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4화 (4/200)

4화. 심장 튼튼은 필수

2루수는 뒤로 슬금슬금 타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떨어져··· 그만 가고 떨어지라구.’

저 공 외야수는 못 잡는다. 어떻게든 2루수가 잡아야 한다.

‘잡아! 꼭 잡아야 해.’

이윽고 2루수가 점프했다. 그리고는 공을··· 잡아냈다.

‘후아아아! 넘기는 줄 알았네. 어이쿠.’

터벅터벅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가 글러브를 벗는데 안에 땀이 흥건했다. 내 패스트볼은 헛스윙이 나올 만큼 변화가 크지 않았다. 무브먼트 때문에 정타가 어렵지만 130대 후반의 구속이면 웬만한 타자는 다 맞힐 수 있다.

‘헐! 심장 떨려. 알고는 있었지만 졸라 무섭네.’

그 뒤로도 대학 리그에서 난 좌우 타자를 가리지 않고 팀의 위기극복 스페셜리스트로 나름 잘 나갔다. 한계는 뚜렷했지만 한 타자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내 투심성의 패스트볼은 거의 정타가 나오지 않았다. 나도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애매한 제구력은 상대의 게스 히팅을 봉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프로에서 선택받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우리 팩폭이 전문이신 감독님께서 미리 여러 차례 언질을 주셨다.

“니가 말이다. 좀··· 아니 많이 애매하지. 고졸이면 어떻게 뽑아서 기다려보겠는데 대졸은 어렵겠다고 하더구나.”

“예.”

“나이가 그러면 어느 정도 완성형에 가까워져 있어야 하는데··· 세컨 피치도 없고··· 선발형도 아니고 그냥 마음 비워라. 혹시 알겠니? 어느 팀이든 머리에 총 맞은 스카우터 놈 하나쯤은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말씀에 충분히 공감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번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상처를 여러 차례 헤집는 건 너무 심했다.

많이 아팠다.

‘나 말고··· 엄마가···’

드래프트를 탈락하고 엄마가 입원하셨다. 아마 나 때문에··· 되지도 않을 드래프트 때문에 부정 탄다고 오래 참아 오셨던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달 후 조용히 가셨다.

입원하셨던 두 달이 내가 머리 크고 나서 가장 긴 시간 엄마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상하지만, 병간호가 즐거웠다. 엄마는 명랑했고 언제나처럼 내 미래를 이야기해주셨다.

“영수야! 마 니는 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 내가 여 누워 있어 보니까 돈이든 명예든 다 허망한 기라. 그렇게 아등바등 살 거 없다. 우리 때는···”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오셨던 분이 마지막엔 마음 약한 할머니가 되셨다.

‘그러시더니 느닷없이 병세가 악화되어 일주일도 안 되어 가셨지. 입원했을 때부터 이미 병세가 너무 진전되어 있어서 수술도 못했어.’

현실감이 없었다.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 엄마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이라는 걸.

허탈했다. 만사가 귀찮았다. 상실감에 시달리다 군대를 갔다.

“잘 생각했다. 이제 야구는 접고 살 궁리해야지. 어떻게 육성선수로 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거 한다고 근본적인 실력이 향상된다고 보장할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라. 넌 집에 여유가 있으니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야구 말고도 있잖아.”

군대 가기 전 인사 갔더니 우리 감독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화법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렇거니 했었다. 그 정도면 그 양반으로서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거였다. 서운하고 말 것도 없고 덤덤했다.

“야구 그깟 것 안 한다고 무슨 상관이 있어. 니 인생의 일 막이 지났을 뿐이야. 사람의 인생이란 게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거다. 길게 보자. 넌 아직 젊어. 제대하고 미국이나 갈 생각해. 엄마가 생각해 놓은 계획이 있었잖아. 그때 그대로 했으면 지금쯤···”

아빠는 이렇게 뒷북을 치셨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아빠도 생각이 있다. 빨리 군복무 마치고 나와라. 나와서 뭘 하든···”

‘아빠의 인생은 행복했을까? 기센 엄마와 같이··· 그런데,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아! 눈 뜨기는 싫은데 너무 춥네.’

집에 들어가지를 못해 사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했고 옷 사 입을 경황도 없었다. 군복 차림으로 정신없이···

“어? 여기가···”

정신이 확 돌아왔다. 관절이 굳어버린 듯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봄이라도 아직 쌀쌀했다. 숲에 닿아있는 강가는 더더욱···

‘아이고 웬 청승을. 엄마가 어지간히 좋아하시겠다. 몸 튼튼하고 대학도 다녔고 아직 젊은데 돈 좀 없으면 어때. 없어진 건 어쩔 수··· 하! 그래도 많으면 좋은데···’

입 안 돌아간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 걱정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담담히 변화를 받아들이고 중심 잡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나는 현실주의자 엄마의 피를 이어받은···

“으악!”

일어서려다 발을 헛짚었다. 마음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몸은 추위에 굳어 뻣뻣했다. 강가의 비탈에서 구르고 말았다.

“헉!”

강에 빠지기 직전 겨우 무엇인가를 잡고 멈출 수 있었지만, 손목이 뜨끔하다.

“아! 오른손···”

겨우 다시 일어났지만 오른 손목이 급격히 부어올랐다.

