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돌아온 영혼들
듀플렉스 대륙.
정화된 옛 마법 왕국 상공.
브랜달은 테라퓨타 마탑 최상층부에서 깨어났다.
‘…돌아왔구나.’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브랜달.
‘변한 건 없나?’
그런 것 같다.
심장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9개의 고리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순간!
[마법사 브랜달의 마탑 보조 관리자 권한 해지.]
마탑의 에고 관리 체계로부터 들리는 메시지.
“음?”
권한 해지.
아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업자득, 지은 죄가 있는데.
하지만 그때!
[마법사 브랜달에게 테라퓨타 마탑의 전체 제어 권한 부여.]
“아!”
[마탑의 유일한 관리자를 마법사 브랜달로 지정.]
“…….”
브랜달은 얼떨떨한 심정.
마탑 관리 권한이 온전하게 넘어왔다.
이게 플레이어들이 받는 보상 같은 건가?
‘아무튼 잘됐네.’
역시 케이 형님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것이 신의 한 수.
‘그럼…….’
우우웅!
공중도시가 움직였다.
발밑에 보이는 건 폐허가 된 옛 마법 도시의 수도.
커다란 구덩이가 보인다.
침식이 대륙을 덮칠 당시 전설의 대마법사 브랜데인이 어쓰퀘이크 마법으로 지반을 갈라 버리고 마탑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을 때 남은 흔적.
‘착륙.’
공중도시가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았다.
브랜달의 조종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면서.
쿠쿠쿠쿠쿠쿠… 쿠쿵! 쿠우웅!
안성맞춤.
레고를 끼워 넣은 것처럼 테라퓨타가 구덩이로 쏙 들어간다.
마법 왕국에 마탑이 돌아왔다.
5백 년 만이었다.
다음 목표는 왕국의 재건.
그라운드 테라에서 기다리고 있을 마법사들을 불러와야지.
브랜달은 플라이를 시전해 하늘을 날았다.
* * *
로그드라실 중앙 세계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번데기 고치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으으윽!”
마치 곤충이 부화하듯 고치에서 나온 엘프 하나가 밑으로 떨어졌다.
털썩!
“아오, 뼈마디가 쑤시네.”
에루인의 영혼도 세상 안으로.
“와! 얼마 만이야?”
역시 집이 제일 좋다.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
그리고 따사롭게 내려오는 세계수의 가호.
비록 바깥에 두고 온 각종 명품 신상들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에루인은 손바닥을 세계수 줄기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돌아왔군요, 에루인.]
“네, 이제야 왔어요.”
[그동안의 노고에 주신(主神)을 대신해 감사드려요.]
“헤헤, 뭘 그런 걸 가지고.”
[덕분에 앞으로 엘프 종족은 번성할 거예요. 주신의 축복이 엘프들에게 내렸습니다. 로그드라실의 영역은 더 넓어지고, 새로운 엘프 아이들이 탄생할 겁니다.]
에루인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허상이든 실제든 뭐가 중요할까?
영혼이 이곳에 있으면 그곳이 진실된 세상이지.
[그리고…….]
“네?”
[그대에게 줄 것이 있어요. 에루인, 개인적인 보상입니다.]
“뭘요?”
[왜 주신께서 이것들을 만드셨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받으세요.]
후두두둑!
세계수에서 물건들이 쏟아졌다.
형형색색의 옷가지들, 다양한 크기의 손가방, 클러치, 숄더백 그리고 선글라스, 목걸이나 브로치 같은 보석 액세서리, 구두…….
“어머?”
지구에서 구매했던 명품 신상들.
“우리 제자 도와줬더니 이런 것도 다 받네.”
에루인은 서둘러 물건들을 주웠다.
다른 엘프들이 못 보게 해야지.
들키면 서로 가져가려고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 * *
마키나 공화국 올드팩토리 중앙 마공학 연구소.
데우스칩도 눈을 떴다.
지끈.
머리가 아프다.
가만히 다시 눈을 감고 기억을 곱씹어 보는 데우스칩.
전이가 이루어진 다음, 늘 해 오던 것이다.
혹시라도 기억의 소실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자아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았는지.
‘문제없군.’
데우스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눈을 뜬 장소.
예전 선임 연구원이었던 자신의 지도 교수, 무트 엑자일이 쓰던 방의 숨겨진 밀실.
‘부디 영혼이 해방되셨기를.’
자신이 서둘러 나선 것엔 이유가 있었다.
케이에게 당하기 전에 보내 드리려고.
데우스칩도 케이가 가진 능력을 알고 있었다.
영혼을 소멸시키는 능력.
하지만 자신이 먼저 죽였으니 영혼은 삭제되지 않았을 터.
아무튼 할 일이 많다.
지구에서 지내면서 접했던 과학 문명.
많은 아이디어가 있다.
그걸 세상 안에 적용하면?
