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혁명이다! (2)
카시우스 제국 황도 폴른스타.
카라카스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어 통치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 마땅히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었다.
물론 황궁에 황제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있었지만 주신의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지거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죽어 버렸고.
그리하여 벌어진 투쟁의 현장.
하지만 찬웅은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 번 경험해 본 걸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발품을 팔아 가며 폴른스타에 들른 이유, 엘프의 나무 길드가 공화파의 주축 세력이라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
“저런! 호로 잡놈들을 봤나? 쫓기는 애들, 내 새끼 맞지?”
수정구 영상에 보이는 일련의 사람들.
마법사들에 의해 공격당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잡혔다.
“네, 플로라하고 루트도 있네요. 플레이어들도 함께.”
“훌륭해! 역시 내 후계자들이야. 쓰레기 같은 황제나 귀족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모가지 썩둑 잘라 버리고 혁명하는 게 백배 낫지.”
데우스칩도 맞장구쳤다.
“으하하! 에루인 말이 맞아! 혁명만큼 좋은 것이 있나?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성큼성큼 걸어가 통신용 수정구를 작동하는 데우스칩.
“마리, 나다!”
- 선임 연구원님이시네요. 왜 연락하셨어요? 마탑에서 탱자탱자 노느라 바쁘신 분이.
“그건 오해… 아무튼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만 말한다.”
- 뭔데요?
“혁명이다!”
- 네……? 마키나 공화국에서 쿠데타라도 일으키시려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아니! 폴른스타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 오! 정말요?
“그래, 어서 혁명 지원군 조직해서 폴른스타로 투입해!”
- 롸저, 현재 생산된 군수물자 및 전투용 골렘 챙겨서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마력포 궤도 골렘 절대 잊지 마. 혁명은 탱크로 완성되는 거야.”
그 와중에.
스슷!
에루인은 인벤토리에서 쌍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일단 내 새끼 괴롭히는 버러지 처리하고 올게.”
그러자 막아서는 브랜달.
“장로님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제가 처리하죠.”
“어쭈? 9서클 대마법사라 이거지? 나랑 맞먹겠다고?”
“그, 그게 아니라 마침 풀어야 할 숙제가 있어서.”
“쯧쯧, 애초에 저 주문쟁이들 저렇게 만든 건 네 탓이야. 티끌도 안 되는 놈들에게 배신이나 당하고, 꼴 좋다.”
“…….”
가슴을 후벼 파는 말.
대꾸도 못 하겠다.
“좋아! 그럼 넌 마법사들 맡아. 난 저 귀족 새끼들과 기사들,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다들 알아서 잘하고 있지만…….
‘난 뭐 하지?’
찬웅은 끼어들지도 못했다.
* * *
그 시각 폴른스타.
훤한 대낮이지만 밤처럼 어둑했다.
거대한 공중 도시가 낮게 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먼저 아바타명 [맨발의 청춘] 임민혁 플레이어.
그는 일단 안도했다.
‘…도박이 성공한 건가?’
대박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듯.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건 NPC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진짜 다행이야.’
플레이어와는 다르게 죽으면 부활도 하지 못하는 이들.
몇몇 멍청한 플레이어들은 NPC들이 프로그램에 의해 짜인 데이터에 불과하다며 폄하하고 있지만 겪어 보면 누구나 안다.
NPC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들은 때 묻지 않았다.
같이 일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감정적인 교류도 오갔으며, 때로는 미묘한 느낌도 받았었다.
임민혁은 옆에 있는 플로라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그런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
왜 그럴까?
걱정이 된다.
실제로 플로라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공화파의 지도자 루트도 마찬가지.
엘프의 나무는 본질적으로 암살 정보 길드.
시조 에루인 이후로 길드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생긴 권력의 공백.
그걸 차지하기 위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황도로 몰려왔다.
다들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 그들이 거느리는 기사, 병사…….
그러면 누가 고통받겠나?
당연히 시민이지.
마치 점령군처럼 폴른스타에 입성한 불한당들.
시민의 재산을 제 것처럼 빼앗는 것은 기본, 비협조적인 시민은 납치 살해, 심지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성희롱과 강간을 밥 먹듯이 해 댔다.
처음은 시민 보호 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커지는 스케일.
공화파의 시작은 폴른스타 시민들의 요구에서부터 출발했다.
