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다녀오셨어요?
자연을 벗 삼아, 세계수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는 평범한(?) 엘프와는 달리, 다크엘프들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
이곳에 오기 전 찬웅은 에루인에게 다크엘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들판에서 땅의 정령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
다크엘프의 거주지는 인간이 사는 곳과 맞닿아 있었다.
인간과 그렇게 가깝게 살았는데,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엘프들을 납치해 노예로 삼아 왔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하지만 다크엘프들은 무사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그들의 겉모습 때문.
한마디로 못생겼다.
다크엘프가 마족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괜히 나올까?
까무잡잡한 흑갈색의 피부, 까만 손톱, 흰자위도 없는 까만 눈동자, 이빨까지 까맣다.
인간이 가진 미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외모.
그리고 항상 흙을 접하며 사는 이유로 지저분한 위생 상태.
마치 불가촉천민처럼 사람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도 꺼렸다.
또한 어둠과 땅의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 때문에 매우 강하기도 했고.
이것이 다크엘프가 인간이 지배하는 대륙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그러나 그들도 침식당했다.
다크엘프 여왕마저.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종족의 역사지만…….
본디 침식이라는 저주가 그렇다.
사연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재앙.
그로 인해 본성이 변질되고 오로지 파괴의 심성만 남았다.
침식의 근원은 소멸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
뱀처럼 꾸불거리며 날아오는 셀라핌의 까만색 손톱 공격.
채챙!
자르지 못할 것이 없다던 도끼의 강기와 부딪쳐 불꽃을 만들어 냈다.
‘울버린이야, 뭐야?’
공격의 강함도 위협적이지만 도무지 기척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또 사라졌어.’
셀라핌이 어디에 숨는지 어렴풋이는 알겠다.
‘땅속.’
기가 막힌다.
물도 아니고 단단한 흙으로 이루어진 땅속을 소리도 없이 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유령처럼 솟아올라 공격을 가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찬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공격이 올 때, 그것을 방어해 내는 것뿐.
파숫!
츠팟!
채챙! 채채채챙!
물론 반격도 시도했다.
셀라핌은 땅 밑에 있다.
그래서 도끼를 들고 마구잡이로 땅을 찍어 봤지만.
퉁! 투우웅! 퉁!
강기를 막아 내는 반탄력.
무언가가 공격을 대신 받아 줬다.
‘땅의 정령?’
방어력으로 따지면 땅의 정령을 능가할 존재가 없다.
어떤 충격이든 흡수해 광활한 대지로 흩트려 버리니까.
또한 자신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바람길 산책 순간 가속도 봉쇄된 상황.
푹! 푸푹!
스펀지처럼 물렁물렁해지면서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그리고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 움직임을 방해해 왔고.
‘이거 정말 성가시네.’
집중해야 한다.
이쯤에서 셀라핌을 구성하는 코드와 문자열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브랜달은?’
공터 저편에서 현란하게 쏟아지는 스킬의 향연.
콰쾅! 츠지직, 꽈르릉!
대마법사 브랜달과 흑마술의 대가 렐리스가 펼치는 마법 전쟁.
“꿇어라! 창녀야! 아직 너와 나의 눈높이가 맞춰지지 않았다.”
“허리끈을 풀어서 바지를 내려 봐. 그럼 내가 무릎을 꿇어 줄게. 어때? 관심 있어?”
“멍청한 년! 플레이어는 그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도 몰라?”
“그래? 그거 아쉽네. 아무튼 고자라는 말 아냐?”
쟤들은 입으로 싸우나?
어쨌거나 브랜달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비록 아바타가 8서클이긴 해도, 영혼만은 9서클.
마법의 강함이란 서클의 숫자와 마나량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깨달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나나 걱정하자.’
파숫, 파숫!
채챙! 채챙!
셀라핌도 괜찮은 건 아니다.
흔히 다크엘프를 칭하는 말.
어둠과 땅의 자식.
어둠에 동화된 다크엘프는 완벽한 무(無)의 상태.
모든 걸 숨길 수 있다.
모습은 물론, 움직임, 몸에서 흐르는 기운 그리고 영혼마저도.
동시에 땅의 정령이 미리 파 놓은 땅속 통로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대체 뭐지?
이놈은 왜 안 죽어?
‘어떻게 공격을 막아 내는 거야?’
셀라핌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은 파괴하고 싶은 마음뿐.
또한 바깥에서도.
그러려면 케이, 이놈을 반드시 죽여야 하고.
지금까지 놈을 죽이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심지어 참신의 권능을 소유한 성녀와 온전한 힘을 가진 드래곤도.
그때부터 준비했다.
놈을 제대로 유인해서 묻어 버릴 수 있는 함정을.
파숫!
채챙!
찬웅은 살짝 답답해졌다.
