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내 커브는 상향이다
결정구를 던졌다. 나의 커브를···
일반적인 커브는 아래로 떨어지지만, 일반적이 아니었던 나의 커브는 느닷없이 치솟았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업 슛. 이것이 나의 커브다.
업 슛은 완전무결하게 정의된 용어가 아니다. 야구에서 슛(shoot)의 일반적인 정의는 역회전이 걸리고 수평적 움직임을 가진 구질을 말한다.
야구가 만들어진 초창기에 슛이라고 부르는 구질은 대개 구속이 빠르고 변화하는 폭이 작은 구종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인슛, 아웃 슛, 업 슛, 다운 슛, 더블 슛 등으로 주로 변화하는 방향에 맞춰 불렀다고 한다.
그 슛이라는 표현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슈트라고 하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일본과 미국의 야구 교류는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35년에서 1949년까지 일시적인 공백을 가진다.
이 공백의 기간이 미국에서 20세기 초반 이후 사장되다시피 한 슛이라는 용어가 일본에 슈트라는 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된다. 이 기간 동안 미국식으로 말하면 인 슛을 던지는 투수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던지는 구종을 In shoot에서 in이 빠진 shoot으로 불렀다.
일본 야구에서 말하는 슈트는 일반적인 커터와 정반대의 공이다. 우투수가 던지면 우타자의 몸쪽으로 빠르게 꺾이는 구질이다. 그런 것을 현재 미국에서는 러닝 패스트볼 혹은 투심 패스트볼이라고 주로 지칭한다. 과거의 아웃 슛은 커터. 다운 슛은 스플리터 혹은 포크 등으로 현재 부르고 있다.
‘뭐 그렇다구. 나도 업 슛이란 말을 CK 때문에 처음 들었지. 그래서 그런지 내 업 슛은 그의 것과 비슷해.’
언더스로우로 커브를 던지면 회전 방향이 오버스로와 반대로 작용해서 탑스핀 변화구가 백스핀을 가지게 되고 이 때문에 구속은 상대적으로 빠르고 타자에게 위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백스핀을 가지는 대표 구종이 패스트볼이다.
이건 피치 터널이 상당히 길다. 초기 궤적이 싱커와 비슷하고 구속도 별로 차이 나지 않는데 타자에게는 싱커의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걸 던지기 위해서는··· 강한 손목 힘이 필수적이라고 하는데··· 난 어느 날부터 그냥 되더라구. 암튼 나에겐 커브야.’
세 타자를 상대하면서 다 위닝 샷으로 이걸 던졌는데 한 명은 얼어붙었고 나머지 두 명에서는 어이없는 헛스윙이 나와 버렸다. 너무나 쉽게 이닝이 끝나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려 나도 어리둥절하다. 현실감이 없다.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고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는데 기분이 막 좋거나 그렇지 않다.
태경이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끝난 건가?’
“형, 최고예요.”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지나갔다. 유격수다.
‘최고로 던졌지. 내가 짱이야.’
갑자기 갖가지 소음이 들려온다. 관중석의 응원, 선수들의 고함··· 얼핏 미몽에서 깨어났다.
‘에구, 뭐였지? 넋이 나갔다 들어왔나 보네. 히히힛 어이구 이겼··· 아니지 지금 0:0이잖아. 타자 놈들아! 한 방 쳐라, 좀 이겨보자. 이렇게 던져줬는데 이겨야 될 거 아니야.’
연속 탈삼진 11개. 드디어 내게도 내세울 만한 기록이 생겼다.
‘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연속 삼구 삼진이었네. 아홉 개로 세 타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긴 하는데 하나도 구체적이지 않고 그냥 생각들이 공중에 붕붕 떠다녔다.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덕아웃에서 치하의 말을 듣고 할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락커에서 아이싱을 받으면서 차가운 게 몸에 닿으니까 비로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고가 된다.
‘오늘 이 정도면 프로에서 연락이··· 아니지. 그거야 감독님이 알아서 한다고 했었고 그보다 계약금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떤 형식으로든 입단 방법이 있고 여러 팀이 서로 탐을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육성 선수든 뭐든 상관없다. 물론 공식적으로 육성 선수에게 계약금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투명하게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언더 머니가 되었든 어떤 형식을 취하든 간에 분명히 부가적인 것이 붙을 수밖에 없다. 연봉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계약금은 좀 넉넉히 받고 싶다. 생활비야 아직 걱정 없지만 여유 자금은 넉넉할수록 좋다. 현실에서 익힌 교훈이다.
‘구위를 확인했고 즉전감이라고 생각되면···’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기대감이 든다.
일본 현역 1군을 상대로 7이닝을 3안타 무볼넷 무실점으로 막았다. 더구나 21개의 아웃 카운터 중 12개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처음 시작을 맞춰 잡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면 삼진은 더 나왔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팀도 1군 선발이라고는 하지만 최정예라고 하긴 어렵다. 일본도 젊은 선수 위주로 뽑았다.
‘나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 긴 시즌을 치르는 것과 한 게임은 분명히 다르니까. 하지만 아무리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기본적인 구위에 대한 증명은 충분히 되지 않았겠어?’
