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보물 창고
두 곳의 대형 침식지가 한꺼번에 공략됐다.
특히 정화된 곳이 옛 헤스티아 성국이어서 대륙인들의 기쁨은 더더욱 컸다.
이제 남은 건?
다시 세워야지.
여러 중소 왕국을 비롯해, 신생 카시우스 공화국, 마키나 공화국, 로그드라실, 드워프 왕국 등은 헤스티아 성국 재건을 위해 어떤 지원이라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모금 운동과 함께 현장 실사단이 파견되고, 각국 주교와 추기경이 소집되어 성황 선출을 시작했으며, 파괴된 대신전 건설을 위해 드워프들도 나섰고.
지구, 현실에서도 헤스티아 침식지 정화는 커다란 화제.
단순한 게임 콘텐츠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분위기.
‘케이가 케이 했네.’
뭐, 이 정도?
그러나 한편에선 또 다른 반응도 있었다.
미국 백악관.
긴급 안보 회의를 주재하는 조셉 라이든 미국 대통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이클 피트에게 물었다.
“…정말 이 아바타명이 맞나? 글자가 하나 틀렸다거나, 착각한 것이 아니고?”
“네, 공략 직후 테라퓨타에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간단한 인사도 나눴고요.”
“허허, 난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솔직히 저도 그랬습니다. 케이와 그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의문을 가졌을 겁니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백악관 참모들.
두 곳의 대형 침식지를 공략한 플레이어는 두 명.
케이와 함께 했던 한 명은 처음부터 손발을 맞춰 왔던 상큼한 딸기도 아니다.
아직까지 확실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브라질 플레이어 니나 페레즈도 아니다.
놀랍게도.
“중화영웅이라니, 케이는 대체 왜 그자와?”
“중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겠다는 케이의 신호가 아닐까?”
“천만에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근거는?”
“요즘 중화영웅의 행동과 발언을 보면 그는 매우 위험한 인물입니다. CIA 일급 감시 대상으로 올라와 있고.”
미국이 가장 예의 주시하는 국가가 있다면 바로 중국.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 일어나는 희한한 사건, 뇌사 상태에 빠졌던 각성 플레이어가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그 후, 중국 내 빌런 각성 플레이어 조직들을 한꺼번에 소탕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더니, TV 인터뷰에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 순혈주의, 극단적인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나선 것.
그가 바로 [중화영웅] 덩차오.
“심지어 상하이 종합 병원, 공산당 2세 정치인 베이징 연찬회 방화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고요.”
과연 케이는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를 리가 없다.
바로 옆 나라인데.
“중국 정부는 이번 공략에 중화영웅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직은 모를 겁니다. 직접 밝힌다면 모를까.”
“그렇군. 아무튼 계속 주시해서 감시하도록.”
도무지 케이의 의중을 모르겠다.
대체 왜 중화영웅을 공략에 끼워 줬을까?
* * *
그 무렵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SNS 게시판에 하나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제목은 ‘헤스티아 성국 침식지 공략’.
영상을 보기 전 중국인들의 반응은 그다지 별로였다.
아니, 누굴 놀리나?
침식지 공략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중국인.
다국적 플레이어로 구성된 테라퓨타 공중도시 직원 중에 중국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유명한 사실.
그래서 중국인 위주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침식지 공략 영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올라가고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려 1억 뷰 조회 수를 달성해 버렸다.
처음 클릭하면 나오는 영상.
미궁인 듯한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는 두 명의 플레이어.
하나는 그 유명한 케이.
중국인에겐 너무나 미운, 다른 한편으론 너무나 부러운, 그래서 증오와 경외가 교차하는 한국인 플레이어.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표가 밝혀지자 중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중화영웅!
한때 중국의 자랑이었던 각성 플레이어.
그가 케이와 함께 있다고?
대체 뭘 하려고?
저곳이 침식지가 확실하다면… 진짜 공략?
혹시 케이의 들러리가 아닐까? 병풍처럼 뒤치다꺼리하면서 인벤토리 물약 셔틀이나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그러나 영상이 시작되자 의심은 사라졌다.
케이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의 중화영웅.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역 공격 스킬.
미궁의 몬스터들이 활활 불타서 사라진다.
당연히 중국인들은 열광했다.
영웅의 부활.
덩차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 같은 중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 맞아. 어쩌면 케이보다 더 강할지도.
└ 난 더 강하다고 봐. 7서클 마법사 NPC급인데?
└ 에이, 최소 8서클이야. 9서클일지도.
└ 근데 플레이어 중에 마법사 직업은 없잖아.
└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거지.
물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런데 애초에 덩차오를 뇌사 상태에 빠트린 건 케이 아니었나?
└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었어.
└ 뇌사의 원인이, 덩차오에게 게임의 현실 페널티가 적용된 것일 수도 있어.