벌써 시간이 꽤나 흘렀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
이놈의 미궁은 어째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말려 죽이려고 해?
“셀라핌, 얼굴 좀 보자?”
“….”
대답이 없다.
하긴!
소리가 나면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니까.
찬웅도 은신막을 시전했지만 소용없었다.
모습을 숨길 순 있어도 기운은 감출 수 없는 노릇.
확실히 셀라핌의 공격은 변칙적.
머리를 노리기도 했고, 목을 찔러 왔으며, 땅 밑에서 손톱만 움직여 발목을 노리거나.
하나하나가 필살기.
집중하지 않으면 당한다.
급기야!
서걱!
“윽!”
결국 허용한 일격.
종아리가 화끈하다.
서거걱!
허벅지에 또!
포스가 자동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침식의 기운도 거세다.
하체를 통해 침범하는 침식.
포스를 움직여 몰아내면 그만이지만 셀라핌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공격과 은신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미치겠네.’
아무리 침식에 강한 포스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바타를 갉아먹는다.
종국엔 영혼까지 오염시킨다.
플레이어라고 침식당하지 않을까?
사도 플레이어만 봐도 안다.
서걱! 서거걱!
갈수록 늘어나는 상처.
방어만 해서는 답이 없다.
찬웅은 기다리고 있었다.
‘떠올라라.’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 디지털 문자열과 코드.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채앵! 채채챙!
자신의 스킬 중의 하나인 약점 포착과 연계를 통해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내 파괴한다.
그러려면 일단 보여야 하고
찬웅은 점점 무아지경에 빠졌다
예상 못 한 방향에서 가해지는 공격.
채채채채챙!
저절로 움직이는 도끼.
그리고 그 순간!
“…응?”
스르륵.
공터 저편에서 마치 꼬리처럼 언뜻 보였다 곧 땅속으로 사라지는 문자열.
파숫!
채앵!
또 보인다.
‘찾았어.’
우우우우우우웅!
찬웅은 온몸의 포스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자잘한 공격보다 묵직한 한 방으로…….’
강대한 포스의 위력.
쿠쿵, 쿠쿠쿠쿠…….
파직! 파지지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미궁.
단단한 벽에 금이 간다.
도끼가 커진다.
충만한 포스 강기로.
그러나 그에 비례해 빠르게 소모되는 포스.
우드드드드드드!
‘한 번만 더…….’
파숫!
나타났다.
조금 먼 거리지만.
따끔.
허리띠에 부착된 가속 앰플이 자동으로 주입되고.
파파팟! 파팟!
소리보다 더 빠른 찬웅의 아바타 케이.
이미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잡았다.”
츠피릿!
마치 쐐기처럼 변한 도끼는.
콰콰콰콰콰콱!
자루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쿠직!
느낌이 온다.
손으로 전해진 선명한 타격감.
“꺄아아아악!”
꿀꺽!
재빨리 자원 재생 물약을 꺼내 마시면서 한 번 더!
콰악!
“끼아아아…….”
쿠르릉!
갈라지는 땅.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셀라핌.
얼굴에 길게 난 도끼 자국.
“…제, 제엔장! 이, 이럴 수는 없어.”
“잘 가라.”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진부한 대사는 집어치워.”
“쿨럭, 으흐흐…….”
치지지지지.
셀라핌의 얼굴이 깨진 그래픽처럼 조각조각 떨어진다.
“…신이시여!”
서걱!
[듀플렉스 전 대륙에 공지합니다.]
[헤스티아 서쪽 침식지 보스, 정신 나간 다크엘프 여왕 셀라핌이 현 시간부로 소멸했습니다.]
그 광경에 기겁하는 진혈의 군주 렐리스.
셀라핌이 죽었다.
무조건 케이를 죽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년이 도끼 몇 방에 뒈졌다.
“아, 안 돼!”
급기야 몸에 힘을 풀고 두 팔을 활짝 벌려서.
“마법사! 나, 날 죽여! 빠, 빨리! 죽이라고!”
브랜달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친년인가?’
한참 잘 싸우다가 갑자기?
혹시나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 여길 찔러! 내 심장이야! 화염 쐐기를 박아 넣으라고, 그럼 내가…….”
순간!
츠피릿!
콰직!
등 뒤에서 날아온 섬뜩한 도끼.
뻥 뚫린 구멍.
렐리스의 상반신이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너어, 너한테 죽으면 아, 안 되는데… 내, 내가 이럴 줄 아, 알았어.”
[헤스티아 북쪽 침식지 보스, 교활한 진혈의 군주 렐리스가 현 시간부로 소멸했습니다.]
[위업이 달성되었습니다. 플레이어와 대륙 주민들 간의 호감도가 극에 달했습니다.]
“형!”
“그래, 다친 곳은?”