‘아! 이런 오른쪽은 안 되는데··· 응? 오른쪽이라서 특별히 곤란할 게 뭐 있어. 공 던질 것도 아니고 아직 제정신이 아니네.’

야구를 그만둔 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런다.

‘제대한 지 이틀 되었는데 이 꼴이 뭐야. 병원부터 가야겠어. 이 상태로는 뭘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고···’

겨우 몸을 가누고 일어났지만, 진흙 범벅이 된 몰골이 엉망이다.

‘도로까지 가려고 해도 이십 분은 걸어가야 하는데···’

한심하다. 이제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이래선 참 많이 어렵다. 다행히 취기는 날아간 것 같다.

‘엄마 이제 가요. 못난 모습 보여 미안해요. 다음에 올 땐 좀 나아진 모습으로 올게요.’

겨우 핸드폰 불빛을 의지해서 도로까지 나갈 수 있었다. 택시를 부르고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좋은 택시기사 아저씨를 만났다. 어머님 장지에 왔다 미끄러져 이렇게 되었다는 말에 시트가 더러워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까지 태워주었다.

말이 아닌 몰골 때문에 병원에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지만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은 대개 이런 꼴인지 검사 후 별말 없이 침대를 하나 내줘 이틀 만에 제대로 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손목은 뼈에 실금이 좀 갔는데 깁스 이삼 주 하면 돼요. 깁스 풀고 나서 물리치료 좀 하고···”

아침에 만난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데도 내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택시비 겁나 많이 나왔네.’

이제 겨우 현실 인식이 된다. 응급실을 찾느라 근처 도시까지 한참을 택시로 나왔다. 벌써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한다. 치료비부터 걱정이었다.

“어쩌다 그런 겁니까? 군인이에요?”

더러워진 군복을 벗어버리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바로 알아본다. 얼굴에서 아직 군대물이 덜 빠진 것 같다.

“이틀 전에 제대했습니다. 엄마 장지에 왔다가···”

“이런 말은 좀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지 모르겠네요. 분명히 많이 보던 얼굴인데···”

젊은 의사 선생님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군대 가기 전에 학교 다녔어요?”

“예. XX대···”

“어쩐지··· 몇 학번이에요?”

내가 다닌 학교 의대가 유명하긴 했었다. 아무래도 선배인 것 같았지만 전혀 안면이 없다. 같은 학교라지만 어디서든 운동부와 의대생이 어울리기는 어렵다.

“저기··· 제가 운동을 해서···”

“으응. 그래요?”

미간을 잠시 모으더니 차트를 다시 들여다본다.

“소영수··· 음. 야구 선수 소영수?”

“헉!”

순간 너무 놀랐다. 난 전혀 유명인이 아니다. 그 정도로 야구를 잘하지 못했다. 조금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관계자들이나 알까? 그들도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몰랐다. 일반인이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야! 내가 본과 3학년 때···”

‘아무리 선배라지만 초면에 반말이라니 이건 아니지. 하! 우리나라는 이것 때문에···’

제법 묵은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 학교가 전국 대회 3관왕을 했을 때다.

“무적의 구원투수··· 일대일 대결의 최고수··· 그때는 황야의 건맨 같았어. 지금쯤 프로에 갔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알아봐 줘서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야! 반갑다. 야구가 잘 안된 모양이지? 괜히 그런 이야기 꺼내서 미안해.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네가 포르셰···”

정말 별걸 다 안다. 어릴 때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이 이상한 장소와 시기에 돌출된다. 아무래도 내가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핫. 별걸 다 기억하시는군요. 다 한때였을 뿐이에요.”

우리 집 망해서 사정이 달라졌어요라고 해명하기도 이상하고 참 난감하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되었네요.”

이 정도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몇 마디 더 나누게 되었는데 말하다 보니 아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초면에 죄송한데요. 이왕 이렇게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후배 좀 도와주세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이제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오호! 후배님 뭘 도와드리면 되나?”

다행히 별로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지금 보시다시피 몹시 난감한 사정이 되었어요. 잠시 입을 옷 좀 빌려주시죠. 군복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당장 입을 옷이 없어요. 대충 사서 입으려고 하는데 환자복 입고 나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 말고는 없어? 제대하고 이리로 바로 왔으면 현금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을 그렇게 먹었지만 그래도 차마 무리하다 싶은 이야기에는 입이 안 떨어졌다. 결심과는 다르게 그냥 가벼운 부탁으로 말을 돌렸는데 선배는 정말 도와주려는 마음인 것 같았다.

“그게···”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택시 타고 병원에 왔는데 생각해보니 통장 잔고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당장 어디서 돈을 구하기도 애매했었는데 이런 선배를 만나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지던 인생의 커브 길에서 조금 숨 돌릴 틈을 가질 수 있었다.

선배가 빌려준 옷을 입고 선배의 보증으로 병원비는 며칠 뒤에 송금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하!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거네. 무턱대고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겠어.’

이틀 사이에 이십몇 년을 살아오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래서 현재의 처지에 맞게 찜질방으로 들어왔다.

당장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참 나도 대책 없이 살아왔었네. 정말 부모에게 딱 붙어서 기생충 같이 살아온 인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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