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하필이면…
플레이어가 NPC와 연합해서 내전이나 다름없는 권력 투쟁의 장에 뛰어든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 NPC, 특히 귀족들에게 플레이어는 썩 믿음직한 존재가 아니다.
받아 줄 세력도 없었고.
하지만 시민들이 주축이 된 공화파의 경우엔 가능했다.
케이가 망령의 침식지를 정화한 이후로 폴른스타의 시민들은 플레이어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편.
그래서 엘프의 나무 길드와 연합도 이루어진 것이고.
혁명 과정에서 플레이어 역할은?
제법 크다.
은근히 쓸모가 있었다.
대기실 이동 게이트와 인벤토리를 이용한 물자 운반, 죽어도 죽지 않는 특성 덕택에 목숨이 위험한 비밀 임무에 우선 투입, 주요 지도부 NPC 밀착 경호 그리고 자금 지원.
임민혁의 길드는 현실에서의 자산을 모두 코인으로 교환해 폴른스타 공화파 지원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실현 가능성 없는 일에 너무 올인하는 것이 아니냐?
실제로 많은 길드원이 탈퇴했고 투자금도 빼 갔다.
그럴 때마다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설득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고.
결국 도박은 성공했다.
이제 임민혁은 영웅이 되었다.
“길드장, 케이가 뭘 부탁했지?”
“임시 정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는 역할이야. 아! 그리고 루트와 플로라와도 따로 계약했어.”
“계약금은?”
“케이가 약속한 건 5천만 코인. 임시 정부하고는 따로 논의해야 하고.”
“뭐……? 5천만?”
“맞아. 방금 계좌로 들어왔어.”
5천만 코인!
상상이나 했나?
“…미친! 우리 대박인 거야?”
“그래, 모두 고생했다.”
벼락부자가 됐다.
그뿐인가?
앞으로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 독점적으로 가질 혜택이 수두룩하다.
사실 케이가 준 코인은 포상금의 성격이 크다.
엘프의 나무 NPC들을 죽지 않게 끝까지 보호해 줘서 고맙다는 성의 표시.
“사업 자금 제외하고 나머지는 지분에 따라 나눈다.”
“와와와!”
“그리고 우리도 정치에 대해 잘 모르니까, 정치학에 능통한 학자나 교수님을 한 분 섭외해서 자문을…….”
순간!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울리는 친구 메시지 알림음.
‘누구지?’
확인해 보니.
[욜로하는 인생] : 축하해. 나 기억하지? 후회하는 중이야.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딩딩동] : 저, 길드장, 혹시 길드에 아직 자리 남아 있어?
[코인 홀릭] : 그동안 생각 많이 했다. 나 다시 받아 줘라. 열심히 할게.
[8학군 인싸] : 민혁아! 길드 재가입 요청했어. 빨리 승인해 줘.
[나도 갑질 좀 해보자] :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어디로 가면 돼?
.
.
.
웃기네.
미래가 없다며 길드 탈퇴했던 놈들이.
“뭐야? 지금 메시지 엄청 울리는데…….”
“나도 막 연락 오네.”
“누구야? 얘들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어음, 내, 내가 하도 기분이 좋아서 SNS에 자랑 글 좀 올렸더니.”
“어이구, 인간아! 그새를 못 참아서!”
하긴 얼마나 기쁠까?
사업도 사업이지만 케이와 연줄을 만들었다는 것, 이건 길드원 모두에게 커다란 자산.
자랑할 만하다.
“지금도 계속 와. 어떤 새끼는 진짜 받아 주는 줄 아나 봐. 지금 여기로 오겠다는데?”
“길드장, 받아 줄 거야?”
“내가 미쳤어?”
탈퇴한 길드원을 왜 다시 받아?
임민혁은 그럴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다.
“그놈들 친구 목록에서 삭제하고 현실에서도 손절해.”
“당연하지.”
“난 벌써 삭제했어.”
어림도 없다. 누굴 호구로 보나?
* * *
공화정.
시민이 직접 자신의 대표를 선출한다.
말은 쉽다.
하지만 지구 역사에서도 초기 공화정은 줄줄이 실패했다.
로마도 공화정이었다가 제정으로 돌아섰고, 영국ㅊ 청교도혁명으로 인해 탄생한 공화정도 실패해서 왕정으로 복고, 프랑스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마키나 공화국은?
사실 공화정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데우스칩의 1인 독재 체제.
정치를 귀찮아하는 데우스칩이 말 잘 듣는 허수아비 앉혀 놓고 지시만 내리는 것이 마키나의 공화정.
