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었더니
“형은 이제 걱정 없어요. 코치들 웅성거리는 것 못 들었어요?”
“코치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거참! 형은 배짱이 좋은 건지 하긴 배경이 끝내주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의외로 우리 집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니 이런 말이 아직도 나온다.
“야구 잘하면 되는 거지 왜 이런저런 말에 신경 써야 해. 난 나름 열심히 했어. 그냥 난 내 노력을 믿을 뿐이야.”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고 뭐라고 해야 상황에 맞는 대답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보통 이럴 땐 그냥 원론적 이야기만 한다..
“형이 열심히 한 거야 내가 잘 알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는 잘 안 되지만··· 형은 집에서 뭐라고 안 해요? 내가 형 같은 처지였으면 야구는 무슨···”
“코치가 왜? 코치 누구?”
그냥 놔뒀다간 엉뚱한 말이 계속될 것 같아 말을 잘랐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구단들이 관심을 가지면 누구에게 물어보겠어요? 가장 가까이에서 본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태경이 혼자 신났다.
“그래서 코치들이 좋은 말 해줄 것 같다는 거냐?”
“인맥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얘도 세상을 잘 모르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맨날 뒤통수나 맞는 거야.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걸 같이 아는 건 소용없단다. 그런 건 이 순위지. 난 눈 밝은 든든한 감독이··· 애가 아직 어려서 세상의 이치에 서툴러서··· 히힛.’
내가 할 일을 잘 해냈으니 감독이 알아서 알 것이다. 간단한 문제를 괜히 이리저리 비틀어 생각해 심각한 문제로 만들고 있었다. 게임 후 감독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불안해진 거다.
‘지금 당장 대회가 끝난 게 아니라서 이모저모로 많이 바쁘시겠지. 당장 내일 3차전이니 그것 준비만 해도··· 이기면 2차 라운드도 있고··· 아! 내일 이기면 이 상태가 더 가야 하네. 지면···’
그래도 이기긴 이겨야 한다. 내 개인적인 문제를 국가적인 문제에 연결시킬 수는 없다. 국가대표란···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량의 성취에 긴 시간 본의 아니게 억눌려 있던 기대감이 폭발했고 제대 후 일어난 환경 변화에 대한 초조함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것 같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가 여름 성경학교 이런 데를 초딩 때 좀 다녔다. 그래서 성경은 좀 안다. 내가 원래 교회, 절 이런 곳과 친했다. 굿거리장단도 익숙하고··· 어쨌든 순리대로 계약금 한 5억 받으면 아주 좋겠다.
‘그럼 아빠부터 찾아서··· 흠. 식사 잘하시고 건강하게··· 조금만 기다려 봐요. 이제 다 되어 가요.’
“나도 드래프트 며칠 안 남았는데 좋은 꿈 꿔야 할 거 같아요. 내일 출전도 안 될 거고··· 대표팀 뽑혀서 좋아했는데 별거 없네요.”
대표팀 포수는 두 명인데 프로 2군에서 온 선수가 태경이보단 타격이 나았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평가받고 있었다. 태경이가 오늘 경기에서 수비적인 부분 말고 타격에서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다.
태경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일본 리그 유망주 1군 투수와 1차전 중국 투수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무안타다. 첫날 중국전 출전 포수는 3안타 경기를 했다.
후발 주자의 어려움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상황이 어렵거나 말거나 태경이는 오늘 주어진 기회에서 뭔가를 해냈어야 했다. 다 그렇게 커나간다. 세상의 공정이란···
‘어이쿠!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이 나오려고 하네. 이러다간 철학자가 되어도 모자라겠어. 내 할 일이나 잘하자고.’
아직은 내 앞길도 불확실하다.
“잘되겠지. 대표팀 경기와 드래프트가 큰 상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뽑을 선수를 한 경기 보고 선택하지는 않을 거잖아. 결국엔 과거 실적이 가장 큰···”
말하다 보니 자괴감이 밀려 왔다. 과거 실적 없이 한 경기 잘했다고 머리 쳐드는 어리석은 중생이 여기 하나 있었다. 현재의 판단기준은 과거다.
타이베이의 잠 못 드는 밤이 지나고 새로운 게임이 있는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기합이 단단히 들어 있었다. 감독 이하 모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총력전의 분위기가 선수단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만 빼고··· 어제 7이닝을 던진 선발 투수가 오늘 출전할 리 있겠어?’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 등 어디에 있든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열등감에 찌들었다 후배들이 좀 대우해 주는 것 같으니까 날아갈 것 같냐? 넌 단체 종목 하는 애가 이렇게 이기적이니··· 제발 웃지만 말자.’
스스로 반성도 해 봤지만, 아닌 걸 억지로 그런 척하는 것도 위선이다.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
자신과 싸우면서 표정 관리에 심혈을 쏟았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경기는 초반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런 강아지 같은 상황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유일한 투수가 선발로 나섰는데 그 자식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벤치에서 뒤로 수군거리는 말대로라면 어제 불펜을 들락거리느라 루틴이 깨져서 그렇다는데 목수가 연장 탓을 하면 안 된다. 그건 아마추어나 할 말이다.
