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진실이라서 아프다
『협회의 인맥 야구 이대로 좋은가?
전횡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투수 유망주 넘치는 마당에 소영수라니··· XX대는 현대 스포츠계에서 보기 힘들어진 의리의 완성형을 보여주고 있다. 부회장과 기술위원장 감독에 이어 드래프트에 선택받지 못해 은퇴한 지 2년 지난 투수까지··· 협회의 묵은 비리를 자꾸 떠올려야만 하는 야구팬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이번 사태에 익명의 한 관계자는 협회의 비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현 회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에둘러 비판··· 한국 야구 발전에 XX대 출신들이 많이 기여해 왔지만··· 기대를 가지기도 미안할 정도의 선수를 선발해야 하는 인맥 선발 과정이 이러니 결과가 좋을 수가 없고 만일 결과가 좋더라도 과거 비판을 물타기 하려는 협회의 편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빠돌이 : 근데 소영수가 누구임?
느림보 : 듣보잡이잖아.
콜롬보 : 감독 아들인 줄 알았음. 하도 뒷말이 많아서 협회에서 대표 사퇴를 시키려고 했는데 감독이 결사반대했다고. 그러면 자기도 그만둔다 그랬대.
대마소다 : 아는 선배에게 물어보니까 군대 가기 전에 좀 하긴 했대. 주로 계투였지만··· 원 포인트 릴리프.
대미소다 : 그 선배 성골 라인임. xx중, xx고, XX대
지렁이가 꿈틀 : 나 후배임, 그 형 대학 때 유명했었다 함.
느림보 : 그럼 안 알려져서 그렇지 나름 잘했었나 보네. 감독이 그렇게 믿을 정도면···
지렁이가 꿈틀 : 야구로 유명했던 게 아니라 그 형 차가 포르셰여서 ㅋㅋ.
빠돌이 : 오호! 금수저? 나 금수저 조아. 밥 잘사는 선배가 최고임. 야구는 나만 잘하면 됨.
지렁이가 꿈틀 : 좀 던지긴 했다는데 대표에 뽑힐 정도 급은 안 되었다고 했음.
인터넷으로 기사에 달린 댓글을 좀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져 기분 전환 좀 해보려고 대표팀 공용 대화방에 들어왔는데 이곳도 민심이 이렇다.
‘딱 말하는 폼들이 고졸 일이 년 차쯤 되겠네.’
이것들은 내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안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보라고 씹어 돌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들어와서 기분만 잡쳤다. 직속 후배도 있는 것 같은데 심하게 말하는 건 그놈이 더하다. 이곳에는 동문의 정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콜롬보 : 팔 월 말에 첫 훈련 가서 보면 알겠지.
느림보 : 기대하지 마라. 괜히 보고 나서 에잇, 더러운 세상 어쩌고 하게 된다. 이 동네 그렇게 돌아가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란다.
대미소다 : 얘들이 어려서 세상의 이치를 잘 몰라서 그래. 목숨 걸고 야구 하는 애가 있으면 야구가 취미 생활인 사람도 있는 거야. 국가대표 함 해보려고 별 지랄 다 하는 가난뱅이도 있고 국가대표 경력을 야구 연습장 광고에 한 줄 넣으려고 뽑히길 희망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콜롬보 : 새끼 말 더럽게 하네. 너한테는 야구가 그것밖에 안 되냐?
대미소다 : 왜 그렇게 화났어? 어느 쪽이야? 설마 가난뱅이라고 해서 화난 거야? 내가 잘못했네. 병신더러 병신이라고 하다니··· 팩트도 상황 봐서 이야기해야 되는 건데···
콜롬보 : 이런 싸가지 없는···
대미소다 : ㅋㅋ 미안해. 너도 야구는 겁나 못하겠다. 머리가 따라줘야 몸 쓰는 게 발전하는 건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걸 보니··· ㅋㅋ.
콜롬보 : XXX··· xxx··· 너 누구야. 이런 XXX.
유난히 쌍시옷이 들어간 단어의 활용 빈도를 높이면서 강아지 안부를 묻는다.
‘요즘 애들 끝내주네.’
참여 인원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대화방이다. 이런 곳에서도 대화명이란 가면은 이런 위력을 발휘한다.
감독은 흔들리지 말고 꿋꿋이 버티다 대회 나가서 잘 던지기만 하면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하지만 다수가 멀쩡한 놈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인 것 같다.
‘그게 투수의 운명 아니겠어? 혼자 다수의 타자를 상대하는 에이스의 숙명 같은 거지.’
물론 경기를 하려면 포수와 야수가 필요하지만,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경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야구는 투수 중심의 게임이다.
‘즉 내가 주인공이라는 거지.’
야수 놈들은 투수가 최고로 잘해봐야 무승부라고 승부를 내는 건 타자라고 말을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원래 난세에 영웅 나고 영웅은 고독한 거다. 이건 비룡이가 이름만 바꿔 똑같은 클리셰를 반복해도 인기가 넘치는 장르를 생각하면 확실하다. 똑똑한 개인이라도 대중이 되면 무지하게 된다.
