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미궁 속 전투 (2)
찬웅이 미궁 안으로 들어간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공중도시에서 내려온 APS 소속 플레이어들.
케이가 들어간 직후 사라진 입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기는 뒀다 뭐 합니까? 미사일로 박살 냅시다.”
“건물이 폭삭 무너지면 어쩌려고?”
“…안 되겠죠?”
현재 자신들이 할 일은 없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러니 기다릴 수밖에.
그런데?
“야야! 빨리 파!”
“지금 파고 있어요.”
“포스가 그게 뭐냐? 하아, 젠장, 내가 같이 들어갔어야 했어.”
에루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
입구가 보이지 않으니 플레이어들을 닦달해 땅을 파고 있었다.
땅을 파고들어 가서 진입할 생각인가 본데, 어느 세월에?
또 판다고 해서 밑이 뚫려 있으라는 보장도 없고.
“브랜달, 그 애새끼만 있었어도 땅은 금방 팠을 거야. 뭐든 꼭 필요할 때 없어.”
“삽 아이템 없어? 데우스, 넌 뭐 하냐? 쓸모도 없는 새끼.”
“혹시 디그 마법 스킬 익힌 사람?”
정신없이 땅을 파는 그녀에게 다가간 최기병.
“최 팀장, 너도 빨리 땅이나 파.”
“진정하세요, 장로님. 아무리 파 봐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 계시잖아요……?”
“하아.”
삽질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어 대는 에루인.
“나도 알아. 하지만 뭐라도 해 보려고 이러는 거지.”
케이와의 관계를 아는 최기병으로선 그녀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한다.
“여기 말고 장로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거?”
“만약 저 미궁 안에 폴른스타 성녀 제단에서처럼 로그아웃 제한이 걸려 있다면…….”
“음?”
뭔가 생각났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에루인, 차분하게 말을 잇는 최기병.
“위험한 건 여기가 아니라 바깥입니다.”
맞다.
놈들의 목적은 현실의 케이, 즉 강찬웅을 죽이려는 것.
자신도 경험하지 않았나!
“지금 바로 바깥에 나가셔서 케이를 지켜 주십시오. 저도 나가서 의료진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치유 물약도 준비하고.”
“…….”
에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을 하는 제자다.
당연히 적도 많을 터.
세상 안에도, 세상 바깥에도.
“알았어. 바로 나가서 캡슐 옆에 딱 붙어 있을게.”
“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에루인이 있으면 최소한 게임 밖은 안전할 터.
누가 그녀를 상대해?
최기병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침식에 거의 홀로 대항하는 케이.
이제야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니.
데우스칩도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는 중.
마키나 공화국 뉴팩토리 마공학 연구소로 연락을 취해서.
“나다. 이방인 몇 명 보낼 테니까, 벽을 뚫을 수 있는 드릴 골렘 몇 개 분해해서 넘겨줘.”
- 완전히 분해해서요?
“아니, 아공간 가방에 들어갈 정도로만. 조립은 내가 할 테니까.”
- 아하! 모듈 상태로 나누라는 거죠? 근데 뭐 하시려고……?
“알 거 없고 빨리 준비나 해.”
기존 드릴 골렘만으로 충분치 않다.
케이가 들어간 미궁 건축물, 굳이 자세하게 보지 않아도 매우 단단해 보인다.
평범한 금속 드릴로는 흠집도 나지 않을 것 같고.
‘충분히 강화를 해서…….’
드워프들에게도 아다만타이트 합금 드릴 제작을 부탁해야겠다.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이거라도 해야지.’
그냥 가만히 마음 졸이며 지켜만 보는 것보단 훨씬 낫다.
* * *
사도 플레이어를 죽인 후, 다시 미궁에서 재개된 몬스터 웨이브.
벌써 하루가 꼬박 지났다.
팟팟!
콰콰콰콰쾅!
폭탄을 놓고 도망치고, 놓고 도망치고…….
효과는 확실하다.
터지기만 하면 통로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는 그대로 녹아 버리는데.
문제는 파워 스틱 밤 Ⅱ 재고가 점점 소진되고 있다는 것.
벌써 가지고 온 물량의 절반을 써 버렸다.
‘전쟁은 보급이 전부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야.’
어쩔 수 없다.
아껴 써야 한다.
“캬캬캬캭!”
“크르륵!”
이젠 좀비 뱀파이어와 미친 다크엘프 새끼들이 섞여서 공격해 온다.
진짜 많이 죽였는데,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지? 또 이 미궁은 얼마나 넓기에?
‘대체 침식이란…….’
이 힘의 정체가 뭘까?
세상을 다스리는 주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침식.
죽여도 죽여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방향 감각의 상실.
현재 위치가 어디지?
‘제기랄! 또 왔던 곳이잖아.’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빙빙 돌고 있었다.
순간!
[이미 탐색된 지역을 저장해서 미니 맵을 작성합니다.]
