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팩트는 힘이 세다
레전드라 불리는 감독에게 나름 인정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입학 후 첫 훈련에 참석했다.
“저··· 제가 그렇게 옆구리 투수에 특화된 재질을 가졌나요?”
입학 전 얼굴 정도는 익혔다고 왠지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잠재력을 인정해준 감독에게 잘하고 싶었다. 첫날부터 투구폼 수정을 위해 투수 코치를 젖혀두고 따로 시간을 내주는 성의를 보인 감독이었다.
“그거? 난들 알겠냐? 어떤 게 그런 재질인지 나도 몰라.”
그는 시큰둥했다.
“예? 그게 무슨··· 유연성이 좋고 그래서 절 뽑으신 거라면서요.”
“아! 그 얘기? 고만고만하게 남은 애들 중에는 그나마 낫다는 거였지. 너도 생각을 좀 해 봐라. 그런 애들하고 비교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니. 비교를 하려면 드래프트 뽑힌 투수 애들하고 해야지. 그중에 너만큼 유연성 없는 애가 있냐? 있다고 해도 너랑 큰 차이는 없지.”
이 아저씨가 이제는 잡힌 물고기라고 막말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럼 투구폼 바꾸라는 거는···”
“그거야 내가 제일 잘 아는 분야니까 그렇지. 니가 원래 폼으로 잘하고 있거나 혹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특징이라도 있다면 내가 그런 이야기 했겠냐? 뭐!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옆구리 투수는 대개 그런 경로로 시작하는 거니까.”
억울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긴 하겠네요. 누구든 처음부터 언더로 시작하지는 않았겠네요. 감독님께서 그런 경로를 밟아오셨으니 너무 잘 아시겠죠.”
자존심 상한다고 반발하기엔 지금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한 것 같았다. 레전드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첫걸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내가? 난 이렇게 던지는 게 편하더라고 처음부터 언더로 시작했어. 좀 드문 경우긴 해도 보통 이런 경로의 선수들이 대성하지. 내 키를 봐라. 너하고는 좀 다르지 않니? 내가 아마 오버로 던졌어도 못하진 않았을 거야.”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럼 저는···”
“넌 친구에 업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학교 발전 기금 내고 들어온 애야. 아주 열심히 해야지. 내가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다. 덤터기를 씌웠으면 그 값은 해줘야지. 기브 앤 테이크. 이게 세상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법칙이거든. 그래서 너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는 거야.”
정말 어이없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로 사람을···”
쉰 것 같은 목소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너무 열을 받으면 오히려 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거짓말이라니··· 그런 걸 융통성이라고 하는 거란다. 내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설렁설렁 넘어가면 너도 손해 나도 손해야. 그때는 그 말이 맞았고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으니 답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니?”
감독은 실실 웃어대고 더듬거리며 대꾸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화를 낼 기운도 사라지고 허탈할 뿐이었다.
“하! 솔직하게 말씀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런데 손해는 저만 본 것 같은데 감독님이 무슨 손해가 있어요?”
겨우 말꼬투리를 잡아 봤지만···
“야! 니가 무슨 손해야. 야구 안 하면 니 인생이 거기서 끝이니? 우리 학교가 야구는 별로지만 나름 명문교잖아. 여기 들어오려고 기를 쓰고 공부하는 애들이 수십 수백 트럭 분은 될 거다. 넌 야구를 그만둬도 다른 기회를 얻은 거야. 거기에 비하면 발전기금은 푼돈이지.”
감독은 주종목이 야구가 아닌 것 같았다. 철벽 블로킹에 속절없이 포인트를 내주고 말았다.
“너희 어머니쯤 되면 다 계획이 있으실 거야. 넌 열심히 해보다 안 되면 그 길 따라가면 되고 나는 내 시간을 버리게 되는 거지. 니가 아니었으면 이 시간이 훨씬 가능성 있는 다른 애한테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순간 구걸해서 이 학교에 들어온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넌 기회를 얻은 거야. 부모의 힘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입 닥치고 열심히 하다가 안 되면 일찍 그만둬. 그게 여러 사람 돕는 거다.”
“하하···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말이네요.”
연타 당해 그로기가 되었다.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허깨비였다. 멍하니 뭐가 뭔지 판단도 안 되는 상태에서 감독의 말에 따라 자세를 바꿔가며 공을 몇십 개 던졌다,
‘빌어먹을 레전드가 직접 봐주는데 난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거야?’
감독님은 언더스로우로 KBO 리그의 한 시절을 장식한 레전드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개인 지도를 받으면 언더 투수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의 위치를 옆에서 멈추게 했다. 그렇게 난 사이드 암 투수가 되었다.
자괴감 오지게 드는 오후였다.
“칼 메이스. CK, 와타나베 슌스케, 마키타 가즈히사 이 이름의 공통점을 알겠나?”
투구가 끝나고 감독이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요? 저 CK만 알겠는데요.”
메이저 리그 마무리 투수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한국인이다. 선발로는 별로였다. 그 정도는 안다.
“모를 수도 있지. 이 이름 적어놨다가 너튜브라도 좀 찾아봐라.”
“예.”
“다 너만 한 키로 각 리그를 호령했던 최고 투수들이다. 그리고 다 옆구리 투수들이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했다.
“저기에 한국 리그는 없지 않나요?”
“내가 있잖아. 넌 복 받은 거다. 지금 네 처지에 딱 맞는 나 같은 감독을 천운으로 만난 거야. 다 조상님 음덕이다. 감사하고 살아라.”
하느님, 부처님. 감독님, 부모님, 의사 선생님, 선녀 보살에 이어서 이젠 조상님까지 의논 상대로 모셔야 할 것 같았다.
