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이변은 없었다
최기병은 대검찰청 조사실에서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계속 심문을 받는 중이었다.
“이홍종 씨와 진종설 차장 검사, 누가 죽였습니까? 이름만 대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합니다.”
“…….”
“민도연 씨와 신여은 씨도 다 불 겁니다.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람이 풀려날 거고요.”
“…….”
“둘 다 강찬웅이 죽였죠? 아니면 지시를 내렸거나.”
“…씨발!”
“뭐?”
이건 못 참겠다.
호랑이가 이빨이 빠졌다고 판단했는지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변호사도 부르지 않고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검사님.”
“네, 듣고 있습니다.”
“검사 그만두면 하실 일이라도 있나요?”
“…무슨 말입니까?”
“미리 알아보셔야 할 겁니다. 아마 변호사 개업도 못 할 수도.”
굳어지는 담당 검사의 표정.
“어이, 최 팀장! 진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거야?”
“그거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고, 하던 대로 하라고, 씨발 놈아! 조작하든, 만들어 뒤집어씌우든. 니들이 가장 잘하는 거잖아.”
“이 새끼가…….”
최기병의 믿는 구석이 뭔지는 금방 밝혀졌다.
다다다다다닥!
조사실 복도에서 들리는 구둣발 소리.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검 부장 검사가 황급하게 들어와 말했다.
“최, 최 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 잘못된 정보 때문에 우, 우리가 실수로… 지금 가셔도 됩니다.”
담당 검사의 표정은 의아했다.
확실하게 족치랄 때는 언제고? 풀어 주라니.
“네? 부장님, 갑자기… 그건 안 되죠!”
“닥쳐! 어디서 말대꾸야? 빨리 수갑 풀고 보내 드려.”
“아아,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기병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 안 나갈 건데요.”
“이, 이유가 뭔지…….”
“그러니까요. 저도 왜 제가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사 계속하세요.”
“…저, 그, 그게.”
“아니면 스마트폰이라도 돌려주시든지.”
그러자 자신의 부하를 닦달하는 부장 검사.
“어서 가지고 와!”
최기병은 스마트폰을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금방 알았다.
케이라는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를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잡았구나.’
드디어!
* * *
본디 마정석의 마나는 담겨 있는 양도 적을뿐더러 불순물도 많아 온전히 흡수하기 어렵다.
연금술로 정제한다거나, 마정석 흡수 마법진을 그리면 나아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면?
불순물이고 나발이고, 설령 새어 나가는 마나가 얼마든, 아무런 상관 없을 정도로 많다면?
지금 이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마정석의 산이 그렇다.
몇 개인지 어림짐작도 되지 않았다.
두루룩! 두루룩!
지금도 메르카베인에게 빨려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마나.
덕분에 마나의 갈증을 일정 부분 해소했다.
이 무지막지한 마나를 바탕으로 제일 먼저 시도한 건 육체 강화. 드래곤의 영혼을 담기에 인간의 몸은 너무나 나약하다.
완전무결한 드래고니안으로의 진화.
지구 과학무기를 막아 낼 드래곤의 피부와 비늘, 몸의 균형을 잡아 줄 꼬리, 본체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용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구에선 자신을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뭐지?
카캉!
난데없이 날아온 도끼.
자신의 비늘 하나를 너무나 쉽게 쪼개 버렸다.
메르카베인은 분노했다.
어디서 조막만 한 인간이 튀어나와 도끼질을… 가만!
“넌?”
케이다.
케이가 분명하다.
놈은 힘을 잃지 않았다.
츠피릿!
찬웅은 숨 쉴 틈도 없이 놈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미끼를 물었으니까…….’
나머지 미끼는 거둬들인다.
지금도 한 번에 수천 개씩의 마정석이 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체 양에 비하면 먼지만큼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아깝다.
‘잡은 물고기에 더 이상 먹이를 줄 필요가 없지.’
스스슷!
차원 창고가 열렸다.
‘수납!’
수납 대상은 현장에 쌓인 모든 마정석.
그러자.
뭉텅, 뭉텅, 뭉텅…….
커다란 덩어리 단위로 사라지는 마정석.
“이놈!”
마정석이 사라지자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메르카베인.
놈의 꼬리가 채찍처럼 안면을 향해 휘둘러졌다.
츠피릿!
찬웅은 도끼를 들고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서걱!
두툼한 꼬리에 박혀 드는 도끼.
“큭!”
메르카베인은 깜짝 놀랐다.
꼬리에 상처가 나?
드래고니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마스터밖에 없는데.
팟팟팟팟!
찬웅은 뒤로 물러나는 놈 가까이 바짝 붙었다.
츠핏! 츠피릿!
서걱, 콱, 카캉!
확실히 만만하진 않았다.
찬웅은 예전의 힘을 거의 회복한 상태, 그래서 못 자르는 것이 없다는 도끼의 강기도 유효했다.
그런데 꼬리 하나 자르지 못했다니.
‘마정석 다 처먹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뭉텅, 뭉텅, 뭉텅.
그 와중에도 차원 창고에 수납되는 마정석.