데우스칩은 자리에서 일어나 숨겨진 밀실 문의 잠금 마법 문양을 해제했다.
과거 아바타로 접속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본체인 골렘을 밀실 안에 숨기는 것.
데우스칩이 두 명이 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본체는 밀실에 두고, 마법 문양을 새겨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 아바타는 사라졌고 영혼이 돌아왔으니 본체로 활동해야지.
삐걱.
밀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연구원 놈들은 다 어디 있어?”
돌아왔다는 걸 알려 줘야…….
그때였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명의 여자.
연구원 마리였다.
“오! 이제야 왔…….”
“너 누구야? 이 새끼 봐라? 여기 출입 금지 구역인 줄 몰라?”
무슨!
갑자기 왜 이래?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나?
‘…아하, 그렇군. 삐진 게 틀림없어.’
원래 마리의 성격이 그렇다.
계속 혼자 밖으로 나돈다면서, 자신은 끼워 주지도 않는다고 계속 불평을 해 왔으니.
이럴 땐 꼭 안아 주고 달래 주면 그만.
“하하, 마리! 왜 이래? 나 누군지 몰라? 그러지 말고…….”
데우스칩은 두 팔을 벌리며 마리를 포옹하려고 했다.
순간!
“이 변태 새끼가!”
퍼억!
서슴없이 발을 들어 자신을 걷어차는 연구원 마리.
“켁!”
데우스칩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아프다.
근데 왜 아프지?
“나야 나! 데우스칩이라고!”
“멍청한 새끼야! 사칭할 사람을 사칭해야지!”
발로 걷어차인 부위가 욱신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꼬르륵!
“어…….”
그 와중에 배에서 들리는 소리.
‘배가… 고파?’
이건 또 왜?
자신의 본체는 골렘이다.
골렘이 배가 고플 리 있나.
“너 이 새끼, 안 되겠다. 불법 침입에, 부녀자 희롱에, 중요 인물 사칭죄에, 넌 최소 징역 20년이야. 따라와!”
“자, 잠깐!”
그 순간 데우스칩은 목격했다.
마리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는 도중, 거울에 언뜻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 이럴 수가!’
풍성한 머리털에, 새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한때 마공학 연구소 최고 미남으로 불렸던 젊은 시절 데우스칩의 얼굴.
진짜?
‘설마…….’
주신의 보상인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희열.
골렘이 아닌, 인간의 몸을 되찾았다.
“하하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
“웃어? 이 새끼가 미쳤나?”
“…….”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 * *
찬웅은 화장실에서 드래곤 하트를 복용한 후, 다시 차를 타고 APS 센터로 돌아왔다.
게임에 접속하기 전,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변화한 상태부터 점검하고.
‘벌써 많이 녹았네.’
정제된 드래곤 하트.
그래서인지 게임에서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나진 않았다.
천천히, 안정적으로 마나가 스며들고 있었다.
포스가 사라지고 난 뒤 새로 얻은 힘은 바로 마나, 힘의 근원이 드래곤 하트라서 어쩔 수 없다.
찬웅은 마나를 온몸으로 돌려 봤다.
우우우웅.
포스를 사용했던 아이템과 스킬에 호환이 될까?
‘먼저 인벤토리를…….’
다행히 열린다.
그럼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 착용하는 찬웅.
일부 아이템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진(眞) 아이템은 포스를 불어넣어야 사용 가능하다.
스르륵!
은신막 제대로 작동.
스슷!
폴리모프 복면도.
츠피릿!
암살자 루인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 역시.
‘스킬은?’
당연히 문제없이 잘 발현됐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
‘차원 창고를…….’
게리 스탁턴이 심장에 새겨 준 차원 마법.
의식하자마자 공간이 열렸다.
츠츠츠츠!
‘아!’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공간.
‘이건 뭐…….’
넓다.
너무나 넓다.
끝도 없었다.
창고가 아니라 하나의 세상 같다.
‘이걸 어떻게 다 확인해?’
물론 방법은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지도.
축소했다가 확대했다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구역마다 나뉘어 있었다.
‘없는 게 없네.’
물약 존, 무기 존, 장비 존, 액세서리 존, 희귀 금속 존…….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산맥들은 뭐지?’
줌으로 당겨서 보니.
‘미친!’
모조리 마정석이었다.
마정석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산맥.
그제야 게리 스탁턴과 엘리의 말이 이해가 간다.
수만 년을 써도 못 쓴다고, 저 정도면 수백만 년 동안 펑펑 써도 남아돌겠는데?
츠츠츠츳!
찬웅은 차원 창고를 닫았다.
‘확인은 다 끝났고.’
시스템 패치 전 자신에겐 못 미치지만 그래도 힘을 일정 부분 되찾았다.
또한 드래곤 하트가 다 녹아 그 힘을 모조리 흡수하게 되면 오히려 더 강해질지도.
