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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화 (2/200)

2화. 무리하다

상징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140이 빠른 구속이긴 하다. 그렇지만 평속도 아니고 최고 구속이 그 정도인 투수는 고교리그에 넘쳐난다. 오히려 그 정도가 안되는 투수가 드물었다.

‘그 정도가 안되면 대개 다 타자로 전향하지.’

그리고 그 정도 구속이 안 되는데 투수를 하고 있는 선수들은 나름 장점이 있다. 변화구가 특별하다든가 제구가 아주 좋다든지 하는···

‘내가 아주 애매했어. 아니, 그건 내 생각만 그랬던 거고 다들 가망 없다고 했었지.’

내게도 타자 전향에 대한 말이 있었지만 치는 건 정말 자신 없었다. 그래도 던지는 건 어떻게 하다 보면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람은 자신 있는 걸 해야 한다. 한 번도 야수로 전향한다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 함 해보자. 운동으로 여까지 왔으믄 대학은 가야 안 되겠나? 그 정도만 되믄 난 만족한다.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그래이. 그라고 내가 살아보니까 세상 살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더라. 엄마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끼다. 니도 후회 남지 않게 단디 해라.”

고교 마지막 해 봄 현실주의자 엄마의 선고가 떨어졌다. 내 생각에도 상황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데 익숙해 있던 난 빠른 구속이 없으면 평범 이하의 투수였다,

변화구를 잘 던지는 특별한 감각 같은 건 없었고 제구 역시 별 볼 일 없었다. 그래서 겨울 방학 때 무리를 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원래 내 투구폼은 쓰리쿼터에 가까운 좀 밋밋하게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야구 시작할 때 편안하게 던져보라고 해서 던진 폼이었는데 그게 그대로 굳어졌었다.

무리 없는 동작에 빠른 구속. 이상적이었다. 어느 코치, 감독이든 이걸 고쳐보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건 개인 코치도 마찬가지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방학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일명 인버티드-W라고 부르는 오버스로우 형태로 폼을 바꾸었다.

“왜 바꾸려고 해? 투구폼 괜찮은데··· 억지스러운 동작이 없잖아. 이런 게 롱런할 수 좋은···”

“다 그렇게 이야기했었어요. 몸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속 증가가 이루어질 거라고. 저 내년이 고3인데요. 내년에 별 성과 없으면 동네 야구밖에 못 할 텐데··· 몸을 아껴서 뭐 하겠어요. 뭐라도 해봐야죠. 인버티드-W면 확실히 구속 증가가 된다면서요.”

인버티드-W. 투구 시 양 팔꿈치 높이가 어깨높이보다 위에 있어서 옆에서 보면 W자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지 말고 제구를 잡아보자. 좋은 제구력이 있으면 굳이 빠른 볼이 없어도··· 구속은 재능이지만 제구는 노력으로···”

코치는 좋은 말로 날 달래려 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난 2년간 했어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잖아요. 당장 보일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건 코치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 부탁합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 폼이 몸의 특정 부위에 인위적으로 부하를 심하게 주는 동작이어서 부상 위험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봤었다. 몸이 망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던질 수 있어야 그렇게 된다. 몸이 몹시 건강해도 던질 기회조차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드래프트에 뽑혀서 프로가 된다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대학이라도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은 갖추고 싶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경기에 나가기는 해야 한다. 야구 명문교의 선수층은 두껍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레이 백(Lay Back, 투구 시 팔이 뒤로 눕는 모양. 외전이라고도 한다.)을 최대한 늦춰. 전완의 외전은 최대한 이루어져야지. 그래 거기서 조금 더 끌어 봐.”

그렇게 하면 손의 움직이는 선이 직선 형태가 되고 전체적인 팔의 스윙 거리가 짧아지면서 공을 챌 때 집중되는 힘이 늘어난다. 이로 인해 구속 증가가 나타난다고 알고 있었다.

이게 부자연스러운 거다. 팔을 꼬고 억지로 전체적인 형태를 유지하려 애를 쓰면서 힘을 모은다. 그리고 모아진 힘으로 공을 뿌린다.

코치는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도와주었다.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현실에서 내 말이 맞다는 건 그가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을 테니까.

구속의 증감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근력이다. 속도는 기본적으로 근력에 의해 결정된다. 근력의 증가가 공의 스피드를 향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속근과 지근 다 중요하지만 주로 속근을 키울 때 구속은 늘어난다.

둘째는 신체조건에 맞는 적당한 투구 동작을 익혀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투구란 기본적으로 몸에 부하를 주는 행위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좋은 투구 동작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투구역학 어쩌고 하는 게 다 몸에 걸리는 부하를 최대한 분산해서 오래 사용해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방법인 거지. 그렇지만 난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인버티드-W가 아니라 다음 해에 팔이 부서진다고 해도 그때는 해야만 했었지.’

다행히 내 어깨와 팔꿈치는 일 년을 버텨주었다.

셋째는 유연성이다. 투구란 신체의 회전력을 직선적인 공의 움직임에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다. 주로 고관절(엉덩이), 몸통(흉추), 어깨 관절을 이용해 회전력을 얻는다. 세 부분의 회전하는 범위가 넓을수록 힘이 커진다. 당연히 유연하면 좋다.

