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끝난 줄 알았는데…
데우스칩이 망령이 된 자신의 지도 교수를 끌어안고 자폭하는 모습은 공중도시에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도시 위로 올라온 헬하운드의 머리를 따면서 혀를 끌끌 차는 에루인, 그녀도 데우스칩이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쯧쯧, 내 그럴 줄 알았어.’
지도 교수를 죽이는 것이 대학원생 조교의 꿈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댔지만, 뒤편에 숨겨진 연민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는데.
에루인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물론 아바타라서 진짜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저렇게 터져 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니까…….
‘다음부턴 조금 잘해 줘야겠네.’
사실 데우스칩이 골렘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그건 매우 큰 장벽.
혹시 모르지.
진짜 몸을 가지게 된다면 허락해 줄 마음도 있다.
뎅겅!
믿음직한 자신의 제자 케이가 방금 초대구경 마력대포 포신을 잘라 버렸다.
이제 마력 대포의 위협은 사라졌다.
그만큼 에너지의 여유가 남으니까.
“흑막아! 아직 멀었냐?”
“다 됐습니다. 이쪽으로 모두 모이세요.”
마탑의 부관리자는 2명.
브랜달도 마탑의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갑니다!”
청소 시작!
파지지지직!
마탑 꼭대기에서 펼쳐지는 무시무시한 체인 라이트닝.
마치 번개처럼 떨어져 내려.
빠직! 빠지지직!
공중도시 위로 올라오는 놈들을 모조리 지져 버렸다.
후두두둑! 후둑!
속절없이 떨어지는 몬스터.
“속도는 문제없어?”
“예전만큼 빠르지는 못하지만 전투 기동 할 정돈 충분히 됩니다.”
“좋아! 가즈아!”
위잉!
마침내 기동을 시작하는 공중도시.
도시 가장자리에 장착된 마력포 포문이 열렸다.
파슛! 파슛! 파슛!
꽈광! 꽈과광!
미사일과 전투용 소형 드론도.
쐐애애액!
“저기 케이가 이동하는 방향에다가 내리꽂아!”
“네!”
“그렇다고 내 제자에게 명중시키진 말고.”
“에이, 마탑을 뭘로 보고!”
옛 마법 도시 침식지를 질주하는 테라퓨타.
그 가공할 화력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 * *
찬웅은 옛 마법 왕국 도시의 시내로 달려갔다.
쾅쾅! 콰콰쾅!
복수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미친 포격을 쏟아붓는 테라퓨타.
산산이 조각나서 사방으로 흩날리는 몬스터.
팟팟팟팟!
이제 남은 파수꾼은 하나.
데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씨앗이라…….’
침식의 근원.
그동안 생겨났던 모든 문제의 원인.
‘어디 있지?’
씨앗에 담긴 침식의 기운은 매우 미약할 것이다.
그것이 섞여 들어왔을 때 주신도 알아채지 못했다니까.
씨앗을 찾는 건 어렵다는 뜻.
반면 그걸 지키는 파수꾼을 찾는 건…….
‘저쪽이군.’
농밀한 기운이 느껴진다.
폐허가 된 도시.
그래서 거의 반파된 건물밖에는 없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멀쩡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마법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그래서 온기마저 느껴지는 곳.
희한하게도 이 주변엔 몬스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놈이 저기 있다.
이 건물에서 침식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식당 같은데.’
삐걱.
‘문은 열려 있네.’
설마 또 함정?
뭐, 상관있나.
여태껏 해 왔던 대로 부수고 나아가면 그만.
저벅저벅.
찬웅은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포격이 계속되고 있었고.
“응?”
넓은 홀 한가운데, 새하얀 천이 깔린 식탁.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이마에 뿔 달린 인간형 몬스터, 마족, 즉 데몬이었다.
“이런!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아직 반도 안 먹었네.”
찬웅을 보고도 태연했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줄 순 없을까? 어차피 곧 있으면 끝이 날 텐데.”
“…그렇게 해. 천천히 먹어.”
“고맙군. 최후의 만찬이라서.”
스윽.
찬웅은 의자 하나를 끌어 식탁에 데몬과 마주 앉았다.
식도락을 즐기는 데몬.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 한 입 먹은 후, 와인으로 입가심하면서 다시 칼질.
“…맛있는가 봐?”
“사실 조금 부족해. 소스를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구하기 어려워서.”
식사하는 행동도 정말 우아하다.
이 새끼 뭐 하는 놈이지? 귀족인가……?
“그렇게 눈을 부라리지 마. 난 너와 싸울 생각이 없어.”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고.”
“진짜라니까? 열심히 싸워 봐야 너의 그 무시무시한 도끼에 내 두개골이 쫙 열릴 텐데, 뭐 하러? 그냥 곱게 죽는 게 낫지.”