‘싸가지 없는 놈이 자체 징계를 받는 거야. 알고 봤더니 대표팀에 고등학교 후배가 하나뿐이더라고. 저놈이 그 지렁이 어쩌고 하는 놈이 틀림없어.’
절대로 일부러 알아본 건 아니다. 어제 기사를 찾아보다가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대표팀 명단에 약력이 있더라고. 흠.’
원래 일반적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즉 일반적 인간은 이기적이다. 하지만 난 살아온 삶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뭘 그렇게 고개 처박고 있냐? 뭘 잘못했냐? 잘할 때도 있고 안되는 날도 있는 거지. 공을 잘 못 던진 거지 죄를 지은 게 아니잖아.”
과거에 나에게 야구 잘 못하는 게 죄라고 하던 사람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후배 사랑은 나라 사랑과 동일어인데 절대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다. 그냥 위로를 하고 싶었다. 내가 저런 마음을 잘 안다.
지렁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 지렁이 어쩌구가 아니라 지연수라고 하더라구.’
“대충 좀 하지. 좋은 뜻으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귀엔 다 XX 같이 들리니까 그냥 내버려 둬요.”
‘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런 강아지 소리를 다 듣게 되다니··· 그동안 내가 야구를 좀 못해 그렇지 귀한 집 아들로 태어나 강남에··· 하아!’
소리가 좀 컸는지 감독이 흘깃 돌아본다. 감독이 눈빛으로 물러서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 예전의 내 생각이 나서 별생각 없이 말을 해 버렸네. 나중에···”
우물쭈물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너무 바보 같다. 물러나고 나서 조금 전에 했어야 할 이런저런 말들이 뒤늦게 생각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저런··· XXX.”
누군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칭하는 게 지연수일까? 나일까?’
존중받는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이런 불편함이 너무 싫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런 곳이 아니다.
‘중심 좀 잡자고··· 이도 저도 아니게 뭐 하는 거야.’
야구만 생각하던 때가 좋았다. 야구 밖을 벗어나 움직여 보려고 하니까 계속 충돌이 생긴다. 그동안 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형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부러워하는 게 지나치면 저렇게 돼요. 괜한 시샘과 질시 그런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실제로도 그렇고··· 형이 너무 잘해서 생긴 일이에요.”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태경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근본적으로 사람 대하는 게 서툰 내가 어울리지 않게 오지랖을 부려서 생긴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태경이는 그게 아니란 듯 말하고 있었다.
“저런 애들 가끔 있어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돌 던지는 애들. 그냥 말종이라고 생각하시고 무시하면 편합니다. 괜히 사람 취급해줘 봐야 팀 분위기만 흐리는···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형같이 점잖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XXX.”
다행히 태경이는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험한 말이 연신 들려오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잘해야 했던 건 야구만이 아니었나 보다. 좀 진정이 된다.
‘하핫. 내가 인싸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춘 아싸였던 건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싸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범생이 그 이상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범생이 리더가 된다는 건 비룡이가 설쳐대는 곳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깨달음을 얻었다.
‘나대지 말자. 백도와 흑도가 있는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야.’
현실에는 백도와 황도가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는 절세의 신공을 깨우쳤다 해도 무적이 되지도 않고 야구 실력만이 리더의 조건은 아니었다.
‘당연히 야구판과 무림은 다른 곳이지.’
내가 착각이 심했다.
게임은 져 버렸다. 한 번도 역전하지 못했고 이렇다 할 승부처조차 없었다. 맞닥트린 현실과 반대로 만일 우리가 이겼다면 무난한 승리라 불렸을 것이다.
“어제 승부를 걸었어야 했나?”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 하면 뭐 하겠어? 그럴 거였으면 소영수를 이번 경기 선발로 썼었어야지.”
아쉬운 듯 소곤거리는 코치들의 뒷말이 좀 있었지만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우리 모두 일찌감치 마음 한구석에서 패배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럴 만큼 무난한 패배였다.
“빌어먹을 내 첫 국제 경기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빌런은 끝까지 빌런 짓을 한다. 지연수가 지연수 했다. 그는 승복하지 않았다.
사실 패배의 제일 큰 책임은 협회가 져야 한다.
‘왜? 다른 걸 생각했어? 내가 그렇게 단순한 놈이 아니야.’
이길 생각을 했다면 이길 수 있는 선수진을 구성했어야 한다. 그런 결정이 나에게는 기회로 돌아왔지만 2군 선수와 대학생 위주로 선수를 뽑아 놓고 승리를 바란다는 것은 너무 뻔뻔한 태도다.
애초 이런 선수 구성에서 승리는 덤으로 생각했어야 한다. 우리 대표팀은 원래 취지에 맞게 잘했다. 우리나라 리그가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2군 선수로 일본과 대만의 1군을 이긴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이겼다면 좋았겠지만.
언론의 생각은 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출국하는 날 아침에 검색해본 기사들의 제목은 졸전, 정신력 강화, 유망주 부재 등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