이왕 혁명이 일어난 거,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해야지.
이를 위해서 정치 사정에 밝은 플레이어의 도움이 필수적.
그래서 찬웅은 공화파 지도자 루트에게 말했다.
“임민혁… 아니 맨발의 청춘하고는 이야기를 잘 끝냈으니 잘 상의하시면 됩니다.”
“사실 난 지금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요, 케이. 후우, 정치라.”
“걱정하지 마세요. 잘하실 겁니다.”
“열심히 해 보겠소. 에루인 시조님께서도 허락을 해 주셨다고 하니.”
루트와 플로라는 [이세계 초미녀]가 에루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시고.”
돈이야 충분하다.
리스타리칸, 게리 스탁턴에게 받은 돈만 1조 코인.
이 돈이면 나라를 새로 세울 수도 있다.
폴른스타에 잠시 정박하기로 한 테라퓨타 공중도시.
혁명을 완성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력. 마키나 공화국에서 혁명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에 뭘 하지?
상자나 까 볼까?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러기로 한 모양.
그런데?
“어?”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최기병.
“왜 그래요?”
“아, 그, 그게… 심심해서 상자 몇 개 깠더니 이게 나왔습니다.”
“뭐죠?”
최기병이 보여 준 물건.
“…골프채?”
“네, 드라이버입니다.”
“이게 상자에서 나왔다고요?”
“심지어 레어 등급입니다.”
등급도 정해져 있다면?
“혹시 스킬도?”
“당연히 붙었죠. 비거리 증가.”
골프채 아이템이라니!
“흐음, 그러고 보니 제가 취득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내용은요?”
“미국 전직 대통령이자 부동산 재벌 도너 타람핏이 토리노 왕국에서 골프장 건설에 착수했다는 소식입니다. 곧 완공 예정이고.”
“아!”
지구인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게임 속에서 만들어질 예정, 이 시점에서 골프 관련 아이템이 상자 안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게임 개입을 허용한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게임과 현실의 뒤섞임.
지금까진 게임이 현실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진(眞) 아이템이나 마도 공학 그리고 각성 플레이어.
이젠 그 반대.
현실 문명이 게임 속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허용될까?
“사실 이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죠?”
“케이 님의 인벤토리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인데요. 현실 속 물건의 게임 속 재현.”
“그렇긴 하네요.”
한편 케이와 최기병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브랜달.
‘현실이라…….’
전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별 의미 없이 흘려들었다.
‘데우스칩이 만든 무기와 케이 형이 전에 마시라고 준 콜라 그리고 골프채. 저게 다 진짜 세상의 물건이란 말이지?’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바깥은 어떤 세상일까?
마탑주 지위를 내려놓은 브랜달, 책임질 것도 없이 홀가분하다.
‘개인적인 복수도 했고.’
또한 마탑이 주체가 되는 침식지 정화에 자신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스 배리어 안에 숨어서 광역 마법이나 날리는 수준.
반면 에루인은 아바타로 접속해서 침식지 안을 자유자재로 활보하고 있고.
‘나도 에루인 장로처럼 진짜 육신을 통해 이방인의 몸으로 돌아온다면…….’
케이의 행보에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나가는 것이 먼저.
그래서 브랜달은 찬웅에게 말했다.
“케이 형.”
“응?”
“전에 절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다고 했죠?”
찬웅은 브랜달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때 그런 제안을 했었다.
하지만 브랜달은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다며 괜찮다고 했고.
‘결심했나 보네.’
비록 9서클에 올랐지만 그간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겠나?
브랜달에게는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서.
“어, 네가 원한다면.”
“그럼 보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찬웅은 브랜달을 데리고 마탑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데우스칩과 에루인도 함께.
“준비됐어?”
“네.”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영혼 해방의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브랜달을 겨냥해.
찌이익.
처음 사용해 보는 물건이다.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르고.
기다려 보면 알게 되겠지.
시간이 흐르고.
“흐음.”
또 흐르고.
“…….”
계속 흘렀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데우스칩과 에루인.
“아무 일 없네?”
“그러네요.”
“…가짜 아니야?”
“에이, 설마, 시스템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브랜달도 살짝 실망한 표정.
“제게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요?”
“네가 왜?”
“어쨌거나 성녀에 의해 한번 오염된 몸이잖아요. 주신께서 절 좋게 보실 리가 있겠어요?”
“흐음.”
그래서 브랜달은 체념했다.