“…….”
“동정심을 가져 줘. 쓸모가 다해 버려진 마족이 불쌍하지도 않아?”
동정심은 개뿔.
그 와중에 놈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넌 침식되지 않았구나.”
“으흠, 사실 됐다고도 할 수 있고, 안 됐다고도 해도 되고, 뭐야… 왜 이래? 내가 처음도 아니잖아? 한 번 만나 봤으면서.”
“아하…….”
그렇다.
성녀도 있었지.
“죄다 침식되어 망령이 되면 일은 누가 하나? 나도 너처럼 맡은 임무가 있는데.”
“임무… 누구에게 받은 거? 반(反)시스템?”
“시스템이라, 자네 인간들은 진짜 이름 하나는 잘 지어. 흐흐흐.”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 가는 데몬.
“시스템, 딱 적당한 표현이야. 그렇지. 신이 우리처럼 사유하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며, 감정을 지닌 존재는 절대 아니지.”
“그럼?”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의지와 법칙. 우린 그것에 따라 움직이고.”
“그걸 알면 너도 법칙을 따라 움직였어야지. 왜 신을 배신했어?”
찬웅의 물음에 데몬이 정색했다.
“어허, 배신이라니! 주신(主神)이 자초한 거야. 원인이 어쨌든 간에 신격의 분화가 이루어졌지 않나!”
신격의 분화.
기존 시스템과 침식된 반(反)시스템.
“애초에 두 개의 시스템이 만들어졌기에 생긴 문제였어. 세상은 하나인데, 의지와 법칙은 각각 두 개라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우리들이였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하나의 신은 고립을 택했고, 다른 신은 탈출을 택했고. 나야 뭐, 입맛에 따라 선택한 거지.”
달그락.
데몬은 식사를 끝냈는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무튼 축하하네. 우린 패배했어.”
패배 선언.
놈이 두 팔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너도.”
“…뭐?”
순간!
휘익!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데몬.
찬웅은 반사적으로 놈의 가슴을 도끼로 찍었다.
츠피릿!
그러나 놈은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콰직!
“크허억!”
갈비뼈를 부수며 심장에 박힌 도끼. 그러자 데몬의 몸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 제기랄, 지구에 마계를 건설하는 건 물 건너갔군……. 마, 마왕 행세는 해 보고 싶었는데.”
프스스스.
뒤를 이어.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이제 동화율 199%에 도달.
동시에.
마법 왕국 침식지에 떨어지는 눈부신 빛기둥.
화아아악!
[듀플렉스 전 대륙에 공지합니다.]
[옛 마법 왕국 침식지 보스, 배신의 마계 귀족 데몬이 현 시간부로 소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상 안 침식의 위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완벽하게 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세상의 교류는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시스템 패치를 단행합니다.]
[앞으로 3시간 후 게임이 자동 종료될 예정이니, 대기실로 귀환해서 안전하게 로그아웃해 주십시오.]
‘…끝났나?’
이렇게 쉽게?
사실 데몬은 자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싸울 의지를 잃고 포기했거나.
그렇다면 퀘스트는?
- 침식의 씨앗 파괴
- 완료 조건 : 씨앗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 처치(완)
- 보상 : 세상의 완전한 정화 / 차원 창고 획득.
[보상이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케이, 강찬웅이 차원 창고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휴우.”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기분이 묘하다.
당연히 홀가분한 마음도.
어깨에 지워졌던 무거운 짐이 내려졌다.
지금부터 인생 즐기는 것만 남았나?
그런데 바로 그때!
띠링!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뭐야? 또 있어……?’
- 세계수와의 만남.
- 완료 조건 : 세계수와 대화(0/1)
- 보상 : 없음.
[퀘스트 수행을 위해 로그드라실로 강제로 이동합니다.]
슈슛!
찬웅의 아바타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 * *
로그드라실.
그 중앙에 놓인 거대한 나무.
찬웅의 눈에 세계수의 문자열과 코드가 보인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덩어리도.
‘신성력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사스템, 주신의 권능을 받은 가상현실 게임의 보조 운영자.
[어서 오세요, 플레이어 케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멀뚱하게 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세계수.
“고맙긴요. 서로 다 잘 살아 보자고 한 일인데.”
[맞아요. 함께 잘 사는 거, 그게 핵심이죠.]
확실히 시스템과 세계수는 다르다.
메시지로 주고받는 것이 아닌, 왠지 대화가 통하는 느낌?
“그건 그렇고, 절 여기 부른 이유는?”
[전해 드릴 것이 있어서요. 용건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먼저 첫 번째 용건부터. 직전에 완료한 퀘스트 기억하시나요?]