아공간 아이템이나 인벤토리에 담으려고 했다면 온종일 담아도 티도 안 나겠지만 차원 창고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산처럼 쌓여 있던 마정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 안 돼!”
메르카베인은 절망적인 기분.
마정석을 흡수하긴 했지만 이 정도론 턱도 없다.
놈의 도끼를 어떻게 막아?
‘도, 도망쳐야…….’
그런데 어디로?
팟팟팟팟!
지금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이 거머리를 어떻게 따돌리라고?
“자, 잠깐…….”
우웅!
찬웅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가 점점 커진다.
천천히, 차곡차곡 쌓이는 강기.
놈의 몸을 자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너무 많이 주입하면 마나가 마를 수 있으니까 적당하게.
급기야.
썩둑!
잘리는 꼬리.
꼬리가 잘리자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는 몸.
“끄아아아아아아!”
메르카베인은 울부짖었다.
드래곤으로 태어나 이렇게 처절한 비명을 질렀던 적이 있었나?
찬웅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끼를 물었다.
뜰채에도 담았다.
그러나 비늘을 벗기고 배를 갈라 횟감 손질이 끝날 때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츠핏!
쿠욱!
도끼가 놈의 발등에 박혔다.
위로 올라가 무릎을 찍고.
콰직!
순간적으로 눈높이가 낮아지는 틈을 타서 양쪽 어깨를.
콱! 콱!
그리고 대가리.
콰직! 콱콱! 콰직!
찬웅은 장작 패듯 놈의 전신을 찍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어느새 놈의 입은 닫혔다.
말이 필요하나?
대화는 도끼만으로 충분하다.
난자당하는 메르카베인의 몸.
이제 끝났다.
마무리 단계.
우우우우우웅!
도끼의 강기가 더더욱 진해졌다.
왼손의 도끼를 놈의 어깨를 찍은 채 고정시키고.
오른손의 도끼를 머리 뒤로 젖혀 백스윙.
그리고 떨어뜨렸다.
츠피리리리릿!
콰지지지지직!
도끼날이 머리를 갈랐다.
그것도 모자라 목을 세로로 자르고 가슴까지 내려갔다.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실버 드래곤 메르카베인.
그때였다.
“응?”
스멀스멀.
도끼를 타고 올라오는 심상찮은 기운.
‘이건?’
찬웅은 직감했다.
침식의 근원, 씨앗.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냈구나.’
우우우웅!
찬웅은 모든 마나를 도끼에 쏟아부었다.
순간!
텔레파시처럼 의식으로 전달되는 말.
소리로 들리진 않았지만 의미는 충분하게 전달됐다.
씨앗이 자신에게 던지는 메시지.
[합일] [화합] [협동] [대가] [힘] [권능] [지배] [정복] [창조] [행복]…….
‘이 새끼가…….’
[잘생긴 외모] [성욕 충족] [넘치는 정력] [권력자들의 복종] [인간들의 숭배]…….
놈은 자신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함께하자고.
그럼 원하는 건 다 이뤄 주겠다고.
그런데 솔깃하다.
진짜 다 줘?
케이의 몸에서 회색빛 불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 * *
투타타타타타!
방송국 헬기는 여전히 현장에 떠 있었다.
파충류 모양의 괴물과 케이가 맞서 싸우는 모습.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상황.
미국 백악관.
조셉 바이든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판단 착오였군.’
최기병의 체포, 마정석 유통권 약탈, APS 해체, 심지어 케이의 명예가 폄하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후회할 거라는 마이클 피트의 설득에도 그저 관망만 했다.
각성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힘을 잃었는데, 케이라고 다를까?
‘멍청한 생각이었어.’
애초부터 그는 다른 플레이어와 달랐는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반성하면 받아 줄까?”
조셉 라이든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하는 마이클 피트.
“글쎄요, 신뢰가 깨진 이상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자넨 케이와 최기병 팀장하고 친하잖아? 한국인들은 정에 약하니 호소해 보는 것도…….”
“회복이야 되겠죠. 그러나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겁니다.”
“그렇군. 후우, 어쩔 수 없어. 늦었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야지.”
그 시각.
일본 내각 수상 관저.
아오키 토시로 일본 총리는 절망했다.
‘신이 일본을 도우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모든 계획은 물거품.
‘그냥 케이가 괴물에게 죽었으면 좋겠군.’
세상의 파멸이 두렵지 않냐고?
아니! 그것이 오히려 케이가 돌아온 것보다 훨씬 낫다.
‘이변이라도 생기면 좋으련만.’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케이가 돌아온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언론의 논조도 180도 돌변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APS와 케이를 성토했던 기사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마 모조리 삭제했을 터.
<영웅의 재림,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다.>
<케이 파이팅! 누가 케이가 끝났다고 했나? 이제는 태평성대.>
<외람되오나 질문을 드리자면,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국민들 안도.>
<검찰총장 임세열, 스스로 총장직을 물러나겠다고 밝혀.>
<케이의 친구였다는 박 모 씨, 자신이 했던 말은 모두 검찰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며 진심이 아니라고 항변.>
진짜 기가 차는 일이었다.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화정 그룹 정규광.