왜 황족이나 귀족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나?
시민의 대표가 지배자가 되면 안 되는 건가?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다.
대륙의 초강대국 중 하나인 마키나 공화국.
제안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시민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임시 평의회는 이젠 은퇴해서 유유자적 쉬고 있는 엘프의 나무 전(前) 길드장 루트를 소환해 지도자로 추대했다.
그리하여 출범한 폴른스타 건국 준비 위원회.
공화주의에 거부감이 없는 플레이어 세력과도 연합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나타난 마법사 세력에 의해 위기에 처했고.
목숨을 구원받은 건 기쁘다.
그러나 폴른스타 권력 투쟁에 뛰어든 건 케이와 에루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일.
길드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며 질책을 받을까 두렵다.
권력 투쟁? 공화국 건설?
주제넘은 짓은 당장 집어치우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말이다.
순간!
우우우우웅!
츠츠츠츠츠!
테라퓨타에서 빛무리가 떨어져 내렸다.
* * *
부탑주 로미오는 반쯤 넋이 나갔다.
‘테라퓨타라고? 왜 여기서…….’
비록 쫓겨났지만 마탑은 마법사들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 위치가 어디 있는지 파악해 두는 건 기본.
최근까지의 위치는 폴른스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헤이트론 구릉지, 그래서 안심했다.
이곳으로 오지도 않을 테지만, 만약 온다 해도 테라퓨타의 이동속도로 볼 때 폴른스타까지 한참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최대 속도로 온다고 가정하면 약 두 달 정도, 그 기간이면 폴른스타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 애초에 폴른스타 따위에 관심이나 두고 있을까?
이방인들의 목적은 침식지를 정화해 코인이나 버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저 위에서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모두 다 내려다보고 있을 터.
‘피, 피해야 해.’
마탑에 대항하는 건 자살행위.
게다가 마법사 인원수도 쪼그라들었다.
처음 추방된 마법사의 숫자는 약 만여 명.
그중 절반이 이탈했다.
고향으로 낙향한다든지, 대형 영지나 중소 왕국으로 가서 몸을 의탁한다든지, 아니면 따로 세력을 모아 새로운 마탑을 건설해 본다든지.
결과적으로 로미오 부탑주를 따르는 마법사는 약 5천여 명.
그래도 이 정도 숫자면 왕국 하나는 씹어먹을 수 있는 전력.
하지만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절대 요새 마탑이 바로 머리 위에 떠 있는 판에.
모두 겁에 질렸다.
슬금슬금 발을 빼는 마법사들.
폴른스타 사방에 흩어진 마법사들도 마탑을 목격했을 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테라퓨타에서 떨어진 빛무리.
“헉!”
“으아아아.”
“이, 이런!”
로미오는 알고 있었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안티 매직 필드?’
서클이 꽁꽁 묶였다.
신체도 결박당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동시에.
스스스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낯설지 않다.
설마?
“…타, 탑주?”
플라이 마법으로, 마치 천사처럼 나타난 브랜달.
“오랜만이군요.”
“어…….”
살아 있었다니.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 아니 전보다 더 높은 경지로.
“진리를 추구해야 할 마법사가 세속에 눈이 멀어 고작 권력이나 탐하는 신세로 전락했네요. 각오는 하고 이런 짓을 저질렀겠죠?”
“그, 그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마법사의 긍지는 지켰어야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로미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브랜달 마탑주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지?’
맞다.
케이에게 공격을 당해 빈사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렇다면?
“다, 다행입니다. 살아 계셨군요.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래요?”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우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아하! 또 배신하시려고?”
“…….”
로미오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하긴, 욕심이 났겠지. 재능이 없어도 마탑 제어 권한만 확보하면 천하를 가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브랜달은 알고 있었다.
다 털어놓고 비는 수밖에 없다.
여태껏 곁에서 지켜본 그의 성정을 감안하면 그 편이 훨씬 더 잘 먹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탑주님, 지금이라도 용서해 주신다면 마탑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그러나 브랜달은 싸늘했다.
“로미오, 세상은 변했어.”
“무, 무슨 말씀이신지…….”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다만.”
“네네.”
“변화하는 세상에서 당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걸림돌만 될 뿐.”
우우웅!
브랜달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마나의 기운.
로미오는 직감했다.
