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2화 (12/200)

12화. 에이스의 길

타-악

“헉!”

바뀐 투수의 초구부터 상대의 방망이가 돌았다. 한가운데 빠른 볼. 타격음이 심상치 않았다.

연습구를 던지는데 별생각이 다 든다.

어제 경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4점 먼저 내고 잘 나가다가 4회 상대 타자 일순하며 8점을 줬다. 그리고 반격하여 3점 내고··· 다시 얻어맞고··· 결과는 14 대 12로 결국 역전승을 하기는 했다.

투수 9명을 투입해서 억지로 이뤄낸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번 엔트리에 투수는 11명이다.

‘많이 던지지 않은 몇 명은 연투가 가능할지도···’

이 대회는 투구수 제한이 있다. 1라운드는 70개다. 이걸로 완투는 어렵다. 감독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던지라고 말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신경 쓰인다. 일단 이기고 싶다.

메이저리그에서 정규이닝 최소 투구 수 완봉 기록은 찰스 헨리 바렛이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1944년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세웠다. 58개다. KBO리그는 1987년 청보 핀토스 임호균이 해태 타이거즈와 홈경기에서 기록한 73개이다.

“플레이 볼.”

가장 최근의 일은 2019년 시즌 시카고 컵스의 카일 헨드릭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를 상대로 81구로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2001년 존 리버가 78구였어. 70구 완봉은 안 되겠지?’

첫 구를 던지면서도 어떻게 투구 수를 줄일까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나는 일본이 두렵지 않다. 내 노력과 내 공을 믿는다.

탁-

‘좋은 소리. 그래. 이거지.’

빗맞은 공이 내야로 흐른다.

‘헉!’

2루수 옆을 지나 그대로 외야로 굴러갔다. 입맛이 몹시 쓰다. 굳이 잡자면 못 잡을 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많이 아쉽다.

‘운이 믿음을 배신했네.’

일단 인플레이 된 공에 투수가 관여할 수는 없다. 타구가 투수 앞으로 굴러오지 않은 이상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마저 난 언더스로우라 투구 후 동작이 수비에 썩 유리하지 않다.

‘할 수 없지 이럴 걸 각오했잖아. 다음 타자를···’

1루 주자의 움직임이 매우 부산하다.

세이버메트릭스에 따르면 도루 성공률이 75%가 넘는 매우 뛰어난 주자가 아니면 도루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고 한다. 낮은 성공률은 도루 실패로 인한 손해를 메울 수가 없다,

야구는 통계학적 접근이 가장 용이한 게임이다. 지금 나쁜 운은 상대하는 타자가 많아질수록 평균에 수렴한다. 나쁠 때가 있으면 좋을 때도 있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 졸라 기분 언짢네··· 이럴 수는 없잖아.’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보수적인 국내 리그도 2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도루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는 도루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게 흐름이다.

썩 좋지 않은 머리지만, 한때 세이버메트릭스 공부를 좀 했다. 야구 못하면 다 그렇게 된다.

‘혹시 그거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손을 가슴 앞에서 잠시 모으고 1루를 힐끗 쳐다본다. 견제의 기본은 눈으로 한다. 오늘 포수인 태경이의 2루 송구 팝타임은 1.8초 안쪽이었다, 이 정도면 프로 리그에서도 수준급이라 불릴 수 있는 속도다. 공격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수비형 포수로서는 상당히 훌륭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 때 원 포인트 릴리프로 주로 나섰는데 뭘 훈련했겠어? 주자 없는 위기 상황이 있겠냐구.’

공의 위력을 단시간에 증가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비와 투구 속도, 견제 등은 반복적인 훈련으로 빠른 향상이 가능하다.

‘내 구위가 별로여서 그렇지 그 외에는 다 괜찮았다고.’

딱-

배트 중심 가까이 맞은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고개가 저절로 휙 돌아갔다.

‘이번에 정면이네. 그럼 그렇지. 운은 평균에 수렴하는 거라니까.’

제법 강한 타구였지만 6-4-3으로 이어지는 넉넉한 더블플레이가 나왔다. 내야 수비를 뚫어내기엔 강한 타구가 유리하지만 이런 경우가 되면 진루타도 어렵다.

‘이것들이 내가 만만한가 봐. 배트를 막 돌려대네.’

글러브룰 이용해 정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정도면 보였겠지?’

주자가 없어졌지만, 와인드업을 하지 않고 그냥 세트 포지션 자세를 취했다. 난 이게 더 편하다. 그리고 세게 던질 이유가 없다. 그동안 가장 많이 훈련했던 것이 싱커성 볼의 각을 줄이는 연습이었다.

‘네 볼의 각이 커서 좋긴 하다만 문제는 유인구로서는 괜찮은데 그런 식으로 던지면 스트라이크 판정받기가 어려울 거야. 그게 유인구로서 먹히려면 비슷한 코스와 구질로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 있어야 해.’

고 감독은 그렇게 말했었다.

손장난에 능하다니 손가락 감각이 어떻다니 하면서 코치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투구 시 각 손가락의 힘주는 방향을 달리하는 식으로 같은 폼과 그립에서도 공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걸 흔히들 그렇게 말했다.

팔색조 변화구니 어떠니 하는 게 그런 거다. 난 흔히 말하는 그 손가락 감각이 무딘 투수였다. 어쩌다 각이 큰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런 게 근본적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름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되더군.’

잘못하다간 좋게 만들어진 감각까지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발상을 바꿨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면 다른 걸로 하기로.

‘내 폼이 달라졌다고 난 확연히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안 그런 거 같더라고. 정밀하게 측정하면 릴리스 포인트나 공을 채는 손의 각도 등이 다르겠지만 타자에게만 티가 안 나면 상관없는 거잖아.’