“네, 침식의 씨앗 파괴 퀘스트.”
[완료 조건은?]
“흐음, 아마 씨앗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을 처치하는 거였죠?”
[정확해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퀘스트 이름은 씨앗 파괴인데, 완료 조건이 파수꾼 처리라는 것이?]
이상하긴 하다.
정상적인 완료 조건이라면 씨앗 파괴가 들어가 있어야지.
침식된 마도 공학자 무트 엑자일, 역시 침식된 그랜드 마스터 롤랑 카라카스, 침식지 보스였던 데몬도 죽었는데, 그 과정에서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을 파괴한 적은 없다.
그러고 보니 계속 마음에 걸렸던 사실 하나.
패배 선언을 하면서 데몬이 남긴 말.
‘우린 패배했다.’라며 인정한 것까진 좋았는데…….
그리고 너도?
이건 무슨 말이었지?
[진실은 간단해요. 침식의 씨앗이 세상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아니,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가만!
파괴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라졌단 말이 중요하다.
“설마?”
[네, 맞아요. 침식의 씨앗은 세상 안에 없어요. 그건 바깥에 있습니다.]
“이런 씨발!”
[아이러니하지만 케이 님이 너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셨던 것이 화근이에요. 그래서 끝까지 남아 싸우는 걸 포기하고 도망친 겁니다.]
성실한 새끼.
끝끝내 살아남아 보겠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탈출을?”
[우리가 미처 관리하지 못했던 세상 안 영혼에 기생하여 나간 것이 확실해요.]
“…….”
미치겠다.
그럼 지금 바깥엔 대가리에 침식의 씨앗을 박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새끼가 있다는 말이잖아.
어쩌겠나?
무조건 찾아서 없애야지.
문제는 침식이 바깥에 있다는 건데…….
“이번 시스템 패치의 주 내용은 역시 반영률 삭제겠죠?”
[네, 곧 반영률이 삭제될 거예요.]
“그럼 나도 포스를 가지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된다는 말이잖아요. 아무리 진(眞) 드래곤 하트를 복용한다고 해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의 동화율은 199%, 충분해요.]
무슨 상관?
“동화율은 게임 안에서 적용되는 스탯 아닌가요? 아바타와 세상의 합일성을 보여 주는 척도.”
[그것도 맞지만 다른 효과도 있어요. 반영률이 인간 신체의 포스를 각성시킨다면, 동화율은 인간 영혼을 단련시켜요. 캡슐로 연결을 유지하면서.]
“아!”
[포스는 신의 권능이 섞인 기운, 하지만 임시방편입니다. 포스가 있어도 침식될 사람은 돼요. 그러나 영혼이 일정 레벨 이상 단련되면 포스가 없어도 침식되지 않아요.]
포스가 있어도 침식된다.
사도 빌런들이 그 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캡슐로 게임에 접속해 동화율을 올리는 행위, 그것은 영혼의 단련 과정이기도 했다.
“흐음, 그런데 왜 199%인가요? 그냥 200%까지 올려 주면 안 되나? 깔끔하게 떨어지게. 임시지만 예전에 올려 준 적도 있잖아요.”
[말씀드릴게요. 두 번째 용건입니다.]
두 번째 용건이라.
[원래 동화율 최종 설정은 189%까지였어요. 그걸로 영혼의 단련은 충분했거든요.]
[동화율 190%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어요. 고도로 진화한 영혼, 그래서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되는 식이에요.]
[하지만 현재 동화율이 190%대에 오른 플레이어는 오직 한 명, 바로 그대죠. 이건 순전히 재능과 관계된 부분이라.]
그렇다.
브랜달도 189%에서 고정됐다니까.
1%의 차이가 이렇게나 컸나?
“그럼 200%가 안 되는 건 내 재능이 모자라서?”
[아니에요. 그건 선택의 영역이에요.]
‘뭘 선택하라는 거지?’
[동화율 200%가 되면 세상 안 영혼으로 완전하게 편입돼요. 그리하여 당신은 주신께 권능의 힘을 부여받아 저와 함께 이 세상을 운영하고 지배하는…….]
“아! 됐습니다.”
[이 안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신(神)적인 존재가 되는 건데요?]
“싫습니다. 199%로 만족할게요. 절대 올려 주지 마세요.”
[그럴 줄 알았어요.]
완전한 세상 안 영혼이 된다고?
섬뜩하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아무튼 들을 건 다 들었고.
“침식의 씨앗은 어떻게 찾나요?”
[워낙 기운이 미미해서 쉽게 찾을 순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그대도…….]
“네, 열심히 찾아야죠.”
[차원 창고는 알아서 잘 활용해 주세요. 개인적인 욕심을 부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지구에 쓰일 물건들이니까.]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