“하하하! 왔구나, 왔어!”
APS가 몰락하고 케이의 행방이 묘연한 와중에도 그는 배신하지 않았다.
검찰에 소환당하는 전 각성 플레이어들을 위해 변호사도 구해 주고, 그들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언론을 움직여 반대 여론도 만들었다.
그 때문에 기습 세무조사도 당했고.
“봐라, 지은아! 내 생각이 맞았지.”
“…저, 정말 어떻게 아셨어요?”
“난 케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남다르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아바타만 봤을 뿐인데도.”
정지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그럴 수가 있나?
보기만 해도 사람의 가치를 알아본다니.
‘운이 좋았겠지.’
다시 TV로 고개를 돌리는 정지은.
케이와 괴물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했다.
상황이 이상해졌다.
괴물의 머리에 도끼를 박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케이.
게다가.
츠치치칫!
그의 온몸이 회색빛 아지랑이로 휩싸인 상태.
“왜 저러고 있는 거죠? 완전하게 죽이지 못하는 걸까요?”
“쯧쯧, 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어차피 케이가 또 케이 할 거야. 넌 믿음이 부족해.”
“이럴 거면 케이를 위한 종교 단체를 만드시는 게…….”
“뭐, 못 할 것도 없지.”
한편.
게리 스탁턴과 엘리도 TV를 시청하는 중.
“케이가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저 회색 아지랑이는… 설마?”
“케이의 의식이 침식의 씨앗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어.”
“…에?”
침식에 잠식이라니.
“그,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마. 케이는 침식당하지 않을 거야.”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케이는 왜 그렇게 특별한 거죠?”
“특별하게 태어났으니까.”
“네?”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 가는 게리 스탁턴.
“침식은 세상 안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야. 수억 년 전 이곳 지구에서도 침식은 발생했었어.”
“그건 저도 알아요. 여기가 우리 고향이었죠. 그래도 침식은 사라졌잖아요.”
“흔적은 남았지.”
“흔적?”
“그래, 그 흔적 덕택에 침식 이후 지구 생명체들은 침식에 대한 내성을 획득했어. 물론 완전하지 않지만 세상 안 영혼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엘리도 안다.
그래서 지구인의 영혼을 캡슐과 연결해 세상 안으로 끌어들인 거고.
“그중에서도 케이의 영혼에 각인된 침식 저항의 DNA는 독보적이었어. 시스템은 그가 세상에 접속하자마자 알았지. 너무나 저항력이 강해 접속이 잘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아아… 세상 안에 존재하는 침식만으로 저항력이 발동했다는 말씀이네요.”
“아마 처음 접속했을 때 무척 고통스러웠을걸?”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고통 때문에 그가 접속을 포기하고 계정을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튼 그건 지난 일.
순간!
TV 화면에 케이의 움직임이 잡혔다.
* * *
씨앗의 속삭임.
내용이 뭐든 그 자체가 강렬했다.
본질이 기생체라 그런지 숙주를 유혹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권능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끝없는 쾌락] [명철한 두뇌] [전지전능한 파워] [마르지 않는 체력] [세상 안과 밖의 주인]…….
찬웅은 피식 웃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한국 지배] [동아시아의 군주] [중국 분열] [일본 침몰] [지구 정복] [태양계 정복] [은하계 정복] [우주 정복]…….
필사적으로 호소해 오는 씨앗의 유혹.
아마 보통의 생명체였다면 무조건 넘어갔을 것이다.
찬웅이 가만히 있자 침식의 씨앗이 죽은 메르카베인의 영혼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도끼를 타고 올라오는 진한 회색의 기운.
‘이거네.’
요놈이 바로 침식의 씨앗.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일단 찬웅은 자신의 메시지를 영혼에 담았다.
<세균 덩어리> <바이러스> <기생충> <소독> <파괴> <소멸> <박멸> <청소> <죽음> <삭제>…….
멈칫!
찬웅의 의지를 알아들은 침식의 씨앗은 이동을 멈췄다.
동시에.
화아아악!
찬웅의 전신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우우우우웅!
자신의 의지를 담은 도끼도.
화르륵! 화라라라라락!
타오르는 백열의 불꽃.
[고통] [참회] [용서] [자비] [구걸]…….
고통에 빠진 씨앗이 참회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걸했다.
그러나 찬웅은 멈추지 않았다.
찌이잉!
화르륵!
백열의 불꽃 남자 강찬웅, 함께 타오르는 도끼.
피직!
침식의 씨앗에 균열이 생겼다.
파슷, 푸스스스스스스…….
씨앗이 지르는 비명이 느껴졌다.
자신에 대한 저주도.
<앵앵거리지 말고> <이제 뒈져!>
파삭!
그리고.
찬란한 광채가 현장을 뒤덮었다.
TV 화면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눈부신 빛.
‘끝났구나.’
찬웅은 느낄 수 있었다.
소멸.
세상의 안과 밖을 위협했던 침식의 근원은 깔끔하게 청소됐다.
“으음…….”
이제 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