넷째가 체중이다. 키는 어쩔 수 없지만, 체중은 인위적으로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체중을 증가시키면 몸이 둔해진다. 이건 앞에서 말한 투구 동작과 유연성에 저해요소가 된다. 그래서 점진적으로 연간 몇 kg씩 지방이 아닌 근육으로 체중을 늘려 밸런스를 잡아야 한다.

‘내가 좀 튼실해 보여도 이게 다 겉만 지방이고 안은 속근 덩어리라고···’

대충 이 정도의 노력은 했다,

고등학교 3학년. 평속 135~7km 최고 구속 141km의 제구가 별로인 밋밋한 패스트볼. 이것저것 던질 수는 있지만 제대로 승부처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변화구는 없었다.

프로는 고사하고 대학에서 선택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만 우리 팀이 강호 소리를 듣고 있어서 출전만 좀 해서 어느 정도 성적만 나오면 어떤 형태로든 진학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해냈다. 중간 계투로 나서 큰 활약은 못했지만 큰 흠을 잡히지 않을 정도는 해냈다.

‘뭐 주로 하위 타선만 상대하고 타선이 한 바퀴 돌기 전 내려오긴 했지만··· 기록적으로는 크게 흠잡을 데 없는··· 흠. 엄마가 당부하신 대로 융통성을 좀 부린 거지.’

그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을 것 같지만,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나의 할 일을 하고 엄마는 엄마의 일을 해서 최대 목표였던 대학 진학을 이루어냈다. 단체종목 만세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영수야! 수고 마이 했다. 인자 선수는 올해만 하고 접자. 당장 그만두기는 쫌 그렇고 적당히 맞춰주고 영어공부나 열심히 하그래이. 그 학교는 1년만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믄 된다.”

엄마는 다 계획이 있었다.

“뭐라고? 싫어. 나 계속 야구 할 건데···”

“야구 해라. 하라고··· 내가 니 야구 하지 말라카는 거 아이다.”

“그만두고 미국 가라며? 내가 거기 가서 야구를 어떻게 해? 하다못해 마이너라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됐으면 드래프트에··· 휴우!”

말하다 보니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한 것 같아서 말이 저절로 멈춰졌다.

“선수는 그만하자 이 말이다. 니도 인자 성인 아이가. 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니 이대로 야구 해 가꼬 드래프트에서 맨 꼬리비라도 선택받을 수 있겠나? 안 되는 걸 와 할라까노?”

“그거야 모르지. 아직 스무 살이니까 또 알겠어? 열심히 하다 보면 포텐이···”

“포텐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오만 데를 다 알아봤는데··· 니가 야구 잘 할라카믄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카더라.”

귀가 번쩍 트였다.

“뭐 그런 게 있었어? 진작 좀 이야기해 주지. 엄마. 혹시 돈이 엄청 많이 들어서 못하는 거야?”

“어이구! 이 화상아··· 엄마도 낼모레 환갑이다. 내가 니 앞가림을 언제까지 해 줄 수 있겠노. 인자 좀 꿈에서 깨라. 돈 들여서 할 수 있으믄 진작 안 했겠나.”

“방법이 있다며···”

“약 마이 쳐드시면 가능성이 쪼매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누가 그라더라. 약 말이다. 니가 뭐 아쉽다꼬 그런 약까지 처무 가면서 그깟 공놀이를 해야겠노?”

“아!”

실망감이 닥쳐온다.

“그게 그런 이야기였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엄마가 오죽 답답했으믄 그런 거까지 알아봤겠노. 암튼 이대로라믄 니가 프로가 된다 카는 가능성은 없다. 적어도 엄마가 보기엔 그렇타. 니가 대학 야구선수로 끝나믄 코치 자리 하나 얻을 수 있겠나? 그기 현실이다. 그래서···”

학부 1년을 마치고 미국대학에 편입해 거기서 스포츠 관련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한다는 계획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야구는 선수 말고 그 사회인 야구 그런 거 하믄 안 되겠나? 정 아쉬우면 공부 마치고 야구 관련 분야에서 일해도 되고, 꼭 선수로만 야구 하란 법이 있는 것도 아이고. 니 생각은 어떴노?”

내 장래를 생각하면 엄마 말이 백번 맞는 것 같았다. 야구를 지지리 못하는 아들 때문에 엄마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몹시 괴로웠었다. 문제는 머리로는 동의가 되는데 가슴이 야구 선수를 원했다. 동네 야구 말고 진짜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이제 어쩌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었다.

“그게··· 이번에 투구폼 수정에 들어가기로 했어. 좀 길게 잡고 완전히 뜯어고치기로 했어. 우리 감독님이 프로에서 날리던 투수였잖아. 내가 몸에 비해서 유연성이 좋고 그래서 들러리지만 날 선택한 거래. 투구폼···”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던 엄마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셨다.

“영수야, 니 그 말을 믿나? 니가 그 학교를··· 하! 말을 말자. 그래서 니는 우째하고 싶다는 긴데?”

“일 년 정도 투구폼 완전히 뜯어고치고 일이 년 더 해보면 안 돼? 그러면 그만두더라도 후회 없이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안 되면 엄마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자식 이기는 부모는 극히 드물다.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함 해봐라. 우짜겠노. 하나뿐인 아드님이 하고 싶다는데··· 대학 때까지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미련 없이 접자. 그라고 미국 가야 한데이.”

“알았어. 엄마. 열심히 할게.”

그때 접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엄마 말 들어 손해 날 일 없다는 걸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사연 많았던 고3이 지나고 대학 야구 선수가 되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지원을 받아가며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이 4년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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