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시스템 패치
케이의 마지막 침식지 공략을 앞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세계 각국의 관심이 초집중, 뉴스나 TV 프로그램에선 전문가들이 나와 마지막 공략의 향방을 점쳤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나?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성공해 낼 것이다.’
‘아니다. 이건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혈투다. 서로 총력을 기울여 맞설 테고, 이번만큼은 케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게임에 접속해 각각의 콘텐츠를 즐기고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들린 전체 공지.
[듀플렉스 전 대륙에 공지합니다.]
[옛 마법 왕국 침식지 보스, 배신의 마계 귀족 데몬이 현 시간부로 소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상 안 침식의 위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또한 NPC들에게도 신의 계시를 통해 이 기쁜 소식이 알려졌다.
와아아아아아아!
대륙 전역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플레이어든, NPC든 예외가 없었다.
특히 NPC, 대륙의 원주민들.
이들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을 붙잡고 악수를 청하는 NPC들.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함께 술집에 가서 건배를 나누고, 목청 높여 노래도 부르고.
플레이어에게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NPC들에게 이방인이란?
어느 날 불쑥 세상을 방문한 낯선 자들, 그래서 아무리 호감도가 높아졌다지만 일정한 거리감이 항상 있었다.
그러나 이젠 완전하게 사라졌다.
한낱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 왔던 NPC들과 이런 식으로 서로 감정의 교류를 나누다니!
얼떨떨했지만 이내 곧 함께 즐겼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되는 법.
그래서 모두 다 행복했다.
* * *
테라퓨타 공중도시.
빛무리가 떨어진 후 내려진 축복.
[정화된 지역에 3시간 동안 주신의 축복이 내립니다.]
시간이 무려 3시간.
그래도 공중도시 플레이어들은 정신없이 상자를 깠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 진(眞) 아이템 보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워질 터.
하지만 그 와중에 상자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은 플레이어들도 있다.
자폭으로 사망한 데우스칩을 제외하고 브랜달의 [중화영웅], 에루인의 [이세계초미녀], 각자 개별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시스템 메시지를 받았다.
[그대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보상으로 선택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해방된 영혼으로서 영원히 지구에 머물 것이냐, 아니면 다시 세상 안 영혼으로 복귀할 것이냐.]
[단! 지구에 남는다는 선택을 하면 가지고 있던 능력은 모두 삭제되고 평범한 지구인으로 살아갈 겁니다.]
[선택은 단 한 번입니다.]
[시스템 패치 전까지 시간을 드립니다.]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흑막아, 너도 들었냐?”
“네, 들었습니다. 장로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돌아가야지.”
처음부터 에루인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녀의 집은 로그드라실, 책임져야 할 아이들도 많고.
“흑막이 넌 벌인 일도 많은데, 남아 있는 게 낫지 않니?”
“글쎄요. 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야, 남아 있는 선택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힘이 사라진 자신.
케이 형에게 애물단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돌아가서 마법 왕국 재건해야죠.”
이로써 지구로 온 이세계 이방인의 선택은 돌아가는 걸로 결정, 사실 케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면 선택은 조금 달랐을지도.
하지만 돌아가서도 언제든지 케이를 만날 수 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판단은 매우 쉬웠다.
3시간이 흐르고.
[1분 후에 서버를 다운합니다.]
[플레이어분들께선 즉시 대기실로 귀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서버를 종료합니다.]
벌컥벌컥!
APS 접속 센터의 캡슐 뚜껑이 차례대로 열렸다.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캡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우스칩.
다행히 현실 페널티는 없는 모양.
“에루인! 아, 어떻게 됐나? 완전하게 끝난 거 맞아?”
“당연하지. 이젠 끝이야.”
“오오! 잘됐군, 잘됐어.”
“그건 그렇고, 넌 어때?”
“뭘?”
에루인은 게임 속에서 들었던 메시지를 데우스칩에게 전했다.
“선택은 무슨! 무조건 돌아갈 거야. 가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실 데우스칩은 에루인의 결정이 중요했다.
그녀가 돌아간다니 당연히 따라가야지.
* * *
드디어 끝이 났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패치 후 일어나게 될 변화에 대한 기대감.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이 출시된 이후로 공식적인 패치는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살짝살짝 변화한 부분도 있었고, 외부 사정에 의해 긴급 점검도 단행한 일이 있었지만 패치라고 이름 붙여진 건 처음이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변화하지?
추가되는 콘텐츠가 있으려나?
진(眞) 아이템 획득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겠지?
한국 APS.
패치의 내용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최기병은 평소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각성 플레이어들을 소집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비밀입니다. 절대 새어 나가선 안 됩니다.”
“무, 무슨?”
“어차피 패치가 되면 알게 될 테지만, 미리 준비해야죠.”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다.
각성 플레이어 조직은 해체될 것이고, 기존 권력의 중심축이 뒤바뀔 터.