죽는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사, 살려 줘. 우, 우릴 다 죽이려는 건 아니지……? 그래, 아닐 거야. 탑주는 착하잖아.”
브랜달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브랜카인과 브랜스톤.”
“뭐?”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끔벅이는 로미오.
브랜달이 말했던 사람들, 전대 탑주와 부탑주의 이름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있어?”
당연히 기억이 난다.
“이방인 케이가 서클을 동결하고 마탑 지하 비고에 감금… 그러고 보니 그들도 죽이지 않았잖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맞아. 그게 당신이 본 마지막이겠지.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를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 두 사람은 마탑의 권한을 양도받자마자 지하 비고로 들어가 내가 직접 죽였어.”
“아아아…….”
“난 착하지 않아. 착한 건 케이 형님이지.”
그때였다.
번쩍!
눈앞을 가리는 빛.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헉!”
움푹 파인 구덩이 안으로 옮겨진 로미오.
브랜달이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다.
“아, 안 돼. 살려…….”
쿠쿠쿠쿵!
어딘가에서 날아온 흙이 구덩이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쌓이고 또 쌓였다.
“으아아아…….”
점점 작아지는 로미오의 목소리.
핵폭발로 인해 움푹 파였던 구덩이가 어느새 편평한 평지로 변했다.
응징과 복구를 한 번에.
그 모습에 마법사들은 벌벌 떨었다.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짝 엎드리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법사들에게 명한다!”
폴른스타 전역에 울려 퍼지는 브랜달의 음성.
“지금 즉시 그라운드 테라로 가라! 거기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고 조용히 자숙하라! 만일 명을 거역하고 다른 장소에서 내 눈에 띈다면…….”
쿠쿵!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
“이유 불문하고 보는 족족 파묻어 버리겠다.”
9서클 대마법사 브랜달의 선고가 떨어졌다.
* * *
대영주 베일우드 후작은 당황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처음 마법사 세력과 계약을 했을 때 카시우스 제국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5천의 마법 병단.
가히 무적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실제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폴른스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소드 마스터 헥토르 변경백, 마법 병단의 집중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경쟁자는 사라졌다.
남은 건 시건방진 공화파 세력.
상상이나 되나?
주는 밥이나 처먹고 납작 엎드려 자비를 구해도 모자랄 하찮은 벌레들이 감히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달려들어?
본때를 보여야 한다.
주동자들은 다 목을 잘라 성문에 걸어 두고, 또한 공화파에 협조한 놈들도 모조리 잡아 교수형에 처할 계획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그래서 베일우드 후작은 자신의 충직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우린 천천히 물러난다.”
그런데.
“왜 대답이 없나?”
조용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베일우드.
“…무슨?”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엔 목이 잘린 기사들의 시체뿐.
대체 언제?
기척도 없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전설의 암살자 루인이라도 왔나?
순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촉.
“누, 누구?”
“시끄럽고, 유언이나 말해 봐. 혹시 알아? 시간 나면 전해 줄지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살려 주시오, 제발!”
“귀족이라면서 구질구질하게. 하긴 제대로 된 놈이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어음, 무릎을 꿇으라면 당장이라도…….”
“응, 싫어. 어떻게 대영주라면서 자존심도 없니?”
“자, 잠깐…….”
서걱!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베일우드 후작의 머리.
죽는 순간까지도 후회했다.
그냥 가만히 영지에 틀어박혀 있을걸.
* * *
플레이어 임민혁은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엘프의 나무 길드, 공화파 세력과 연합을 이루면서 한 번쯤 상상했던 일.
마치 신처럼 케이가 개입해서 얽히고설킨 매듭을 도끼로 툭툭 끊어 주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상상.
하지만 케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마법사 NPC 하나와 [이세계 초미녀]라는 플레이어가 모든 일을 끝내 버렸다.
저들이 적이 아닌 게 천만다행.
바로 그 순간!
툭툭!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 그래서 돌아봤는데.
“허어억!”
“안녕하세요? 맨발의 청춘 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 명의 아바타. 그리고 이름표가…….
“…케이 님?”
“네, 접니다.”
“어, 어이쿠!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뭘 영광까지야, 아무튼 플로라에게서 간단하게 들었습니다만.”
“아! 네네.”
“저하고 일 하나 같이 해 보실래요? 물론 게임 안에서.”
어떻게 거절하랴!
임민혁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