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벽을 무너트리면 길이 된다
‘이런 것도 던질 수 있다고··· 맞춰 잡는 건 여기까지야. 문제는 그렇게 던지면 7회를 넘길 수 있을까?’
타자의 놀란 눈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당황해하는 타자들을 상대로 떨어지는 싱커로 카운트를 잡고 간간이 빠른 패스트볼을 섞었다. 순식간에 4회가 삭제됐다.
느긋하게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꿈이 현실에서 성취되었다.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모를 수밖에··· 처음이니까.’
‘중딩 이후 처음인 것 같네. 하! 왜 이 좋은 날 눈물이 날 것 같지?’
다들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광경조차 왠지 모르게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아이고! 표정 관리. 이러다 눈가에 뭐라도 맺히면 두고두고 놀림당할 거야.’
민망한 마음에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가에 힘을 좀 줬더니 덕아웃 좁은 통로에 길이 생겼다.
모세가 홍해를 가로질러가듯 조용히 내 자리를 찾아갔다.
‘할렐루야!’
신을 찬양하고 싶어지는 날이다.
매회 레퍼토리를 추가시켜 나갔다.
5회 슬라이더를 던졌을 땐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내게 들릴 만큼 커졌다. 보여 줬다. 보기에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슬라이더는 실전용으로 아직 부족하다. 휘는 각이 너무 커서 오히려 터널 구간이 너무 짧아진다.
피치 터널(Pitch Tunnel)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공이 투수의 손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타자가 공의 구질을 구별할 수 있는 시점 사이의 구질이 파악되지 않는 구간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동일한 릴리즈 포인트를 가지고, 공을 끌고 나와 던지는 익스텐션이 뛰어나며, 패스트볼과 변화되는 공의 초기 궤적이 비슷할수록 터널 구간이 길어진다. 당연히 타격에 대한 판단을 늦어지게 만드는 피치 터널이 길수록 타자는 타격에 어려움을 겪는다.
슬라이더의 문제는 내 다른 구질들과 초기 궤적이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꺾이는 각이 너무 크다는 게 이런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타자를 현혹할 수 없는 공이 되어 버렸다.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우타자의 몸쪽으로 바짝 붙여서 던져야 하는데 구종이 타자에게 너무 쉽게 파악됐다.
‘그냥 안 치면 다 볼인 걸 누가 적극적으로 배팅을 하겠어?’
실전에서 쓸 수 있으려면 공의 변화하는 시점을 늦추거나 싱커처럼 각을 조절해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해서 넣을 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아직이지. 언젠가는 되지 않겠어? 별로 쓸 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쓸 수 있으면 좋은 거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상대에게 그런 데이터가 없다. 상대가 알아차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보여 줬다. 이런 것도 있다고. 혼란을 부추기는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다. 마침 포수에서 슬라이더 사인이 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거침없이 몸쪽으로 슬라이더를 다시 하나 더 찔러 넣었다. 타자의 어깨가 한 차례 움찔거렸지만,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아직 모르겠지? 배짱이 저래서 어떻게··· 나 고의로 사람은 안 맞춘다고. 자신 있게 휘둘러··· 쯧쯧. 쫄아서 그게 뭐야.’
그 결과가 연속된 삼진으로 이렇게 나타났다.
오늘은 나의 날이다. 작전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4회부터 삼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매 순간 짜릿한 이 기분을 영원히 만끽하고 싶다.
***
“미친··· 씨X··· 저거 뭐야. 저 새끼 한칼 있었네.”
“흠. 최 선배. 아무리 인터넷 방송이지만 그런 용어는 좀 자제를···”
김재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늘 최 선배의 텐션이 지나치게 높았다. 평소 친구와 야구 중계를 보는 것 같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표현 때문에 이 방송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과하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다. 최 선배의 표현이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야! 넌 저걸 보고도 방송 생각을 하냐? 저 씨 발라 먹을 미친 새끼. 저런 걸 어떻게 던지지. 사람 새끼가 아닌 것 같네.”
정말 눈치도 없다. 적당히를 모른다. 자신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런 소감을 속된 표현으로 말하는 것은 방송 끝나고 해도 충분하다. 최 선배의 직업의식이 정말 너무 바닥이다 싶다.
“허허헛. 사람 같이 잘만 던지는데··· 웬 타박이세요?”
억지로 웃으며 상황을 넘기려는데 댓글창에 불이 붙었다. 대화창 올라가는 속도가 가속되고 있었다.
“허헛, 연속 삼진이 다섯 개째군요. 지금 저런 구위라면 공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듯 보입니다. 3회까지는 싱커의 낙차를 이용해서 정타를 피해 맞춰 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구속 차이를 이용한 피칭과 다양한 구질까지 선보이고 있습니다.”
겨우 부자연스럽지 않게 넘긴 것 같았다. 김재수는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억지로 눌렀다.
“완전히 뒤통수 제대로 때렸어. 타자들이 머리 좀 아프겠어.”
최 선배가 좋은 사람이긴 한데 사회생활을 하기엔 아직 머리가 너무 해맑은 것 같다. 오늘 방송은 철저하게 야구 이야기 위주로 끌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하. 질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네요. 저런 공이 들어올 때 타자의 심리 상태는 어떤가요? 우리 타자 경험이 많으신 최 선배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했었습니까?”