그 과정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우리가 케이와 진(眞) 마정석을 지켜야 합니다.”
“네? 지키다니요? 갑자기?”
“설명해 드리죠. 패치 내용은…….”
최기병의 설명을 듣는 각성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 * *
브랜달은 중국 베이징에 있었다.
아직 중국 정부는 비상위원회 체제.
지도자 직선제 시행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브랜달, 즉 덩차오의 소집 명령을 받고 한자리에 모인 비상위원회 리정푸 위원장과 위원들.
그들만이 아니었다.
군부 지도자, 중국 공산당 서기들, 정치국 간부들도 얼굴을 보였다.
덩차오는 모인 사람들에게 중국어 간자체로 쓰인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줬다.
“이건 뭐요?”
고개를 갸웃하는 리정푸 위원장.
“별거 아니야. 거기에 쓰인 글을 또박또박 읽고 종이를 찢으면 돼.”
내용은 간단하다.
“지도자 직선제를 반드시 실현하고 소수 민족 분리 정책을 멈춤 없이 수행하는 동시에 한국인 플레이어 케이에게 그 어떤 적대감도 가지지 않겠다?”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
“맹약을 어길 시엔 미치광이가 되어 끔찍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온몸이 터져 죽는다니.”
뜬금없이 덩차오가 왜 이러지?
이 종이는 그 유명한 진(眞) 아이템 마법 스크롤, 맹약의 주문서가 아닌가.
“아니, 어차피 해 오던 일 아니오? 이렇게 아이템까지 써 가며 약속해야 하오?”
“조금 불안해서 말이야. 내가 보기보다 의심이 많거든.”
“우리가 잘못하면 직접 처리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난 당분간 조용히 쉴 예정이라서.”
“…….”
중국 지도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륵!
덩차오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소름 끼치는 불의 구체.
거부하면 여기서 활활 불타서 죽는다.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씩 나와서 스크롤에 적힌 글을 읽은 후, 찌익! 찌이익! 찌이이이익!
종이를 찢자 반딧불이 크기의 빛 덩어리가 각자의 머릿속으로 심겼다.
‘됐어.’
평범한 마법 스크롤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진(眞) 마정석으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스크롤.
‘효과는 확실할 거야.’
자신은 곧 떠날 몸.
지구에 와서 벌인 일은 깔끔하게 매듭짓고 돌아가야지.
* * *
그 시각, 찬웅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흐흐흐, 난 자네가 해낼 줄 알았어.”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는 게리 스탁턴. 아무래도 침식지 정화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게임 회사의 모든 지분은 자네에게 넘겼네. 데우스칩과 에루인이 가지고 있던 지분들도.”
남은 건 하나.
“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네. 나도 곧 힘이 사라질 테니… 자네 가슴에 손을 대도 괜찮겠나?”
“…왜요?”
“차원 창고 관리 권한을 넘기려고. 용언 마법이라 심장에 직접 새겨야 하거든. 그 외 쓸 만한 마법도 몇 개 같이 새겨서.”
“아! 하세요.”
쿡!
손가락으로 찬웅의 가슴을 찌르는 게리 스탁턴.
그러자 약간의 고통과 함께 차원 마법의 사용 방법이 머릿속에 떠 올랐다.
“드래곤 하트는 복용했나?”
“아직, 패치가 이루어진 다음 먹으려고요.”
“잘 생각했네. 기존 포스와 충돌하면 어찌 될지 모르니, 비워 놓고 새롭게 채우는 것이 훨씬 낫지. 인벤토리를 열지는 못하니까 하트는 미리 빼놓고.”
게리 스탁턴도 알고 있을까?
침식의 씨앗이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그래서 물어보니.
“당연히 알고 있네.”
“언제 나왔는지 알아요?”
“아마 마지막 침식지 공략 도중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파수꾼 처치 퀘스트가 발동하기 직전일걸.”
“근거는 뭐죠?”
“바로 그 당시에 반(反)시스템의 영향력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아!”
데몬과 대화를 나눌 당시 놈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했었다.
아마 그 시점에서 탈출한 것 같다.
“찾는 방법은?”
“흐음, 그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씨앗이 왜 씨앗이겠나? 싹트기 전이기 때문에 찾아내기엔 기운이 너무 미미할 거야.”
“그래도 찾아낸다면?”
“씨앗의 본질은 기생체, 놈이 숨어 있는 숙주를 죽이면 돼.”
파괴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숙주를 어떻게 찾지?
만약 끝내 찾지 못해서…….
“씨앗이 싹을 틔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지구에 침식의 기운이 퍼지겠지.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 거야. 적어도 자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오래 살아야겠군요.”
“네가 자네에게 엘릭서를 괜히 넘겼겠나?”
“…….”
어떻게든 찾아낸다.
그리고 파괴한다.
계속 놔두면 찜찜해서 어떻게 살아?
찬웅은 오래 질질 끌 생각이 추호도 없다.