“없어요.”
끝났다.
빛기둥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침식의 근원은 제거했으니.
하지만 침식지는 여기 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좀 쉬시죠, 지구로 돌아가셔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하하하, 빨리 나가죠. 사실 조금 불안하네요. 보통 이런 미궁 클리셰의 결말은…….”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투둑, 투두두두두두…….
“…미, 미궁 전체가 무너지는 걸로 끝나죠.”
“하아! 이 망할 새끼야! 말이 씨가 됐잖아!”
“아, 아니, 그게 꼭 제 탓이라고는…….”
그 와중에도 들려오는 메시지.
[시스템의 과부하가 일부 해소되었습니다.]
[묶여 있는 영혼들이 다수 해방됩니다.]
[듀플렉스 대륙의 인구가 점점 늘어납니다.]
쿠쿵! 쿵쿵쿵쿵!
미궁이 무너진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부터 무너졌다.
통로를 이용해 탈출할 수 없게끔 말이다.
“이거 꼼짝없이 죽겠는데요?”
“내 손에 먼저 죽어 볼래?”
“…….”
[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정화된 지역에 10분 동안 주신의 축복이 내립니다.]
축복은 개뿔!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동화율 돌파도 개뿔!
[케이 님의 인벤토리에 시스템에서 발송한 진(眞) 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진(眞) 우편도 개뿔!
어디로 가지?
귀환도 불가능했다.
아직 현실 페널티는 완전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집중 또 집중.
셀라핌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가만!
“야! 브랜달!”
“네?”
“여길 파! 디그 마법으로!”
“으, 으아! 아, 알았어요.”
땅 밑으로 숨자.
예상이 맞는다면…….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움푹, 움푹, 움푹, 움푹, 움푹…….
그러자.
“오!”
넓은 공간이 나온다.
아마도 땅의 정령이 파 놓은 모양.
와르르르, 우지끈, 쿠쿵!
위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 살았다.”
“뭐 해? 계속 파야지. 귀환 가능한 지역까지.”
“…네.”
푹푹푹푹!
찬웅은 맹세했다.
당분간 쉰다.
진짜로!
* * *
딸기는 찬웅의 옆을 지켰다.
뚜껑이 열린 캡슐.
그의 몸엔 수분과 영양 보충을 위해 수액이 투여되고 있었다.
‘하아.’
언제 깨어날까?
그녀는 찬웅이 반드시 침식지 정화에 성공할 거라 믿었다.
그가 누군데?
실패는 실 감아 둘 때나 쓰는 거.
딸기는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밥도 옆에서 먹었다.
화장실 갈 때만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보는 눈이 없다면 요강에다 해결하는 것도 염두에 뒀을 터.
다 이유가 있다.
요즘 존재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실 페널티 때문에 찬웅과 함께하지 못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경쟁자도 너무 많다.
그중에 가장 위협적인 사람이 바로 민도연.
‘아니, 이 언니는 왜 자꾸 질척거려?’
지금도 자신의 반대편에서 찬웅의 캡슐을 지키고 있었다.
‘연예인이면서 스케줄도 없나?’
찬웅에게 대시하다가 까였으면서.
물론 자신도 까였지만.
그래도 차이는 극명하다.
찬웅이 이야기하길 민도연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 자신은 특별한 친구.
특별이란 수식어가 붙었잖아!
‘그냥 포기할 것이지.’
찬웅의 캡슐을 지키는 여자는 하나 더 있다.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는 엘프 장로 에루인.
사실 에루인도 원래는 경쟁자 목록에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무슨 걱정이냐고?
남녀 사이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
스승이 자기가 되고, 제자가 여보 되는 거다.
그러나 케이는 데우스칩과 절친한 사이.
에루인을 향한 데우스칩의 일방적 짝사랑을 모를 리가 없을 테고, 그래서 경쟁자 목록에서 삭제.
‘…오줌 마려워.’
잠깐 화장실 갔다 올까?
하지만 그동안 찬웅이 깨어나면?
‘처음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본 사람이 나여야만 해.’
이건 중대한 문제.
그가 깨어나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고 상상해 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생긋 웃으면서.
‘다녀오셨어요?’
그럼 그가 말하겠지.
‘네! 덕분에.’
미소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이 통하겠지.
그렇게 작은 교류가 쌓이고 쌓여서…….
‘…안 되겠어.’
오줌이 너무 마렵다.
막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후딱 해치우고 돌아왔는데…….
“와아!”
“깨어났다.”
“수고하셨어요.”
“잘됐다. 개똥도 쓸데가 있다고, 브랜달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니?”
뭐지?
신의 장난인가?
아니, 하필 화장실 간 사이에…….
딸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가.
“다녀오셨어요?”
“네! 덕분에.”
그래도 절반의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