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8화 (8/200)

8화. 생의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다

찜질방 생활을 청산하고 급하게 학교 근처에 원룸을 구했다. 그리고 매일 모교 선수들의 훈련에 참여했다.

“희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게 감이지. 진작 좀 잘하지. 어휴! 지금이라도 감 잡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맞겠지. 하긴 그게 마음대로 되면 세상에 야구 못하는 놈이 있겠어?”

왜 이런지 나도 모르겠고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생각해오던 이야기를 곁들여 해주었더니 감독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것 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아! 몰라.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잖아.’

감독의 말투는 상냥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정말 야구 잘하고 볼 일이다. 감독이 이렇게 헌신적인 지도자인 줄 상상조차 못했었다.

운동을 쉰 이 년을 보충하기 위해서 감독이 원하는 훈련을 사력을 다해 소화해 냈다. 훈련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점점 공에 힘이 붙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훈련 봐주고··· 다 좋은데 왜 어디 가라는 말이 없지?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 공이 본인 기준에는 모자라나?’

처음에는 이렇게 훈련할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좀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어디든 소속을 가지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취미 생활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일단 어디 육성팀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공은 아주 좋아진 것 같은데···’

감독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만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었다. 고인물이 장악한 야구판에서는 내 의지보다 그의 생각이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그런 건 초중고에서 대학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이 봐 왔었다.

혼자 힘으로 난리를 쳐 봤자 어느 구단이든 입단은 고사하고 테스트 한 번 받기도 힘들다. 하지만 감독이 나서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맥이니 뭐니 부정적 시선은 많지만, 우리 감독이 그 정도 힘은 있다. 그가 추천한다면 비공개 테스트를 통해 충분히 육성선수 입단 정도는 가능하다.

‘어쩌면 테스트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쯤은 들어가야 내년을 바라볼 수가 있는데··· 너무 늦으면 뭘 보여주고 말고 할 시간이 없잖아. 그럼 내후년으로 밀리고···’

그럴 수는 없다. 지금 만 25세 4개월이라는 나이가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우리 나이로 하면 벌써 27세다.

일단 육성군이 되든 이군이 되든지 어디든 들어가면 뭔가를 보여줄 자신은 있는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에구, 어디든 들어가 아주 잘해서 내년에 1군이 된다고 해도 FA 한 번 할 수 있을까?’

고졸은 9시즌. 대학 졸업자는 8시즌을 뛰어야 FA가 될 수 있다. 내년에 1군 무대를 밟는다고 해도 내가 FA가 되려면 만 33세 시즌이 지나야 한다.

‘부상 없이 꾸준히 출전해서 우리 나이로 36살이 되어야··· 하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야구로 큰돈 벌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혹시 드래프트를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

규정을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그게 된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다. 스카우터들에게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대로라면 시합을 나갈 수도 없다. 실전에서의 기록도 없이 투구 테스트에서 공 몇 개 던지는 것 보고서는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어린 고교 졸업생들과 도저히 경쟁이 안 된다.

‘뒷순위로 뽑히면 계약금을 얼마 받을 수도 없어.’

그렇다면 육성선수와 큰 차이도 없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초조함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어느 날 한계에 부딪쳤다.

“저··· 감독님. 그게···”

“왜? 무슨 문제 있어? 어디 아파?”

갑자기 감독의 얼굴빛이 확 변한다. 이렇게 내 몸을 생각해 주다니 조금 감동 받았다.

“아뇨. 몸 아주 좋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감동은 감동이고 할 이야기는 해야 한다.

“아! 그런 문제였어?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내가 생각이 없겠니? 내가 야구 짬밥이 몇 년인데··· 내가 왕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불굴의 베테랑이야.”

“그래도 무슨 구체적인 일정이라도··· 목표가 있어야 훈련에 능률이 오르고···”

혹시 오해의 소지가 생기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부드럽게 내 의사를 표현했다.

“너 솔직히 나 고맙지. 그렇지?”

이렇게 생색을 내지 않으면 감동이 배가 될 텐데, 감독의 인간성은 감출 수가 없다.

‘하! 왜 이 사람은 근엄한 지도자의 모습 이런 걸 못 보여줄까? 저런 말 안 하고 입만 다물어도 존경받을 텐데··· 어휴! 참!’

“그럼요. 제가 몰랐던 참 스승으로서의 감독님 모습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 군대에서 배웠다.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이었다.

“그렇지. 내가 은혜 갚을 기회를 주마. 나만 믿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날아왔다.

“팔 월 말에 국가대표팀이 소집된다. 지금 선수 선발 작업 중이야.”

“예?”

‘지금 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설마··· 아니겠지?’

우리 감독과 국가대표팀을 관계 지을 수가 없었다. 대표팀은 전임 감독제가 된 지 오래되었다. 굳이 연관을 따지자면 우리 학교에서 선발되는 선수가 있을 수는 있다.

“누가 대표팀 가요? 아마추어로 거기 뽑히면 드래프트 순번에 도움이 되긴 하겠네요. 물론 가서 잘해야겠지만.”

“너 뽑을 생각인데···”

“네?”

‘이럴 수가··· 우리 학교 라인이 이렇게 막강한가? 미처 몰랐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 감독 맘대로 그게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혹시 대표팀 감독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없더니··· 학교는 언제 그만두시는 겁니까?”