* * *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게임 금단 증세에 접어든 사람들은 안달이 났다.
대체 언제 패치가 이루어지지?
내용도 궁금하고.
게임 서버가 닫혀 있는지라 패치 시점과 내용은 게임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서버가 열렸다.>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 패치 단행!>
<일부 용병 플레이어의 상태창에서 반영률 항목 삭제>
<충격! 각성 플레이어들 대혼란에 빠져.>
<일부 전문가들, 침식의 위협이 사라졌기에 이미 예견된 상황.>
조금의 유예 시간도 없이, 마치 날치기처럼 이루어진 패치.
그래서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한국 APS.
여기도 어수선했다.
반영률 삭제 때문에?
아니다.
전혀 다른 이유였다.
“장로님? 자, 장로님. 일어나세요…….”
APS 접속 센터 휴게실에서 싸늘한 시신이 된 에루인, 아니 니나 페레즈.
딸기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에루인을 끌어안았다.
에루인뿐만이 아니었다.
“박사님!”
작동을 멈춰 버린 집사형 골렘.
“아아…….”
찬웅도 기분이 착잡하다.
실제로는 돌아간 것뿐이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준비도 해 놓았고.
세상 안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머리론 알고 있는데 감정은 어디 그렇겠나?
슬픈 건 슬픈 거다.
이런 상황이니 드래곤 하트 먹을 타이밍도 못 잡겠고.
“일단 그분들 유언대로 하죠. 유언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무튼 서둘러요.”
빨리 처리하고 하트나 먹자.
APS 소속 플레이어들이 니나 페레즈의 시신과 골렘을 바깥으로 옮겼다.
자동차에 실은 후, 미리 정해 놓은 공원묘지로, 그곳에 두 개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찬웅과 플레이어들은 정성스럽게 시신들을 구덩이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흙을 덮어 예쁘게 모양을 만든 후, 묵념.
‘브랜달은 어디서 갔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죽는(?)다던데…….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을 것이다.
찬웅은 손뼉을 쫙 치면서 주위를 환기했다.
“자! 이제 접속해서 만나러 갑시다.”
“…누굴요?”
“데우스칩과 에루인 장로님요. 그리고 브랜달도.”
“아! 맞다. 살아 계시지!”
솔직히 장례식은 오버였다.
에루인과 데우스칩이 이 사실을 알면 분명 기분 나빠할 터.
찬웅은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딸기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기분이 어때요?”
“네? 뭐가요?”
“포스를 잃었잖아요.”
“흐음,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러자 모두 한마디씩.
최기병도, 이필동도, 우현수도, 고유섭도.
“전 허탈해서 미치겠습니다.”
“하아, 단숨에 늙어 버린 것 같아서.”
“적응이 필요할 듯합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가 안 돼요.”
“케이 님이 가장 심할 것 같은데.”
“당분간 조용히 지냅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알고 있었다 해도 너무나 갑자기 이루어진 패치.
그래서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뿐.
적응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터벅터벅 공원묘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찬웅.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뒤를 따르는 플레이어들.
주차된 곳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팟팟팟! 하면 1초 안에 갈 거리인데.
그때였다.
쐐애애액!
주차장 안을 질주하는 전동식 킥보드.
“어어어어?”
“뭐야!”
남자 하나가 정신없이 휴대폰을 하면서 킥보드를 타고 달려왔다.
그러더니 그대로 찬웅에게.
쿵!
“큭!”
퍼억!
쿵! 데굴데굴…….
킥보드에 치여 땅바닥에 나뒹구는 찬웅.
“헉!”
“케, 아니 찬웅 씨!”
“괜찮아요?”
“다, 다친 곳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와 쓰러진 찬웅을 부축하는 사람들.
“아야…….”
“어머? 피 났어요!”
“이런! 구급차 불러!”
“씨발, 정신은 어디 두고 다녀?”
“진짜 킥라니들 어떻게 해야 해!”
킥보드 운전자는 머쓱한 표정이었다.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보험 처리 해 드릴게요.”
“지금 보험이 문제야?”
“아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이 개새끼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운전자의 멱살을 잡는 이필동.
찬웅이 제지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냥 가시게 해요.”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고, 참! 전 잠시 화장실 좀.”
딸기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제가 따라갈게요.”
“남자 화장실을 왜 따라와요?”
“그, 그래도…….”
“혼자 갈게요. 큰 거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찬웅은 절뚝절뚝 발걸음을 옮겼다.
넘어질 때 발목을 다쳤나 보다.
포스를 잃자마자 이런 사고라니.
공원묘지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잠그는 찬웅.
그리고 자켓 안주머니에서 정제된 드래곤 하트를 꺼냈다.
포스는 깨끗이 비워졌다.
이제 먹어야 할 때.
꿀꺽!
찬웅은 하트를 삼켰다.
동시에 뜨거워지는 아랫배.
마나의 격류가 몸속에서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