하지만 자신이 힘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숨겨야 한다.
뭐 때문에?
당연히 침식의 씨앗.
정확하게 말하면 씨앗을 품고 세상 밖으로 탈출한 영혼.
씨앗의 본질은 기생체.
즉, 탈옥범 영혼에 박혀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터.
‘날 두려워한다고 했지?’
놈을 방심하게 만든다.
겁을 먹고 꼭꼭 숨어 버리면 찾아내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확실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다시 힘숨찐으로.
게임에 접속해서 세계수를 만나 보자.
탈출한 놈을 찾는 방법을 알아냈는지.
* * *
각성 플레이어의 포스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포스를 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요 인물의 경호원, 민간 혹은 국가 기관에 소속돼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호의호식했던 각성 플레이어들.
그런 각성 플레이어를 영입하여, 빌런 퇴치와 강력한 공권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심지어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했던 각국 정부.
모두 닭 쫓던 개처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반영률 삭제.
상태창 항목에서 몇 글자 지워진 것뿐인데, 결과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
강력한 물리력, 그 힘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가 총력으로 나서야 할 정도였지만 이제 그들은 일반인이 되었다.
스킬도 사용하지 못한다.
포스가 없는데 무슨 스킬.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한순간에 몰락한지라 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먼저 각성 플레이어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숨어야 한다.
이쪽저쪽으로 은원이 엮어 있다.
조금이라도 포스가 남아 있었다면 걱정할 일이 없지만…….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수습될 일.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문 하나.
- 케이는?
과연 포스의 힘을 잃고 평범해졌을까?
케이는 여느 각성 플레이어와 차원이 다른 사람, 그의 반영률도 삭제되었는지 확인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전동 킥보드로 찬웅을 쳤던 남자가 공원묘지를 빠져나왔다.
킥보드야 쓰임새를 다했으니 아무 데나 버려 두고.
자연스럽게 갓길에 주차된 승합차에 오른 남자.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같다? 그걸로는 부족해. 완벽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영상도 찍어 왔습니다. 피도 흘리고 타박상도 입었습니다.”
“재생해 봐.”
꼼꼼하게 살폈다.
보고 또 보고, 수십 번 돌려 봤다.
케이, 실제 신분은 강찬웅.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나타나면 절대로 막을 수 없다던 세계 최강의 각성 플레이어.
그런데 고작 전동 킥보드에 받혀 나가떨어지는 영상.
그냥 일반인일 뿐이었다.
오히려 더 허약해졌다.
‘연기는 아니야.’
킥보드에 부딪혔을 때 드러난 당황한 표정.
넘어지는 자세, 땅에 쓸렸는지 피도 났고.
‘힘이 사라진 것이 분명해.’
만약 강찬웅이 자동 실드가 발동되는 반지 아이템 같은 걸 착용했더라면 판단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몇몇 진(眞) 아이템은 포스가 아닌 마정석 에너지로 발동되니까.
그러나 영상이 찍혔던 당시, 강찬웅은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영상을 관찰하던 남자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네, 접니다. 케이도 힘을 잃고 평범해졌습니다……. 거의 확실합니다. 네네.”
남자의 보고는 어딘가로 전해졌다.
* * *
여야 대표, 국회의원 중진, 정부 고위 인사, 대기업 회장 등 내로라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여의도 고급 식당에서 비밀리에 회동했다.
“확인했답니다. 놈도 힘을 잃었어요.”
“저, 정말입니까?”
“그놈뿐만이 아니에요. APS 소속 각성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유럽의 모든 각성 플레이어가 시스템 패치로 인해 포스를 잃었습니다.”
“흐음, 그래도 미심쩍은데…….”
사람들은 주저했다.
그동안 케이에게 당했던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나?
솔직히 얼마나 무서웠나?
돈이 있어도, 권력이 있어도, 어린 애송이 하나 감당하지 못해 벌벌 떨었던 세월.
“APS 접속 센터에 오늘도 택배가 왔나요?”
“서버가 닫혀 있던 동안엔 오지 않았지만 패치가 이루어지고 난 뒤 다시 꼬박꼬박 10상자 정도가 배달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APS가 보유한 마정석 아공간 상자는?”
“추정키로 최소 100개입니다.”
엄청난 양이다.
아공간 박스 하나만 까도 미국에서 1년 동안 필요한 마정석 양이 나온다.
이걸 어떻게 그냥 두고 보나?
“흐음, 그럼 최기병 팀장부터 먼저 칩시다.”
“총대는 누가 메죠?”
“허허, 왜 겁들이 그리 많은지… 제가 먼저 나서 보죠.”
“오! 역시 국가에 대한 충정이 대단하십니다.”
“최대한 돕겠소. 우리가 합심하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긴 하죠.”
이야기가 끝나자 요리가 들어왔다.
마정석만큼이나 먹음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