“괜찮아요. 세상 밖이 궁금하긴 하지만 곧 여기도 현실처럼 변할 테니… 어?”
“뭐야? 왜 그래?”
“어어어어…….”
순간!
통나무처럼 풀썩 쓰러지는 브랜달.
찬웅과 데우스칩, 에루인은 재빨리 그를 부축해서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였다.
“갔네.”
“그래, 갔어.”
“지금쯤이면 바깥에서 눈을 떴겠구나.”
“어디 있을까?”
“한국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는데.”
“나중에 연락이 오겠죠.”
데우스칩은 침대로 다가가 브랜달을 살폈다.
“가사 상태로군. 심장이 뛰어. 생명 활동은 멈추지 않았네.”
“내 본체도 마찬가지야. 세계수께서 보호하고 계셔. 아직 살아 있고.”
“얘도 마탑 안에 있으니 안전하겠지.”
아무튼 성공적으로 넘어간 것 같으니까.
“폴른스타가 안정되면 우리도 바로 출발하죠, 침식지로.”
* * *
에루인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벌였던 폭풍 암살행은 양국 모두에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일본에선 총리를 비롯한 내각 고위 관료들이 한꺼번에 사망했기 때문에, 정치권 대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여러 정치 세력이 난립하고 심지어 다음 총리 인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중국은 훨씬 더 심했다.
중국 주석 화롄방 사망을 시작으로, 그다음 주석에 추대된 중화 인민단 장륀, 국가 비상위원회 위원장 국무원 부총리 덩샨까지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에루인은 중국에 한동안 머물면서 다음 지도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무조건 죽여 댔다.
각 파벌의 수장에, 공산당 고위 관료, 군부 지휘관 그리고 꽤 이름난 각성 플레이어도. 그나마 합리적이고 극중화주의에 물들지 않은 지도자가 나서자 이 무지막지한 암살행이 끝났다.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종합 병원.
에루인에 의해 사망한 국무원 부총리 덩샨의 아들 덩차오가 입원해 있는 장소.
덩차오는 한때 중국 최강의 각성 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아바타명은 [중화영웅].
그러나 스톤포지 공방전에서 케이의 플레이어 킬에 의해 아바타가 삭제되고 현실에서도 치명적인 상해를 입어 연명 치료 중.
살아날 가망은 없다.
그런 덩차오를 진찰하는 병원 원장과 의사들.
“반응 없지?”
“네, 뇌사 상태니까요. 그런데 덩샨의 친인척들이 덩차오의 가상현실 게임 캡슐 치료 중단을 요구해 왔습니다.”
“뭐? 쯧! 지들이 뭔데… 무시해!”
“이미 그렇게 통보했습니다.”
“속이 뻔히 보여. 덩차오가 죽어야 유산이 자신들에게로 넘어오잖아.”
지금은 죽었지만 덩차오의 아버지 덩샨은 중국 공산당에서도 핵심 지도부에 있었던 정치인.
따라서 재산이 얼마나 많겠나?
추정 재산만 20억 위안, 달러로 치면 3억 달러 가까이.
“절대 사망 판정 하지 말고 캡슐 치료 계속하자고.”
“네.”
캡슐 치료는 비싸다.
그리고 덩차오가 입원한 VVIP 병실은 말할 것도 없고.
치료비는 매월 덩차오의 재산 관리인에게 청구된다.
상해 종합 병원 원장은 덩차오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쪽쪽 빨아먹을 생각.
특별한 처치가 필요 없이 캡슐 안에 그냥 넣어 두기만 해도 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는데 미쳤다고 치료를 중단해?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캡슐 안에 들어 있는 덩차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접속 성공을 알리는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다는 걸.
병원장과 의사들이 나가고.
벌컥!
열리는 캡슐 뚜껑.
“…으흑.”
덩차오가 눈을 떴다.
몸은 덩차오, 영혼은 브랜달로.
이미 깨어 있었다.
의사들이 나누는 대화도 다 들었고.
다만 밀려드는 생소한 기억을 정리하느라 잠시 누워 있었을 뿐.
‘어후, 머리가…….’
브랜달은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가장 시급한 일은 기억을 정리하는 것.
이윽고.
‘나 참! 하필이면 중국이야?’
게다가 케이 형에게 응징을 당해 아바타도 삭제된 놈의 몸에 깃들었다니.
아무튼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어떻게든 케이 형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내야지.
‘…그냥 중국을 확 먹어 버려?’
서클부터 만들어야겠다.
아니면 아바타를 만들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