└ 왜 하필 케이와 함께…….
그러나 금방 묻혔다.
└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영웅은 영웅이 알아본다는 말도 있으니까.
└ 덩차오가 영웅은 맞지만, 케이도 영웅이란 말이야?
└ 영웅이 맞긴 해. 한국인이라 문제였지.
└ 맞아, 그가 한족이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 케이의 조상 중에 분명 중국인이 있었을 거야. 거의 중국인일지도.
그러던 중 하나의 SNS 게시물이 또 한 번 세상을 뒤흔들었다.
작성자는 케이.
내용은…….
- 이번 침식지 공략에 큰 도움을 주신 중화영웅 덩차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기회를 빌려 불행했던 과거는 모두 잊고 미래 지향적인 양국 관계가 되길 희망합니다. -
덩차오도 화답했다.
- 저도 이런 기회를 준 케이에게 감사합니다. 아울러 진(眞) 마정석 중국 수출 규제를 하루빨리 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
그러자.
- 국가 간 거래가 아니라 덩차오님의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
이 시점에서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자들은 바로 중국 정부였다.
* * *
대한민국 서울 찬웅의 자택.
찬웅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SNS 게시물을 올리고 난 뒤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그리고 친구 메시지로.
[케이] : 이제 됐냐?
[중화영웅] : 흐흐흐,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케이] : 영상을 왜 찍나 했더니, 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중화영웅] : 중국을 먹으려고요. 그리고 쪼개야죠.
[케이] : 이런 미친놈이…….
웃기는 건 허황된 계획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쪼개는 것까진 몰라도 중국을 먹겠다는 의도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실제로 중국에서 덩차오의 인기는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9서클 대마법사의 무력까지 합하면?
[케이] : 신중화주의에다 순혈주의, 이런 건 또 어떻게 수습하려고?
[중화영웅] : 새로운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면 다 사라질 겁니다. 중국인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더라고요.
[케이] : 그러고 나서?
[중화영웅] : 돌아가야죠. 세상 안으로.
[케이] : 어떻게?
[중화영웅] :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웅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천재가 달리 천재인가?
대화를 끝내고 캡슐에서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찬웅.
당분간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을 것이다.
진짜 쉬어야지.
그냥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오랜만에 지인들과 함께.
스승님과 데우스칩 그리고 딸기도 데리고 가고.
순간!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지?’
인터폰을 통해서 확인해 보니.
“진(眞) 우편 배송 왔네. 문을 열어 주게.”
“…….”
뭐야?
헤스티아 성국 침식지 공략을 성공한 후, 인벤토리로 우편을 받은 건 기억한다. 그것이 진(眞) 우편이라는 것도.
미궁을 빠져나가느라 바빠서 확인해 보지 못했다.
그 후론 깜빡 잊고 있었고.
어차피 진(眞)이면 현실에 배송될 터, 역시 생각대로 오긴 왔지만.
“…들어오세요.”
찬웅은 현관문을 열어 줬다.
그러자 히죽,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게리 스탁턴.
“오랜만이네요.”
“먼저 주신을 대신해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네. 항상 노고에 감사하고 있어. 아! 여기서 심심하다는 의미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 뭘로 보고.
“그래? 모르는 사람도 있더라고.”
게리 스탁턴은 찬웅에게 두툼한 서류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자! 여기.”
“뭐죠?”
“직접 확인해 보게. 앞장에 읽기 편하게 요약본이 있으니까.”
요약본을 훑어보는 찬웅.
첫 장은 전에 봤던 거다.
“듀플렉스 스페이스 회사 지분 양도증서?”
“흐흐흐, 맞아. 전에 받았던 지분까지 합하면 총 40%. 축하하네. 자넨 이제 우리 회사의 대주주야.”
“…….”
“나머지 지분은 세상 안의 모든 침식이 정화되면 자네에게 주어질 거야. 회사의 주인이 되는 거지.”
회사 전체를 넘겨준다니.
처음 지분 줄 때부터 알아봤다.
사실 그닥 달갑지는 않다.
그만큼 책임질 일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표정이 별로군.”
“원했던 바가 아니라서.”
“그럼 뒷장의 재산 목록을 살펴보게. 그럼 생각이 달라질걸.”
찬웅은 서류를 넘겨 뒷장을 읽었다.
재산 목록만 해도 무려 10장.
회사가 보유한 D코인에 달러, 유러화, 위안화, 엔화에 원화 등등 그리고 각종 이름난 기업의 주식, 세계 곳곳에 흩어진 수많은 부동산, 마지막으로… 차원 창고?
“…차원 창고는 뭐죠?”
“진(眞) 아이템이 보관된 차원의 틈이야. 듀플렉스 차원과는 분리된 곳, 일종의 거대한 아공간이라 보면 돼. 주신께서 옛 세상의 모든 보화들을 그곳에다 옮겨 놓으셨지.”