‘간단한 원 포인트 레슨으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투구폼 변화였지만 효과가 있었지. 처음엔 그냥 긴가민가했었지만, 공이 실제로 훨씬 나아지긴 했었어,’
사이드 암. 오버스로우와 언더스로우의 중간 형태이다. 분류에 따라서는 이것을 언더스로우 카테고리에 넣기도 한다.
팔을 좀 더 내려 보려고 했지만, 허리가 걸렸다. 나의 애교뱃살이 부드러운 움직임의 방해요소로 작용했다.
‘살을 빼야 하나? 일부러 늘였는데···’
감독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살 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네. 계속 연습해서 힘을 붙이면 되겠어.”
그 뒤로도 가끔 투구를 봐주었지만 별다른 지시 없이 처음 그대로 하기만을 원했다. 좀 높은 사이드 암이 점점 정착되어 갔다.
‘쓰리쿼터를 옆으로 던지는 느낌으로 던졌지. 이 정도밖에 설명이 안 되네. 이건 감의 영역이라서···’
대학 신입생의 봄은 오는 줄 모르게 지나고 시간은 땀의 무게로 덮여갔다. 그리고 새로운 봄을 맞았다.
퍽-
“조타 조와. 하나 더···”
포수의 외침에 공감한다. 내가 봐도 괜찮다. 마지막에 공 끝이 살짝살짝 휘었다. 포심 그립으로 자연스럽게 던지는데 마치 투심처럼 공이 움직인다. 구속이 130대 후반은 될 것 같았다.
‘흐흐흑, 이게 진정 내 공이란 말인가!’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감격스럽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감동이 벅차오른다.
그게 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비룡이 쌍칼 쓰는 마음과 똑같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신공절학을 완성하면 묘사하는 그런 기분이 있잖아! 그거야 그거.’
“어이구야. 동계 훈련 마치고도 안 쉬었나 보네. 거봐라. 이 악물고 하니까 되잖아. 진작 좀 이렇게 하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잘했다고 칭찬하는 건지 애매한 말이 날아왔다.
‘나라고 못 하고 싶었겠어요?’
목소리를 밖으로 흘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이 아저씨와는 되도록 말을 안 섞기로 결심했었다.
“아!”
어이없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자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슬라이더 던지려고 했었냐? 실전에서 변화구는 아직 쓰면 안 되겠네.”
“저··· 평소에는 이것보다는 낫게··· 실전이요?”
선배들에게 감독이 실력지상주의 성향이라서 자기감정과 별개로 잘하면 시합에 내보낸다는 말은 듣고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훈련만 할래? 훈련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실전만큼 성장에 좋은 건 없지. 다음 대회부터는 계투진에 넣어주마.”
정말 공정한 성품의 인격자다. 자극을 주기 위해 가끔 던지는 막말쯤이야 제자 된 도리로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제구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 무브먼트 같으면 한가운데 들어가도 곧바로 정타를 쳐내기는 어려워. 가운데 보고 세게 던져. 어차피 그렇게 던져도 열 개 중에 아홉 개는 가운데로 안 가잖아.”
절묘한 표현력이었다.
‘칭찬 같기도 하고 욕 같기도 한··· 아이고, 내가 어떻게 이런 무례한 생각을··· 무조건 맞습니다. 저는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감독과 부딪쳐봐야 나만 손해다.
감독의 말대로 봄철 금호기 대회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내 보직은 원 포인트 릴리프였다.
“넌 대부분 한 타자만 상대할 거다. 뒤가 없어. 어설픈 변화구 던지지 마. 가운데 보고 제일 세게 던져. 난 네가 안타 아니, 홈런을 맞아도 뭐라고 안 해. 그런데 볼 넷 주면 앞으로 일 년간 경기 안 내보낼 거야. 알겠어?”
“옙.”
7회 투 아웃에 만루다. 우리가 4대 2로 이기고 있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고3 가을 이후 일 년 반 만의 실전이었다.
“영수야. 자신 있게 하자. 니 공 좋다. 처음 보는 타자가 단번에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야. 기합 한 번 넣어.”
포수인 경철이 형이 격려를 해 줬다.
“아자자!”
“푸하하하. 뭐 하는 거야?”
소리 지르는 게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던지 호응은 얼마 있지도 않은 관중의 헛웃음으로 나왔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에구, 연습구나 던져야겠네.’
와인드업을 하는데 심판의 치솟은 입꼬리가 보인다.
‘하!’
근엄한 얼굴의 심판마저 마스크를 쓰고 나서는 웃고 있다. 기분이 팍 가라앉았다. 와인드업을 풀고 셋 포지션으로 가볍게 몇 구를 던졌다.
타자가 타석에 섰다. 그 자식도 눈이 웃고 있었다.
‘이런···’
저절로 이빨이 악물어졌지만, 근육의 경직되면 투구폼이 딱딱해진다. 투구폼의 이상은 공의 위력을 저하시킨다. 몸에 힘을 풀고 투구폼에 신경 쓰면서 일구를 던졌다.
탁-
‘새끼, 성질 더럽게 급하네.’
조금 막힌듯한 소리가 났지만, 타자의 팔로우 스로우가 멈추지 않았다. 정타로 맞지는 않았지만, 타자의 배트가 끝까지 돌아갔다.
‘이런 찬스에 타자가 신중해야지. 새대가리냐? 생각이란 걸 좀···’
투덜거려 봐야 소용없다. 타구가 떴다. 이제부터는 야수의 몫이다. 2루수 방면으로 애매하게 공이 날아갔다.
‘저거 2루수 넘기는 것 아냐?’
타구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고 꾸준히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