또 어떤 파격적인 말이 나올지 몰라 걱정되던 김재수가 선제적으로 멘트를 치고 나갔다. 그는 빠른 속도로 바뀌는 댓글창에서 억지로 아무거나 질문처럼 보이는 글을 골랐는데 현재 중계 상황에 나름 합당한 것 같아 안도했다.
“공 보고 공 치기지. 그게 제일 확실하지.”
잘 치면 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사실에 가장 부합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는 부적절하다.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 이런 말 같네요. 그러지 말고 현역 때 본인만의 타이밍을 잡는 요령이라든가 이런 건 없었나요?”
“그런 건 고등학교 전에 다 배웠잖아. 프로 수준에서 게스 히팅은 양날의 칼이야. 구렁이들이 많아서 난 잘 안되더라고. 그래서 내 존 안에 들어오는 건 무조건 쳤어. 쉽고 간단하잖아.”
정말 쉽고 단순한데 재미도 없다.
“하핫. 그렇군요. 최 선배가 현역 때 천재형 타자로 유명했었죠. 최 선배의 재능이야 통산 성적이 증명하죠.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테고. 질문 방향을 좀 바꿔보죠. 현역 때 어떤 유형의 투수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나요?”
“아! 새끼들 더럽게 못 치네. 저래 가지고 언제 1군 올라가겠어? 이런 씨 발라서 XX버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고심 끝에 던진 김재수의 질문은 간단히 씹혔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 경기에서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모두까기를 시전했던 사람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같은 사람이 맞는지 김재수는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2인 방송에서 말을 안 시킬 수도 없다. 빨리 한국 공격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는 어제 최 선배에게 독설 캐릭터로 밀고 나가는 게 유망해 보인다고 말했었다. 먼저 현역 은퇴를 하고 개인 방송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사회 선배로서 해준 조언이었는데 의미 전달이 잘못된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최 선배는 무례한 태도를 바탕에 깔고 독설이 아니라 욕설을 하고 있었다.
“하하.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 금방 나아지지 않겠어요?”
질문의 형식으로 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동의만 표해주면 된다. 전 프로 투수이자 현직 너튜버는 간절히 기도했다.
“다 알면서 왜 그래? 안 되는 애들은 암만해도 안 돼. 싹수가 안 보이는데 뭘 그렇게 감싸? XX 같이 플레이하는 저런 애들은 곧 밀리게 돼. 해마다 신인들은 들어오고···”
하늘도 무심하다. 그렇게 소원했는데 최 선배가 급발진해 버렸다. 김재수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싹수 노란 애들이 현직 국가대표로 한일전을 하고 있다. 야구팬은 좀 심하게 욕해도 별문제가 안 된다.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행자는···
“허헛. 안타까운 마음이야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야구 후배 아닙니까?”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냥 될 대로 되어라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 사태 수습을 위해 부드럽게 우회해 다시 소통을 시도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한국 공격이 끝났다. 적어도 답답한 상황을 보면서 내뱉는 험한 말들이 더 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음. 오늘 이렇게 한국 수비가 기다려질 줄은 몰랐네요. 일본 타자들을 완전히 농락하고 있어요. 소영수 선수 주가가 폭등하겠군요. 많은 구단들이 탐을 낼 거 같아요. 140을 던질 수 있는 언더 투수 아주 매력적인 자원이에요.”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소영수를 하나로라고 독수리타법님께서 말씀 주셨습니다. 최 선배님 저 정도라면 KBO에서 어느 정도 성적이 가능할까요?”
시기상조에다 비교 대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인 줄 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국뽕과 불타는 지역주의에 기대어 역경을 헤쳐나가려는 너투버의 현실 역투가 이어졌다.
***
이제 곧 7회가 된다. 아직 우리 팀이 공격 중이긴 한데 점수 나는 건 가망 없어 보인다. 현재 스코어는 0:0이다.
지금까지 56구를 던졌다. 이제 14구가 남았다. 다가올 이닝을 넘기기에는 충분한 숫자지만 그다음 회까지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어차피 완투는 어렵고 7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겠네.’
욕심을 부리려고 해도 부릴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아니 뭔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나?’
4회 두 번째 타자부터 지금까지 계속 삼진을 잡아 온 것 같다.
‘그럼 몇 개지? 8개 맞나?’
국제대회에서 연속 타자 삼진 기록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CK 선배가 8개인가 잡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 양반은 메이저리그에서의 연속 삼진 기록도 8개라서 기억하기가 쉬웠다.
메이저리그의 연속 삼진 기록은 10개다. 50년간 단 한 명만이 가진 기록이었다가 2021년 한 명이 더 생겼다.
‘1970년 톰 시버와 2021년 에런 놀라지. 9개는 열 명에 가까운 걸로 아는데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
세상은 일등밖에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일등을 한번 해볼 생각이다. 한국 공격이 끝났다. 이제 남은 나의 역할만 잘 해내면 된다.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 마무리가 중요하다. 게임은 진행형이지만 나의 역할은 이번 회에 끝난다.
한 구 한 구가 모여 기록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