진짜라면 이게 제일 크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그 안에 보관된 진(眞) 마정석만 해도 어마어마하네. 아마 수만 년을 펑펑 써 대도 남을 만큼.”
지금은 아니지만 회사를 소유하면 이것도 다 넘겨준다는 의미.
동기부여 같은 건가?
완전한 침식지 정화에 대한 보상.
“참! 대주주에게 주는 혜택도 있어. 이걸 받게.”
게리 스탁턴은 찬웅에게 고풍스러운 나무 상자를 꺼내 건넸다.
열어 보니 두 개의 아이템이 있었다.
조막만 한 황금빛 보석 하나와 은은한 보라색 액체가 담긴 물약 병.
“이것들은?”
“고도의 연금술로 정제된 골드 드래곤의 하트와 엘릭서.”
“…네?”
잘못 들었나?
하트와 엘릭서?
“아! 참고로 하트는 내 것이 아니야. 아주 옛날부터 대륙에 존재하던 보물이었네.”
“드래곤 하트는 부담스러운데… 먹어 봐서 알아요. 몸이 터지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말게. 정제된 것이라 복용해도 안전해. 아주 천천히, 안정적으로 신체에 적용되니까.”
왜 자신에게 이걸 주는 걸까?
없어도 힘은 충분하다.
오히려 넘치지.
설명을 요구하는 찬웅의 눈빛에 천천히 입을 여는 게리 스탁턴.
“침식이 완벽하게 소멸되면 남아 있는 불안 요소가 뭘 거 같나?”
“그야…….”
찬웅도 잘 알고 있다.
지구의 침식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
“…각성 플레이어?”
“빙고! 사실 각성이 재능과 관계된 부분이라 부작용이 많았네. 예를 들면 빌런들, 심성에 관계없이 누구나 각성했기 때문에. 하나 불가피했어. 침식 방어를 위해 각성은 꼭 필요했거든.”
맞긴 하다.
각성 플레이어가 빌런이 아니더라도 문제.
인간은 불완전하다.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어쩌면 침식만큼 위험한 자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래서요?”
“침식에서 안전하단 판단이 서면 주신은 게임 시스템 패치를 단행할 거야.”
“시스템 패치?”
“모든 플레이어 상태창 항목에서 반영률을 삭제하는 작업.”
“…아!”
“시스템 패치라서 예외 없이 적용될 거야. 자네에게도.”
그렇게 되면 각성의 힘은 사라진다.
포스가 사라져 평범한 인간이 된다.
어떻게 보면 매우 평화로운 방식의 해결책.
아무런 분쟁 없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이런 게 해피 엔딩이지.
“문제는 차원 창고인데… 그건 세상 안 침식을 정화해 준 것에 대한 주신의 보답이거든. 그 안에 보관된 모든 아이템은 앞으로 지구를 위해 쓰일 거야.”
디지털 코드로 이루어진 세상 안 영혼에겐 필요 없는 것들.
“하지만 하찮은 놈들이 욕심을 부릴 수도 있어. 당장 진(眞) 마정석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지킬 힘이 필요해. 부탁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차원 창고는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모든 이가 평등하게 수혜를 누려야지.
하지만.
“왜 접니까? 지금껏 게리 님이 해왔던 일 아닌가요? 계속 하시면 되지.”
“…어, 으음, 그, 그거야 자네가 케이이기 때문이지.”
“쯧, 근거가 부족해요. 제가 케이라는 게 이유가 되나?”
“아, 앞으로 회사의 소, 소유주가 될 텐데, 받아들이게.”
“제가 보물을 사적 용도로 사용하면?”
“그래도 돼! 자넨 자격이 있으니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의 게리 스탁턴.
자격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침식지를 누가 정화했는데.
“…그럼 난 이만!”
팟!
뭐가 그리 급한지 게리 스탁턴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거 수상한데?’
귀찮은 일을 자신에게 떠넘기는 것 같은 느낌.
생각할수록 확신에 가깝다.
드래곤은 원래 게으름의 대명사 아닌가.
‘드래곤 하트라…….’
이걸 먹으면 각성의 힘이 사라져도 상관없다.
그리고 엘릭서.
죽은 사람도 살려 낸다는 신비의 비약.
‘일단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고.’
아직은 침식지가 남아 있으니까.
그나저나 게임 회사의 재산이 저렇게 많은 줄 몰랐네.
‘저게 다 내 것이 될 거라고?’
지금도 주체 못 할 정도로 돈이 넘치는데.
‘쉬면서 돈이나 펑펑 쓰자.’
그런데 어떻게 쓰지?
각성하기 전, 일생을 흙수저로 살아온 찬웅에겐 그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