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우연 혹은 필연
며칠 안으로 송금도 해줘야 하는데 뚜렷한 해결 방법이 안 보였다. 병원비 몇십만 원이 이렇게 부담이 되는 금액인지 상상조차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에서 월급이라도 모아 놓았어야 했는데··· 하아! 어쩌지? 정말 방법이 안 보이네. 하필이면 손목을 다쳐서 당장 일을 하기도 어렵고···’
정말 갑갑하다. 이틀을 더 고민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야구를 같이 하던 친구들은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독불장군이었다. 그들과는 평소에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다.
소식도 모르고 지내던 놈에게 돈 좀 빌려 달라고 전화가 오면 나라도 좋게 생각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스스로를 자책하다 결국 닿은 생각의 끝은 엄마였다. 한 가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게 있었네. 대여 금고. 거기 뭐가 좀 들어 있지 않을까?”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 내게 열쇠를 하나 준 적이 있었다. 내 이름으로 대여 금고를 하나 만들었는데 결혼할 때 열어보라고 하셨다. 지금껏 잊고 있었다.
“그걸 어디 넣어 놨더라? 가방 어디에 있겠지. 가방 찾으러 가야겠네.”
분명히 기억이 났다. 현금카드, 운전면허증 같은 개인 물품을 보관하던 조그만 상자에 열쇠도 분명히 같이 들어 있었다.
지하철역 수화물 보관함에 제대하면서 가져온 짐가방을 넣어 놓았는데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부랴부랴 나가서 가방을 가져 왔다. 그리고 열쇠를 찾아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대여 금고가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지점을 방문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가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아! 엄마··· 으흐흑.”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엄마의 결혼 축하 메시지와 시계 두 개, 반지 두 개가 들어있었다. 정말 정신 차리고 잘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물건을 들고 와 며칠을 고민하다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통해 처분했다. 이런 상황을 엄마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도 여자용 두 개는 남겼다.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며느리를 생각했던 엄마의 정성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상당한 금액의 잔고가 생기고 약속했던 날짜보다 좀 늦었지만 병원비도 송금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질 않았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할 건 하고 살아야 한다.
도와주신 선배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전화를 했다. 평소의 물 한 모금과 목마를 때 물 한 모금은 분명히 다르다.
통화 연결이 안 된다. 아마 바쁜 것 같다.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고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넣으려 하는데 오히려 전화가 왔다.
“바쁘신데 전화 드렸었나요?”
“어! 지금 좀 그렇고 시간 되면 모레쯤 와.”
“네? 무슨···”
“나 지금 길게 통화 못 해. 다친 곳 살펴봐야 할 거잖아. 어쨌든 별일 없으면 와. 끊는다.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하려는 전화였는데 엉뚱한 약속이 잡혔다. 지방이라 거기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은 걸린다.
“깁스한 지 거의 이 주가 다 되긴 했네.”
어쨌든 어디가 되었든 병원은 가야 하는데 굳이 오라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야구 말고 뭘 할 수 있지?’
군에서 영어 공부는 좀 했었다. 그것 말고 지금의 나는 대학을 나왔지만 운동만 했던 일반인이다. 상당한 금액이 생기긴 했지만,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아니야. 이걸로 일단 시작할 정도는 될 거 같은데··· 가서 일거리를 찾고 그러면 가능하려나? 공부 마치려면 몇 년은 걸리겠지?’
이미 많이 늦어버렸지만, 엄마가 바라던 일을 하고 싶었다. 요 며칠 사이 조금의 시간만 생기면 별생각이 다 들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간단한 검사 후 깁스를 풀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끗하게 잘 나았어. 좀 있다가 오후에 물리치료도 받아. 내가 이야기해 놨어. 그거 하고 나면 훨씬 빨리 좋아질 거야.”
“네? 아··· 예.”
의사가 그렇다니 그렇겠지 싶다. 이 주 동안 고정되어 있던 손목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거 하고 나면 내 퇴근 시간이랑 거의 맞을 거야. 온 김에 소주는 한잔해야지? 전에 밥도 한 끼 못 먹이고 보내서 영 찜찜하더라고···”
‘이게 무슨 일이지? 사회에서 선배가 후배 만나면 보통 이렇게 하는 건가?’
운동선수들은 이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건 다른 경우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여기는 선배의 홈그라운드였다. 어리둥절했지만 얌전히 그의 뜻에 따랐다.
“전에 말입니다. 왜 도와주신 겁니까? 사실 그때 상당히 곤란했었거든요.”
풍성한 고기와 술의 힘은 입을 술술 풀리게 한다.
“응? 그거? 그냥 딱 봐도 많이 곤란해 보였어.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내가 널 야구장에서 한 이 년 봤는데··· 그 정도면 생판 모르는 사람은 아닌 거잖아.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뭔가 상당히 오지랖 넓은 꼰대스러운 말인 것 같은데 그것이 나에게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었다. 마냥 거부감을 느끼는 건 대가 없이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에게 온당한 대접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일 해결이 잘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 오늘 한 잔 마시고···”
제대 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리였다.
“영수야! 일어나.”
“으응. 예.”
어젯밤 한 잔 잘 얻어먹고 선배 집까지 따라왔었다. 모처럼 정상적인 침대에서 꿀잠을 잤다. 그동안 많이 불편하게 지내긴 한 모양이다. 잠이 잘 안 깬다.