[미탐색 지역은 회색으로 표시됩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 지원이지.’
이제 자신의 위치가 보인다.
팟팟팟팟!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막힌 벽은 도끼로 뚫고.
캉캉! 카카캉! 퍽퍽!
집요하게 달려드는 몬스터들.
스핏!
서걱!
통로 안이 또 가득 찼다.
‘한번 정리하고…….’
찌이이이잉!
도끼에 두껍게 어리는 강기.
츠파파파파파!
꽈드드드드드…….
찬웅의 손에서 떠난 도끼가 날아가는 경로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를 갈아 버렸다.
팟팟팟!
다시 이동.
몰려드는 몬스터.
이게 끝나기는 할까?
순간!
“음?”
안면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
찬웅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무언가.
츠핏!
지나가고 나서야 파공음이 들린다.
‘…단검?’
똑똑히 봤다.
아이템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도.’
몬스터에 섞여서 자신을 공격하는 플레이어.
사도부터 먼저 처리해야 한다.
팟! 파팟! 팟팟!
보인다.
희끗희끗 사라졌다, 나타났다가 하는 이름표.
츠피릿!
도끼가 날았다.
하나는 길막 몬스터들을 걷어 내는 용도.
츠핏!
또 하나는…….
서걱!
‘맞았나?’
확인.
파팟!
단검이 날아온 장소로 가 보니.
프스스스스!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플레이어.
‘하나는 죽였고…….’
그때였다.
“퍼킹!”
“개자식아!”
“뒈져!”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헬버드.
오른쪽에서 찔러 오는 날카로운 레이피어.
왼쪽에서 휘둘러 오는 모닝스타.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팟!
쿠쿵!
헬버드는 목표물을 잃고 땅바닥에 박혔다.
오른쪽 레이피어는 왼쪽 모닝스타를 든 놈의 몸통을 찔렀고.
“어?”
콰직!
도끼질 한 방에 헬버드를 든 [레드울프]의 머리가 사라졌다.
“…대, 대니얼!”
자신의 동료를 찌르고 당황해하는 [그린울프]는.
서거거거걱!
찍소리도 못한 채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강기의 도끼에 의해 세로로 쫙 갈라졌으며.
“맙소사!”
공격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굳어 버린 [옐로우울프]도.
콰콱! 콱! 콱! 콱…….
눈 깜짝할 새 수십 번 번뜩이는 현란한 도끼날을 그대로 가슴에 받았다.
프스스스스.
자신에겐 쉬웠지만 꽤나 강한 놈들이었다.
APS 소속 플레이어 중에서도 이만한 능력을 가진 이는 찾아보기 힘들 터.
어쩌면 딸기에 필적할 정도.
하지만 그보다.
‘참나, 이 새끼들, 지들이 무슨 파워 레인저야? 레드, 그린, 옐로우…….’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사도도 핑크울프.
그럼 나머지 한 놈의 색깔은?
찬웅은 도끼로 어두운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벽과 한 몸이 된 채, 그림자 은신 스킬로 기회만 엿보고 있던 플레이어 한 명.
영국 국적 플레이어 로빈 도일, 아바타명 [블랙울프], 동화율의 177% 고레벨 플레이어, 울프 패밀리의 2인자였다.
지금까지 사도 플레이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의 동화율과 장비들을 숨기며 살아왔다.
언제나 고대해 왔다.
필드에서 케이를 만날 순간만을.
놈이 현실에서나 무섭지, 게임 속에서 뭐가 무서워?
군주의 은총을 받은 자신들.
게다가 놈은 혼자.
분명히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먼저 그 영광을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군주께서 약속하신 200억 코인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뭔가?
자신보다 강한 레드도 한 방에 죽었다.
합동 공격이었는데도 말이다.
꿀꺽.
[블랙울프]는 벌벌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았다.
어둠에 동화된 자신을 정확하게 겨눈 도끼.
‘나오라고?’
나가야 하나?
도저히 결정을 못 내리겠다.
왜 여기 왔을까?
그냥 조용히 지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급기야!
츠피릿!
콰악!
“꺼어어…….”
심장이 부서지고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극악한 고통.
로빈은 직감했다.
‘서, 설마 내가… 주, 죽어?’
게임 안에서 죽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제는 현실. 캡슐 안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아, 안 돼!”
프스스스스스.
찬웅은 가루로 사라지는 [블랙울프]를 힐끗 보면서 벽에 박힌 도끼를 회수했다.
휘리릭!
“나오라고 할 때 나올 것이지.”
어차피 죽였을 테지만.
혹시 알아?
반성의 기미가 보였으면 살살 죽였을지도.
살살 죽이는 것과 집중해서 죽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현실에서 죽고 사는 문제.
어쨌든 역시 이놈도 사도 플레이어이자 범죄자들.
욕망에 사로잡혀 인류를 배신한 빌런.
더구나 아직 더 있다.
느껴진다.