내 커브는 떠오른다. 실제로 떠오르지는 않겠지만 타자가 그렇게 느낀다면 효과는 마찬가지다. 내 인생 사이클의 커브도 이제부터는 진행 방향을 바꿔 위를 향할 때가 되었다.
‘아마 인터뷰도 하겠지. TV에 잠깐만 나와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긴다는데 뉴스에 나오면··· 사인하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중학교 땐가 언제 만든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바보 같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아주 긍정적인 에너지가 몸에 넘쳐나는 것 같다. 기분 좋게 아이싱을 도와준 트레이너분께 감사 인사를 하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어? 왜 이러지?’
벤치가 너무 조용하다.
‘혹시 그새 점수를 줬나? 이 미친 것들이··· 내가 어떻게··· 응?’
가슴이 섬뜩해져 급하게 스코어보드를 살펴봤지만 8회 말 우리 공격 중인데 아직도 0:0이다.
나도 조용히 분위기에 맞춰 구석으로 들어갔다. 태경이를 찾았다. 걔도 나와 같이 교체되었는지 편하게 앉아 있었다.
“이거 무슨 일이냐?”
태경이에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형 없는 새 감독님 하고 투코가 한판 했어.”
투수코치면 수석코치다. 프로에서 같은 팀으로 오래 생활해 친한 걸로 알고 있었다. 그걸 떠나서 안 친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다툴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왜? 다들 분위기 업되어 있었잖아. 왜··· 이 경기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감독님이 불펜에 투수들 대기시키라고 했는데··· 투코가 그런 식으로 투수 운용하면 내일 경기에 지장이 생긴다고··· 약속이 틀리지 않냐 어쩌고 하면서 거부를 했어. 그 말 듣더니 감독님이 입을 다물어 버리더라고. 그 뒤로···”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최소한의 투수를 써서 이 게임을 마무리하기로 미리 정해져 있었는데 현재 동점이고 연장 승부치기로 갈 것 같으니까 감독은 여기서 승부를 걸어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달라졌고 투코는 신중론을 주장하고···
감독이 투코 대답에 입을 닫아버린 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저 양반 삐지면 오래 가는데··· 완전히 삐졌네.’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조금 전까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금방 구석에 처박혀 숨죽이고 있어야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단체 경기인데 내가 혼자 너무 기분을 냈었나 보네. 내가 이기는 게 아니라 팀이 이겨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빠따쟁이들 너무 하네. 어떻게 한 점을 못 내냐.’
답답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타자들의 분전을 바라는 응원만 보낼 뿐이다.
“아!”
승부치기까지 가지도 못했다. 9회 말 선두 타자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버렸다. 불펜에 예비 투수가 한 명 더 있긴 했지만, 그 선수를 쓸 타이밍은 오지 않았다.
단체 경기는 이렇다. 팀 내 무슨 문제가 있든지 승리하면 대개의 불화가 사라진다. 하지만 지고 나면 좋았던 분위기도 어두워진다. 나만 빼고.
솔직히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업되긴 했다,
게임 직후부터 바로 후배들의 인사하는 각도가 달라졌다.
‘정말 이 동네는 야구 잘해야 형이라니까.’
별것 아니고 신경 쓰고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 내가 꼭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게임 이후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팀이 져서 감정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라는 이성적 사고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아니, 상당히 좋다.
경기 후 내심 기대했던 인터뷰 같은 건 없었다. 지면 그런 것 안 한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이번 한일전 중계 시청률이 0.4%였단다. 이건 일반 프로야구 중계만도 못한 수치였다.
우리 대표팀에 주목받는 유망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나라 팀에 특별한 스타가 나오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대회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한일전에서 지면 언론에서 작게 다뤄진다고 하더니 진짜네. 하아! 진짜 열심히 던졌는데 내 이름이 잘 나오지도 않아.’
베이스볼 클래식 기사는 프로야구 FA 기사보다 작게 다뤄지고 있었다. 그나마 내 이름이 언급된 기사가 몇 개 있어 조금 위안이 됐다.
‘일간지에 이름 한 줄이라도 나온 게 중학교 이후에 처음이네.’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야구 관계자들이나 알면 되는 거지. 거기 눈도장 받은 걸로 만족이야.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고 그런 건 다 남들 이야기지 내 팔자에 무슨···’
내일 대만과의 경기가 또 있지만 내가 등판할 일은 없다. 내일 이겨서 2라운드에 진출해야 다시 출전할 수 있다. 오늘 등판이 어쩌면 국가대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왠지 흥이 식어버렸다.
“어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다. 매우 미묘한 기분이다. 아마 져서 그럴 것이다.
“크큭. 왜 형 별거 없어요? 갑자기 웬 한숨?”
잠깐 잊었다. 이 방에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숨은··· 그냥 숨 쉰 거지. 내가 오늘 피곤해서 숨소리가 좀 커졌나 봐.”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닌데 변명치고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터무니없다.
몇 개월간 한 게임만 보고 달려왔다.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지만, 평생 이렇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루고 나면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진짜 달라질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