대개 선수 선발은 기술 위원회에서 한다고 알고 있다. 진짜로 대표팀 감독이 된다고 해도 실적도 없는 아마추어선수를 선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 그만둬. 프로팀에서 모시러 오면 몰라도 대표팀 감독한다고 철밥통을 걷어찰 멍청이가 있겠냐?”

“겸임해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지금 대표팀 감독님은 어쩌구요.”

“김성수 선배는 그만둘 거야. 발표만 안 했지 그만둔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감독 말에 의하면 이번 월드 베이스볼 대회에 각 프로팀에서 선수 차출을 거부했다. 군 면제가 걸린 대회도 아니고 대회 기간이 시즌 끝에 걸려서 구단과 선수 모두 대표팀 선발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임 감독이 2군 데리고 성적을 어떻게 내냐면서 성질내면서 그만둬 버렸다고···

“누가 해도 성적이 엉망일 게 뻔하잖아. 그래서 명분이라도 살리기로 한 거야. 아마추어 야구 활성화와 신인들의 경험을 쌓는 기회의 장으로 월드 클래식을 활용하겠다. 이렇게 보도가 나가기로 되어 있지.”

취지는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나가서 1승이라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는 걸 좋아할 야구팬은 없다. 게다가 예선에 일본, 대만과의 시합이 있다. 거기서 콜드게임이라도 당하면 이건 감독이건 선수건 욕받이 확정이다.

“다들 하기 싫어했지. 그런데 그때 니가 나타난 거야.”

뜬금없긴 하지만 난 지금 감독에게 뭔가 대단한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제 공이 거기서 통할까요?”

“그럼. 지금 정도로만 던지면 프로에서도 선발 10승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대회는 단기전이야. 너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 네 공을 바로 보고 칠 수 있는 급의 선수가 거기 나올 확률은 희박해.”

슬슬 구미가 당긴다. 우리 감독이 가끔 헛소리를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실력지상주의자다. 그가 그렇다면 진짜 그런 거다.

“내가 감독직 수락 조건으로 선수 한 명만 내 맘대로 뽑게 해달라고 했다. 무조건 넌 이번 대표팀 확정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널 데리고 갈 거다. 네가 해줄 일은 일본전 한 게임만 잡아라. 예선 통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사실 운이 따라야 해서 바라지도 않아.”

야구 열등생이 어느 날 갑자기 국가대표가 되어서 일본전에서 화려하게 등장. 대중은 인생역전 스토리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 내년 드래프트에서 어느 팀에서든 계약금 넉넉하게 주면서 데리고 갈 것이다.

이건 내 쇼케이스나 마찬가지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나저나 우리 감독이 이렇게 속정이 깊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게 츤데레지. 물론 내가 근본적으로 야구를 잘해서 생긴 일이지만 그래도 야구판에서 이렇게 나를 현실적으로 챙겨 주는 유일한 사람이야.’

이래서 선배가 최고라는 말이 있나 보다. 스승에 이어 인생 선배로 길이 받들어 모셔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다.

“내가 대학팀 감독으로 야구 인생을 끝내기에는 너무 잘났잖아.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팀을 이끌고 한일전 승리의 영웅으로 우뚝 서는 거야. 그걸 발판으로 삼아야지. 나도 프로팀은 한번 맡아봐야 하지 않겠니.”

‘휴! 일 절만 하시죠.’

뉘앙스가 좀 이상하지만, 개인적인 야망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굳이 바라지 않아도 서로의 이익이 합치되는 곳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것 정도는 다 안다. 나도 이젠 어른이다. 사회인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리고 널 데리고 프로에 입성하는 거지. 실력만 확실하면 어느 구단이든 손을 내밀 거야. 육성선수는 연고지 규정에 걸리지 않아. 어디든 먼저 찍는 곳이 임자지. 넌 날 따라가는 거다.”

‘헐! 이 양반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알아서 존경해 줄 텐데··· 어휴! 진짜 미친다. 꼰대 근성 지리네.’

“사회란 것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형식은 육성선수겠지만 그렇게 구단들이 서로 원한다면 과연 최저연봉만 받겠니?”

이제 보니 감독은 혼자서 대하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보는 재능을 일깨워 키워낸 스승과 그 제자의 콜라보. 그림이 좋잖아. 그게 우리의 기브 앤 테이크야. 난 일단 줬다. 넌 의리 있고 착한 애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무슨 영화 찍어요? 감독님은 돈 꼴레오네 타입은 아니에요.’

이제 감동은 사라지고 이해타산만 남았다.

“그럼요. 지금 제가 누구 때문에 여기에 있겠습니까? 제 사전에 배신은 없습니다.”

나중은 없다. 지금 적절한 대응을 해야 했다. 이게 사회생활이다. 난 대학 졸업한 지 이 년이나 되었다.

‘이제 고생 끝이야. 날기만 하면 돼.’

무사히 비행을 마치면 환호만이 기다릴 것이다.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지. 육성군이면 어때. FA 까짓것 안 하면 되지. 돈이야 적당히 있으면 되고 스타가 되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감독이 장담했던 대로 난 태극마크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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