“어느 팀으로 가기로 했냐구. 어디서든 연락은 왔을 거 아니야.”

“그게 오늘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내가 너무 외골수로 살아왔던 것 같다.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이럴 때 의논 상대가 몇 달 전 만난 선배인 걸 보면 내가 정상적으로 살아온 게 아닌 것 같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글쎄 나도 그런 쪽은 아는 게 없어서 어떤 내막이 있는지 짐작이 안 가네.”

“별일이야 있겠어요? 협회가 괜히 이상한 말 나오니까 책임을 선수들에게 떠넘기려고 언론플레이 한 거겠죠. 그냥 혼자 답답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넋두리한 거예요. 복잡한 이야기 해서 죄송해요.”

“가끔 하는 말 들으면 너도 참 답답하게 살았던 것 같아. 단체 운동 한다는 애가 어떻게 변변한 친구 하나가 없냐?”

그러게 말이다. 요즘 참 새롭게 느끼는 게 많다.

“현대인의 정신은 불안정해. 국민 4명 중의 한 명이 정신 질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지.”

“저기 저 멀쩡한데요. 오늘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기는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의사 선생님에게 고민 이야기를 좀 했더니 사람을 환자 취급하려고 하는 것 같다.

“너 미쳤다는 이야기하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일반 교양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들어 봐. 도움 되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예.”

거부감은 있었지만, 가만히 듣다 보니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성인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굉장히 찔리는 점이 많다. 그 증상이 보통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는데 평소 내 모습 같다.

‘집중력이 저하되어 주의 산만해지고 충동적인 행동이 나타나며 그게 과잉 행동과 언어 습관으로 돌출된다고? 음.’

“저기 형. 평소에 그런 증상이 있으면 정신과를 찾아봐야 할까요? 제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혹시나···”

“찾아봐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현대사회의 삶이란 것이 아주 복잡해서 누구나 일시적이라도 그런 증상이 전혀 없기는 어렵지.”

말을 더럽게 알쏭달쏭하게 한다.

‘아! 고운 말. 좋은 생각.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난 중증인 거 같은데···’

이제 겨우 기회를 잡았는데 정신 분열로 파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기 형. 평소에 어떻게 해야 정신적 안정 아니 정서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가요?”

“왜? 내가 이런 이야기 하니까 다 니 이야기 같아서 불안하냐?”

‘와! 이 아저씨 내가 아는 어떤 아줌마랑 똑같이 이야기하네. 그러고 보니 선녀 보살 아줌마도 한번 만나봐야··· 음.’

“불안하면 감정 표출이 쉽게 나타나. 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선즙필승은 계획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제정신이 아닌 거지. 의도적으로 그런 걸 하는 여자는 위험하니까 만나지 마.”

시작부터 그럴듯하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한 대처는 신중히 생각한 뒤 자신의 생각을 주변과 나누면서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피할 수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는 신뢰를 상대에게 덤으로 얻을 수 있지. 바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런 것이 바탕이 되어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가는 거야.”

마치 유인구를 잘 던지는 투수는 컨트롤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 같다.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야 해. 그럼 기다림을 지루해하지 말아야겠지? 초조해하지 말고 감독의 연락을 일단 기다려 봐.”

“그렇겠네요. 답을 가장 빨리 줄 수 있는 게 감독님이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지 마. 그것을 일단 인정하면 심리적 갈등이 생길 여지가 적어지지. 주변 시선 의식하고 그럴 필요 없어.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해. 반사회적인 게 아니라면 어떤 감정이라도 나쁘지 않아.”

정말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남 일에 너무 관심 가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이건 나도 잘 안될 때가 있는데 상대가 원하지 않는 오지랖은 정(情)의 표시가 아니야. 오히려 상대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지. 내 생각에는 지연수에게 나타난 게 그런 경우인 거 같아.”

어쩌면 이렇게 말 한마디마다 현인의 향기가 풍기는지 모르겠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해. 남에게 전가하거나 대신해 줄 수 없어. 내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다른 것은 그다음 순위야.”

“형 말이 다 맞아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 정서적으로 안정되려면···”

“스스로에게 상을 줘. 넌 지금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잘해 왔잖아. 보상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스스로를 인정하고 행복해할 자격은 있지 않을까? 꼭 주변이 인정해야 행복해지는 걸까?”

이 말은 정말 마음에 울림을 준다.

“넌 느긋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행동력이 강했어. 우연히 일어난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지금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잖아. 보통의 경우는 아니지. 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야. 초조해하지 마. 넌 충분히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고 믿어.”

내 인생에서 이 형을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인생의 멘토다. 말해준 내용은 거의 어디서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의 격려와 위로에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이해와 공감의 힘이다.

통화 후 마음이 안정되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뭘 먹지? 이런 날은 짬뽕과 탕수육을···’

잘 먹고 잘 자고 일어났더니 난 유명해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