‘즉 고난의 극복이야말로 영웅의 조건이라는 거야. 그럼 욕하던 대중은 쉽게 가면을 바꿔 쓰고 무지한 대중에게로 비난의 방향을 바꾸는 클리셰를 반복하게 돼. 대중이란 그런 거야.’
결론은 난 스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자다. 다 잘될 거다.
따라 따라 라-
어디선가 전화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방의 화면이 교체되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어린놈들 툭탁거리는 걸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다.
“여보세요. 소영수 선수시죠?”
‘소영수 선수? 날 이렇게 부른다는 건···’
억지 논리지만 나름 멘탈 관리를 위해서 노력 중인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날 부르는 호칭이 어쩐지 불길하게 들린다.
“그런데요.”
“여기 고려 스포츠 최민용이라고 합니다.”
상대는 직함을 말하지 않았지만 기자란 말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아··· 예. 무슨 일로···”
선수 선발 건 말고는 기자가 날 찾을 일이 없다. 일단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요즘 마음이 많이 안 좋죠? 주목받는다란 것이 그렇답니다. 대중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거든요.”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제가 경위를 좀 알아보니까 무조건 비난을 받기에는 좀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 같더군요.”
무슨 경위를 알아봤다는 건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전형적인 넘겨짚기다. 이런 건 군대에서 많이 당했었다.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 별 경력도 없는 제가 대표팀에 뽑힌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선수가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면 그렇겠죠.”
상대가 상당히 삐딱하게 이야기를 한다. 혹시 누가 물어보면 선발 과정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감독과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몰라본 재능을 감독 혼자 알아봤다는 게 되어야 감독의 선견지명과 유능함이 부각된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감독은 그렇게 말했었다.
“저는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드린다면 야구팬들께서도 이해하시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좋은 결과를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요? 우리에게 어떤 제보가 하나 들어왔는데 협회와의 유착에 대해 미리 해명할 기회를 드리지요.”
또 넘겨짚기가 나오는 것 같다.
“유착.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위협에 겁을 먹기에는 나도 사회 경험이 좀 생겼다.
“진짜 그런가요? 제보에 의하면 일찍··· 그러니까 소영수 선수가 대학 입학할 때부터 협회 김수길 이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듣다 보니 기가 막힌다. 느낌이 바로 왔다. 저 기자는 너는 부정 입학한 게 아니냐고 물으려 지금까지 말을 빙빙 돌린 것이다.
내가 입학한 경위에 범법적인 요소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유능한 선수 한 명에 업혀서 동기들과 입학한 것이 도덕적인 잣대로는 비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부정입학이라고 해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여러 상황이 맞아서 있는 관행을 이용했을 뿐이다.
“기자님! 기자님 맞으시죠?”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고려 스포츠 최민용 기자입니다. 생각이 좀 달라지셨나요? 진실을 밝혀주시면 최대한 본인에게는 피해가 없게끔 기사 잘 써드리지요.”
잘 모른다는 것이 진실이다.
“저는 지금 그 김 무슨 이사란 분 이름을 처음 들어봤고 제 입학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셔도 입학할 때 전 고3 20살도 안 되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본인은 그렇지만 부모님은 아니죠. 들은 이야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감추려 해도 진실이라는 건 언젠가 다 드러납니다. 괜히 나중에···”
부모님까지 소환당했다. 그분들은 나 때문에 고통받은 분들이다. 이 미친 기레기 놈과 이야기를 더 이상 하기가 싫어졌다.
“지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부모님이 안 계셔서요. 전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끊습니다.”
“아니, 여보세요. 소 선수!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처음엔 점잖게 권유하더니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엔 협박조로 나온다. 무시하고 그냥 끊어버렸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건가?’
내 나이 만 25세. 이런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적은 나이인 것 같다.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온전한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떠한 주변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다가 이제는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의논 상대는 감독밖에 없었다. 그가 좀 미덥지는 않지만 이젠 부모님은 안 계신다.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요즘 협회에 출입하느라 예전처럼 매일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조금 전 통화한 내용을 이야기해 줬다.
“뭐? 그래? 어디 신문사라고? 고려 스포츠? 기자 이름은···”
감독은 자기 묻고 싶은 것만 물어보더니 내 의견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다 모르겠다고 해. 그럼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오늘 연습을 어떻게 했어? 몇 개 던졌다고? 러닝은··· 그래 잘했다. 열심히 해. 넌 일본전만 잡으면 영웅 되는 거야. OK. 수고.”
이제 20대 중반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중심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 휘둘리고 내가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원래 그랬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지만 이대로는 마음이 어지러워 도저히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좀 뛰고 싶었다. 운동복을 다시 챙겨 입었다.
‘난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야구 잘하자.’
그렇게 어두운 밤 학교 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