그래서 예전에 던지는 감각을 되살려 쓰리쿼터를 낮게 던진다는 감각으로 던졌더니 예전과 비슷한 변화가 만들어졌다.

‘타자에게 비슷한 구질의 낙폭이 변하는 것 같이 보여지면 되는 거지.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지금 그렇게 던지고 있다. 아주 좋아진 제구 능력을 바탕으로 스트라이크 존의 양 끝에서 낙차를 조절해 넣었다 뺐다 하면서 배트의 중심을 피한다. 130 내외의 구속이면 눈에 환하게 들어오니까 타자가 참아내기 어렵다.

‘좀 지나면 익숙해지겠지만 정타가 나올 때까지 그렇게 가는 거지. 이러면 투구 수는 줄어들잖아.’

그리고 상대 팀 3번 타자는 조금 전 내 웃음을 보았는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다시 공을 유격수 앞으로 굴려 보냈다. 이래서 야구는 멘탈이 중요하다. 열 받으면 자기만 손해다.

생각대로 1회에 안타는 하나 맞았지만 5구로 마무리했다.

***

“아! 아! 안녕하십니까. 전 안녕하지 못합니다. 이 빌어먹을··· 아! 안타네. 오늘은 시작부터 처맞네. 2루수 좀 적극적으로 해라. 느린 타구였는데 잡아야지. 저래 가지고···”

“좀 애매하긴 했었어요. 빗맞았는데 저런 거 잡아주면 투수에게 힘이 되죠.”

오늘도 너튜브 입 중계방은 걸쭉하게 시작됐다. 중계권 문제 때문에 화면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프로선수 출신 선후배가 공중파에서는 들을 수 없는 가감 없는 입담으로 해주는 비하인드 스토리 위주의 해설 아닌 해설에 힘입어 화면은 공중파를 보고 소통은 이곳에서 하는 골수팬들이 상당수 있었다.

“춘천아저씨님께서 투수 소개 부탁한다고 하시는군요.”

두 진행자 앞의 세 대의 모니터는 각각 국내 중계, 일본 중계. 대화방 화면이 보여지고 있었다.

“나도 몰라. 듣보잡이야. 이 년 전에 졸업했는데 프로 지명도 못 받았다고 들었어. 그래서 군대 갔다고··· 고 선배도 촉이 갔나 봐. 어떻게 쟤를 선발로 쓸 생각을 했는지.”

“그래도···”

“아! 야. 놀래라. 더블 플레이 좋아. 그래. 그렇게 해야지.”

하나 이글스의 출신의 전직 투수 김재수는 최 선배의 태세 전환에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경기는 다른 의미로 박진감이 넘친다. 시작하자마자 두 개의 투구가 다 맞아 나간다.

“음. 그래도 알아보니까 한때 대학 리그에서는 최고의 원 포인트 릴리프로 손꼽히긴 했다고 합니다. 비록 프로지명은 못 받았지만, 거기에 근접했던 선수라고 봐야죠. 지명을 못 받은 건 실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나이와 보직 문제가 가장 컸다고 하더군요.”

“그런 문제가 있었을 거야. 나이라도 어렸으면 후순위라도 뽑혔을 텐데 원 포인트 릴리프는 많이 어중간하지. 그냥 선발로 키우던 애가 잘 안 풀리면 보내도 되는 보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번에 잘 던져서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린 시절을 오직 야구에만 매달렸는데 저런···”

“잘했어. 쟤도 괜찮네. 고 감독님 촉 죽었단 말은 취소할게요.”

갑작스런 최 선배의 말에 카메라를 응시하며 멘트를 치던 김재수가 옆 눈으로 본 모니터에서 일본의 3번 타자가 친 공이 유격수 쪽으로 구르고 있었다.

***

3회까지 3안타를 맞았다. 매회 안타를 맞았지만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에 힘입어 9타자만 상대했다. 삼 회까지 투구 수 16개였는데 4회 첫 타자에게 다섯 개째를 던지고 있다.

‘공을 좀 지켜보기로 했나 보네. 이러면 유인구 승부가 무의미한가?’

70개로 최대한 오래 던져야 하는데 볼 배합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구위로 찍어 눌러야 하나? 3회면 많이 끌고 온 거지.’

수비진이 안정을 찾았는데 아쉽다. 어느 순간부터 내야수들이 적극적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벤치도 부산해졌다. 모두가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 같다.

볼 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볼 배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지금까지 포수의 사인대로 던졌었다.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포수 태경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새로운 사인을 낸다.

‘그렇지.’

마음에 꼭 든다. 태연하게 세트 포지션 그대로 인코스를 노려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팡-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미트에서 울렸다. 타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타석에서 얼어붙었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이거지.’

누가 놀라거나 말거나 희열에 몸을 떨었다. 지난 몇 달간 이 순간만을 생각했다. 나의 달라진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슬쩍 바라본 전광판에 표시된 구속은 143km. 빠르다면 빠르고 그저 그렇다면 그저 그런 구속이다. 하지만 난 언더다. 이런 구속을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타자의 대응 방법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몰라. 낙폭을 줄이려고 예전 감각대로 좀 세게 던졌더니 구속이 이렇게 나오더라구.’

물론 이렇게 세게 던지면 테일링이 원래처럼 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타자가 130짜리 제멋대로 떨어지는 공에 익숙해 있다가 갑자기 구속과 공의 움직임이 이렇게 차이가 나면 타격 타이밍을 맞추는 건 고사하고 몸이 얼어붙는다.

사람 감각이란 게 아무 때나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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