미궁 곳곳에 숨어 있는 플레이어들의 기척이.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파파파팟!
심판의 시간.
찬웅은 여전히 어두운 미궁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 * *
케이가 미궁 속으로 들어간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게임 속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현실은 조용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게임에 접속해 여가를 보내는 플레이어들. 침식지 공략에서 소외된 용병 플레이어들도 필드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새로운 콘텐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터져 나온 언론 보도.
<영국 런던에서 게임을 즐기던 5명의 플레이어가 캡슐에서 시체로 발견, 공통 사인은 급성 심근 경색>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터져, LA 할렘가에서 또 한 명의 캡슐 접속 사망자 발생.>
<연이은 사망자,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나폴리…….>
<가상현실 게임의 위험이 재현되나? 폭락하는 코인 시세.>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플레이어들은 공포에 떨었다.
└ 결국 사망자가 나왔네.
└ 그래, 게임 접을 때도 됐지.
└ 하아, 이거 미치겠네.
└ 안 돼! 난 목숨 걸고 한다.
└ 죽은 사람들 직업이 뭐야? 용병? 다른 직업도 있나?
└ 그게 중요해? 사람 잡는 게임이야.
그러다가 다시 밝혀진 사실들.
<영국 런던 캡슐 사망자, 5명 모두 경찰 추적을 받았던 범죄자로 밝혀져.>
<런던 경찰 국장 브리핑, 사망자들은 최소 6건의 연쇄 살인 혐의로 수배를 받았던 플레이어.>
<영국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캡슐 사망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사도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살인자였다.>
<죽은 후, DNA 채취를 통해 살인범으로 밝혀진 경우도 있어.>
└ 뭐야? 그냥 자연사잖아.
└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잘 죽었다.
└ 안심이네. 계속 게임 해야지.
└ 에이,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 그놈들에게 죽은 피해자들은 괜찮고?
└ 맞아! 그 새끼들에게 줄 동정심은 없어.
알고 보니 캡슐은 선악(善惡) 판정 기계 아닌가.
죄의 무게를 다는 저울, 염라대왕의 심판.
이건 천벌이었다.
* * *
[중화영웅] 덩차오, 즉 브랜달은 베이징에 도착했다.
갑작스럽게 모임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후기지수(後起之秀) 젊은 정치인 연찬회.’
이 모임이 결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에루인 때문. 그녀는 기존 중국의 고위급 정치 위원들을 싸그리 죽여 버렸다.
조금이라도 이름난 정치인은 거의 죽었다고 보면 됐다.
그 결과 수면 위로 부상한 젊은 정치인 2세들, 그들이 공산당 권력의 공백을 빠르게 메꾸고 있었다.
브랜달의 출신 성분도 확실했다.
본체의 아버지가 바로 덩샨.
또한 뇌사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하면서 상하이 각성 플레이어 관리청 본부를 장악한 실세 중의 실세.
게다가 그가 주창한 한족 중심의 신(新) 중화사상은 소분홍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통해, 후기지수(後起之秀) 젊은 정치인들의 비상한 관심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브랜달로서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공산당 권력의 중심에 진출할 기회.
“오! 덩차오, 오랜만이야. 나 기억나지?”
“영광입니다. TV로만 봤는데.”
“한족 순혈주의, 감명 깊었어요.”
“저도 덩차오 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중화의 중심이 바로 우리 한족 아닙니까.”
대환영을 받는 브랜달.
원래 중국의 정치라는 게 이런 식.
자기들만의 리그였다.
가진 놈들끼리 모여서 꽌시를 형성,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고.
점점 무르익어 가는 모임 분위기.
브랜달도 어울려 줬다.
‘참자, 참아.’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그런데.
“요즘 케이, 그놈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 마침 그 문제로 알려 드릴 것이 있는데.”
“뭡니까?”
“현지 정보통에 따르면 캡슐에서 접속한 지 이틀 동안 로그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음? 그래요?”
케이에 대한 주제가 나오자 몰려드는 사람들.
브랜달도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틀이면 꽤 긴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는 캡슐 사망 사고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요?”
“놈이 캡슐에서 뒈지면 소원이 없겠군.”
후기지수(後起之秀) 정치인의 얼굴들이 미소로 가득했다.
케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
“이참에 APS 센터를 날려 버리면 어떨까요?”
“어떻게?”
“제 숙부가 북부 전구 사령관입니다. 북한 지도부와 긴밀한 인연을 맺고 있고요. 북한에서 전술 핵미사일을 쏴 주면?”
“흐음,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아무튼 케이, 그 개자식이 캡슐에서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하하, 이심전심이라고, 저도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이 새끼들 봐라?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브랜달.
‘감히 케이 형님을 어쩌고 어째?’
그제야 브랜달은 주신께서 자신의 영혼을 덩차오의 몸에 빙의시킨 이유를 깨달았다.
버러지 같은 놈들은 당장 박멸해야 한다.
바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