“집을 구하긴 해야겠네. 거기 오래 있다가는 몸이 못 견디겠어. 이제 몸뚱이 하나 남았는데···”
찜질방 생활이 이 주가 넘었다. 올라가면 방을 구해야겠다.·
진수 형이 운동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어제 술 먹으면서 형 동생 하기로 했다. 나보다 세 학번 위였다.
“형 몇 시예요?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나···”
“아니, 늦게 일어나지 않았어. 지금 여섯 시야.”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들어왔었다. 여섯 시라면 겨우 다섯 시간 남짓밖에 못 잤다.
“오늘 밤 근무라고 하지 않았어요? 새벽부터 무슨···”
레지던스 3년 차, 피곤해서 죽겠다고 앓는 소리 하더니 어젯밤 술 먹은 사람치고는 새벽부터 너무 쌩쌩하다.
“영수야! 이 형이 박봉을 털어 숙식을 제공했으니 은혜를 갚아야지.”
새벽부터 진지한 얼굴로 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크큿. 뭘로 은혜를 갚아요? 집 청소라도 해줘요?”
“너한테 그런 걸 어떻게 시키겠어? 네가 잘하는 거 해주면 돼. 나도 그 레슨이란 거 한번 받아보자.”
“무슨 레슨이요? 설마··· 야구요?”
멀쩡한 의사 선생님이 야구라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글러브가 날아왔다. 얼떨결에 덥석 받았다.
“나 야구 한다. 투수야.”
진수 형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롤링스?”
익숙한 프로 프리퍼드(Pro Preferred) 등급의 올 라운드 글러브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날씨는 딱 좋았다. 사회인 야구, 말로만 들었는데 그 바쁘다는 수련의 생활을 하면서 쉬는 날 야구를 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9시 30분부터 시합이라는데 몇몇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 몸을 풀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진지한 모습에 숙연해질 지경이다.
‘장비만 보면 프로들이네. 정말···’
“아마추어들이 이런 글러브를 쓸 필요가 있어요? 대부분 보급용 제품이랑 차이를 느끼지도 못할 것 같은데···”
진수 형의 글러브도 W로 시작하는 메이커 제품이다. 수비 연습을 하는 걸 좀 봤는데 솔직히 실력은 별로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뭐가 나아도 낫지 않을까? 실력도 모자라는데 장비빨이라도 있어야지.”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진수 형도 뭘 봐주고 말고 할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그냥 공을 채는 요령만 조금 설명해줬다. 투구 시 중심 이동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기본적인 근력이 되어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선수들이 왜 끊임없이 러닝을 하겠는가? 일반인이 선수처럼 한다는 건 무리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 속에도 복잡한 매커니즘이 숨어있다.
진수 형이 선수 출신의 대학 후배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코치 소리를 들어가며 몇몇 사람들의 자세를 봐주긴 했지만, 솔직히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참 난감하네. 의욕은 넘치는데 몸은 안 따라주고··· 선수들처럼 하고는 싶어 하고···’
예전 우리 감독처럼 정확하게 사실을 짚어주고 싶지만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에 열정이 보이는데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지?”
“아··· 예. 이삼 주 되었습니다.”
펑퍼짐한 체형의 사십 대의 아저씨가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흐흣. 뭘 그렇게 곤란한 얼굴이야? 배 나온 아저씨들이 별 이야길 다 한다 싶지?”
“좀···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구요.”
“다 알아. 다 안다고.”
내 표정에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몹시 당황스럽다.
“저기··· 실수했네요. 그런 마음은 아닌데···”
“자네 탓을 하는 게 아니야. 자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도 다 안다고. 자기들이 무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네?”
“희망사항이야. 꿈꾸는 건 자유잖아. 그게 꼭 현실에서 이뤄져야 하는 건 아니라네. 그냥 바람 같은 거라고··· 너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사람이 밥만 먹고는 못 사는 거라서 그래.”
“아··· 예.”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좋은 이야기인 것은 확실하다.
“그냥 자네 던지는 거나 좀 보여주면 다 좋아할 거야.”
“그건··· 제가 현역 선수도 아니고···”
공 안 던진 지가 이 년이 넘었는데 자신 없다.
“괜찮아. 다 이해한다니까. 그냥 대충 보여 줘. 어이! 다들 이 친구가 공 한번 던져보고 싶다는 데 시범이나 한번 보자고···”
‘하! 이 아저씨 급발진하시네.’
“그래? 그거 좋지. 오랜만에 선출 공을 받아보겠네.”
“야! 강 사장 요새 눈도 침침하다며··· 니가 선출 공을 어떻게 받겠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왕년에 프로 선수 공도 받아보고···”
거절할 틈도 없이 사람들을 모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몇 개는 던져야 할 것 같았다.
“야! 소영수. 괜찮겠어? 깁스도 어제 푼 사람한테 다들 뭐 하자는 건지··· 미안하다. 내가 괜히 오자고 해서···”
“안 던진 지 좀 되긴 했지만 몇 개 정도야 어떻겠어요. 손목은 괜찮아요. 탈 나면 형이 또 고쳐 주겠죠.”
손목을 돌려봤는데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해도 아프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신중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데 기분이 묘했다.
제대로 몸을 풀지는 못했지만 대충 하긴 했다. 그리고 선수로 공을 계속 던져야 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 삐끗한다고 어떻겠냐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